< 간판을 바꾸다(6) >
“물려받으면 안 되는 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이세준 부회장은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울컥한 마음에 내뱉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든 변명을 해야 하긴 할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변명 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들 앞으로 회사를 하나 차려주었는데 무슨 핑계를 댈 수 있을까?
진땀을 흘리며 입을 열지 못하는 이세준 부회장을 보며 이경호 회장이 더욱 의심 어린 목소리로 채근했다·
“대답해 봐라· 도대체 그게 무슨 이야기야?”
“그게····”
“그래 무슨 사정 때문이냐?”
찰나의 시간에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냥 폭탄을 터뜨려 버릴까 하다가도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숨기고 살았던 걸 드러낸 후 다가올 후폭풍이 두려웠다·
하지만 둘러댈 다른 핑계가 마땅치 않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이세준 부회장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형준이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고를 치고 있었습니다· 걔가 데리고 놀다가 낙태시킨 여자만 셋입니다· 그것도 제가 알아낸 숫자만 셋이니 아마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을 겁니다·”
이경호 회장은 이런 식의 답변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셋이나?”
“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금이야 현진물산 관련 문제로 나름 인정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전에 투자 실패로 인한 손실이 무려 삼천억이 넘습니다· 대표적으로 터키에 투자한 호텔은 지금까지 계속 적자를 일으키고 있어요· 매해 적자 규모만 삼백억이 넘습니다·”
“그 그래?”
“그런 녀석이 이 큰 금융그룹을 이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엄청난 리스크를 떠안게 되는 겁니다·”
“네 말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야· 그런데 왜 홍콩에 회사를 세워?”
“이번에 형준이가 일을 진행하면서 저도 느낀 게 많았습니다· 형준이가 성격이 급하고 잔실수가 많아 은행업은 분명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지금처럼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에 맞춰야 하는 IT업체를 경영한다면 의외로 좋은 성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번 방향을 잡으니 변명이 술술 이어져 나왔다·
마치 형준을 위해 오랫동안 고심한 결과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홍콩에 IT 법인을 세운 게냐?”
“네·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일단 법인을 설립해놓고 형준이가 인수해서 잘 운영해볼 만한 사업체를 은밀히 고르고 있던 참이었는데요·”
이렇게 되자 이경호 회장의 답변이 궁색해졌다·
“내가 아무리 뒷방 늙은이처럼 회사 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런 것도 모를 줄 알았냐? 그런데 등기이사로 등재된 여자는 누구야? 법인 설립한 여자·”
“아··· 형준이랑 예전에 가까운 사이였답니다· 홍콩 대학교를 졸업하고 3개 국어를 하는 재원인 데다가 집도 제법 괜찮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형준이가 워낙 갈대처럼 마음을 바꿔대서 제가 일부러 좀 가깝게 지내라고 등기이사에 등재했습니다· 그 아이도 좋다고 했고요·”
사실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그 여자는 오래전 형준이 홍콩지사에서 근무할 때 만났던 여자인데 똑똑하고 좋은 학교를 나온 재원은 맞지만 결코 좋은 집안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 똑똑한 머리로 좋은 집 자제들과 만나다 허영심이 들어 급기야 마카오에서 도박에 빠지기까지 했다·
딱 봐도 이상해 보이는 회사의 등기이사를 덜컥 맡을 리가 없다·
당연히 도박 자금을 준다는 말에 그녀가 승낙한 거다·
“IT업체 인수는 무슨 돈으로 하려고?”
“전에 금융위기 때 챙겨둔 자금이 있으니까요· 적당한 회사 하나 인수할 만할 겁니다· 물론 부족한 자금은 대출받아야 할 테지만 그 정도는 지원해줄 생각이었구요·”
이 회장은 그때 챙겨둔 자금이 어떤 돈인지 알고 있었다·
회사 몇 개 폐업시키고 은밀하게 챙겨둔 비자금·
“그래?”
“저렇게 해도 싫다고 하면···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제 생각은 확고합니다· 형준이에게 신영금융을 맡길 수 없습니다·”
“그건 너무 이른 생각 아니냐? 만약 네가 예전에 그런 말을 했다면 나도 이해를 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
이경호 회장은 손을 들었다·
“그만· 형준이는 신영을 이어갈 인재다· 내 손자라서 하는 말이 아니야· 제법 사람 사귈 줄도 알고 배짱도 두둑하다· 사고나 치고 다니던 옛날과 달라·”
“·······”
이세준 부회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지만 가까스로 이 위기를 벗어난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옥을 잠시 보고 온 것 같은 소름이 몸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다면 왜 나에게 상의하지 않았니? 이게 뭐냐? 난 또 형준이 이름으로 페이퍼 컴퍼니라도 만든 줄 알았다·”
“페이퍼 컴퍼니라뇨· 예전에 제 개인자금으로 만들어둔 돈을 자본 삼아 적당한 업체 하나 인수하게 해줄 생각이었습니다·”
“아예 신영과 선을 그을 셈이었구나?”
