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선이 끝나고···(3) >
영훈이 잡은 가게는 강남의 한 불고기 전문점이었다·
누굴 대접기 위한 장소라서 정한 게 아니라 그냥 영훈이 먹고 싶어서 정한 곳이었는데 그렇다고 누추한 곳은 절대 아니었다·
상당히 비싼 곳이었으니까·
영훈이 룸을 잡고 미리 주문을 한 후 기다리기를 10분 정도 됐을 때 장년의 남자가 들어섰다·
조금 마른 체형에 강퍅한 인상의 남자는 쉽게 친해지기 힘들 것처럼 생겼다·
이런 사람이 상사로 있으면 아무 말 없어도 부하직원들은 괜히 눈치 보게 되는 얼굴이라고 할까?
“안녕하세요· 현진물산 최영훈입니다·”
“반갑소· 나 강일후요·”
둘은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강일후 사장은 잠시 영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소문은 많이 들었어요·”
“소문이요?”
“당신이 무진중공업 물 먹이고 우리 회사 인수하려고 작전 짰다면서요?”
“하하 누가 그럽니까?”
“산업은행장이 그러던데요?”
영훈은 변명을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필 들어도 산업은행장에게 들었다니····
“아··· 말씀 편히 하십시오· 입사한지 얼마 안 되는 햇병아리 아닙니까?”
“그것도 들었는데 참··· 대단하긴 해요·”
“편히 하시라니까요·”
“뭐··· 그러지· 하하 송은채 사장 따님과 결혼한다면서? 이러니 내가 말이 쉽게 놓아지지가 않는 걸?”
“상관치 마세요· 전 제 능력 외의 신분 때문에 대우받는 거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호오··· 그거 쉽게 할 수 없는 말인데· 그만큼 본인 능력에 자신이 없다면 섣불리 꺼낼 수 없는 이야기거든· 어쨌든 다시 돌아가서··· 그게 사실이었나?”
“산업은행장이 한 말 말입니까?”
“그래·”
영훈은 씁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과장이 있었을 겁니다· 그저 제가 현진물산 대표로 협상했을 뿐이지 모든 그림은 저희 부사장님과 본부장님이 그린 거라서요·”
“우리 같은 식구 될 거 아닌가? 너무 숨기지 말자고·”
“굳이 숨길 이유가 있습니까?”
가족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이지 아직 가족이 된 건 아니었다·
그래서 말조심에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현진물산이··· 아 오늘 HS물산으로 사명을 변경했지?”
“맞습니다·”
“그래 원래 이름을 바꾸면 자꾸 불러줘야 재수가 좋다지? HS물산이 우릴 인수한다고 했을 때 난 찌라시인 줄 알았어· 그것도 되도 않는 찌라시 있잖아? 연예인 이야기나 쓰던 연예부 기자가 뭘 알지도 못하면서 소문 하나 듣고 써갈긴 그런 수준이라고 생각했거든· 이유가 없잖아? 왜? 어째서 HS물산이 우리를
탐내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더란 말이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어보면 답해줄 건가? 아 장기적으로 조선업이 살아날 것 같다는 말이라면 난 믿지 않을 걸세· 그런 믿음으로 던지기엔 3조는 너무 큰 금액이거든· 게다가 HS그룹처럼 현금이 많지 않은 곳이라면 더더욱·”
“하하 제 마음을 읽으신 것 같습니다· 딱 그 대답을 하려고 했거든요·”
“그럼 이제 마음이 바뀌었나?”
“아니요· 그 대답이 맞습니다·”
“이러면 재미없는데····”
이때 마침 점원이 들어와 불고기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판에 불고기를 올리고 불을 올린