“선을 그어 놔야 나중에 욕심을 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럼 신영은 누구에게 넘길 셈이었냐?”
“세민이가 있지 않습니까?”
“세민이? 허허··· 난 네가 그렇게 세민이를 끔찍이 여기는 줄 꿈에도 몰랐다·”
“싫든 좋든 세민이는 제 동생입니다· 그리고 세민이가 그렇게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적어도 손에 들어온 건 잘 지키는 놈입니다· 맡겨 놓으면 회사를 크게 성장시키지는 못해도 망하게 할 놈은 아닙니다·”
“그건 네 말이 맞다만 그래도 이건 네가 심했다· 법인 폐업하고 흔적도 남기지 마라· 혹시나 형준이 귀에 들어가면 안 되니까· 이건 나 혼자만 알고 있으마·”
“후··· 알겠습니다·”
이세준 부회장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수긍하자 이경호 회장이 탐탁치 않은 얼굴로 일어섰다·
“쓸데 없는 짓을 해가지고는··· 일 봐라·”
“들어가세요·”
이세준 부회장은 문을 열고 나가는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이마를 만졌다·
촉촉한 땀이 이마와 등허리에 맺혀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건 느꼈겠지만 아마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이건 의심스러운 정황만으로는 결코 잡아낼 수 없는 사실이니까·
“윤 비서 냉수 좀 가지고 들어와·”
잠시 후 들어온 아리따운 여비서는 탁자에 냉수를 올려놓고는 말도 없이 등받이에 거의 눕다 시피 기대어 있는 이 부회장의 뒤로 돌아가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어깨에서 퍼지는 기분 좋은 시원함에 이 부회장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쉬세요· 너무 신경 쓰시면 몸 상해요·”
비서의 달콤한 말이 오늘따라 유독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이경호 회장은 김 부장을 다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세준이··· 뭔가 이상해·”
“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이 회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다른 건 다 이해할 수 있었다·
놀기 좋아하고 사고를 많이 쳐서 중요한 자리를 맡길 수 없다는 말·
그래서 다른 회사를 맡기겠다는 말·
그런데 이건 자신의 자식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핏줄이 괜히 핏줄이 아니다·
조금 부족하고 조금 못 미더워도 하나라도 입에 더 물려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일진데 회사에서 내쫓겠다는 결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평소 세준이가 냉정한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냉정한 정도를 넘어선 거다·
오히려 냉정하게 형준이 앞길에 방해되는 일들을 처리해왔다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지 이건 방향 자체가 틀렸다·
“세준이와 형준이 사이가 이상해·”
“부자지간 사이가 말입니까?”
“혹시 뭐 아는 거 없나?”
“글쎄요· 부회장은 평소에 이형준 상무에 대해서 별 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직원들이 보면 조금 과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을 아끼셨으니까요· 하지만 또 그렇게 이 상무를 싫어한다는 인상을 준 것도 아닌 것이 회사 내에서 어렵고 힘든 일들만 맡긴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승진도 상당히 빨랐고·”
“입으로 내뱉지는 않았을 뿐 이 상무의 어깨에 꽤나 힘을 많이 실어주는 인사정책을 유지했기 때문에 직원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래도 만약 뭔가 이상하다면 말이야··· 이유가 뭐가 있을까?”
김 부장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역사적으로 왕이 왕자를 싫어한 경우는 많았습니다· 왕위에 대한 불안감 때문 아니겠습니까?”
“형준이가 자신을 밀어내고 부회장 직을 노린다? 그게 불안했다? 아니야··· 그것 가지고는 부족해· 내가 살아있는 한 불가능한 일이야· 그리고 설마 그것 가지고 불안해하려고·”
“그럼··· 역사적으로 부자간의 관계가 극적으로 틀어지는 경우는 대개 한 가지 경우였습니다·”
“그게 뭔데?”
“여자입니다·”
“여자? 여자라··· 하··· 듣기에도 민망스러운 일이지만 왠지 그거라면 이해가 될 것 같아· 그런 비이성적인 행동이 여자로 인한 거라면 말이야·”
김 부장은 그 비이성적인 행동이 무얼 말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이경호 회장은 손끝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들기다가 말했다·
“알아봐· 형준이도 그렇고 세준이에 대해서도 싹 다 조사해·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어떤 상황이 벌어졌었던 건지 싹 다·”
“회사 직원들을 이용하면 부회장이 알게 될 테고 외부에서 일을 진행하면 이야기가 새어 나갈 수도 있습니다·”
“안 새어 나가게 해야지·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아· 은밀하고 철저하게 파악해· 그리고 나 이외에는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되네· 알지?”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럼 부탁해·”
“알겠습니다·”
이경호 회장은 그대로 눈을 감았고 김 부장은 회장실을 나갔다·
말년에 이게 무슨 꼴인지··· 자식이 손자에게 날을 세우고 있는 광경을 볼 줄이야·
너무 오래 살았다·
*
“저녁 9시에 백화점이 문을 열어요?”
“가끔 그래요·”
“신기하네·”
“VIP들 대상으로만 행사를 여는 거라서 그렇거든요·”
연희가 그랜드 백화점 본점 1층에 차를 가져가자 익숙하게 발렛 요원이 차 키를 받아 든다·
얼떨떨해하는 영훈의 팔짱을 낀 그녀가 문이 닫힌 백화점으로 걸어가자 안에서 직원이 나와 연희가 내민 초청장을 확인하곤 문을 열어주었다·
매장 2층의 조금 넓은 공간에는 레드카펫이 쭉 깔려있었고 한쪽에는 호텔 연회장에서 볼 수 있는 갖가지 핑거푸드들이 아름답게 전시되어 있었다·
“어머 연희야!”
“왔어?”
“여기는 누구야?”
대한민국에 돈 많은 사람들이 이리도 많은지 척 봐도 수십 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한 손에는 와인 그리고 한 손에는 음식을 들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 몇몇은 연희를 보고 아는척을 하며 다가왔다·
“응 여기는 내 남자친구· 인사해· 그리고 여기는 내 친구들이에요·”
“안녕하세요· 최영훈입니다·”
“아··· 그렇구나···· 반가워요·”
“남자친구랑 오는지 몰랐네· 나도 이럴 줄 알았으면 남편이라도 데리고 올 걸·”
“야 네 남편이 잘도 온다고 하겠다·”
“시끄러·”
그녀들은 그렇게 수다를 떨면서도 영훈의 위아래를 훑어본다고 정신 없었다·
확실히 그녀들의 눈빛에는 친구라고 할 수 없는 느낌이 담겨 있었다·
실망감과 더불어 즐거움과 통쾌함 따위의 감정·
한 마디로 표현하면 비웃음이었다·
하지만 연희는 그걸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아했다·
“쇼핑 잘하고 가· 난 남자친구랑 놀고 갈 테니까·”
그녀는 손을 흔들며 영훈을 데리고 음식이 놓인 장소로 걸어갔다·
그리곤 영훈의 눈치를 슬쩍 보면서 말했다·
“아까 걔들은 친구도 아니에요· 어떻게든 나 깔아뭉개려고 이를 가는 애들이거든요·”
“난 괜찮아요· 괜히 당신이 성내고 싸울까 봐 걱정이지·”
“흥 싸우는 것도 격이 맞아야 싸우는 거예요· 귀찮게 짖어대는 걸 뭐하러 다 상대해줘요? 어? 저기 있네요·”
연희가 턱짓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송은진 실장이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도 곧바로 연희를 발견하고는 대화하던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다가왔다·
“왔어?”
“네· 준비하느라 고생하셨겠어요?”
“고생했는지는 이따가 쇼 보면서 판단해· 여기는 그때 같이 왔었던 그 직원?”
“네· 그리고 지금은 내 남자친구예요·”
“남친? 이번에 상무로 진급했다는 그 남친?”
“알고 있었어요?”
“우리 백화점에 입점했는데 그 정도 정보는 듣고 있어야지· 반가워요 다시 인사해요· 나 송은진이에요·”
“최영훈입니다·”
“확실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그때보다 더 멋있어 보이네요· 아 마침 시작하니까 잘 구경하세요· 넌 갈 때 양손 무겁게 가길 바랄게·”
“봐서요·”
뭐가 시작하나 했더니 레드카펫을 따라 모델들이 한 명씩 지나가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패션쇼장을 차린 건데 가까이서 보니 뭐 이런 행사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군가 영훈의 팔을 툭툭 두들겼다·
누군가 해서 뒤로 돌아보니 인도 대사관에서 봤던 정문숙이 환하게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 간판을 바꾸다(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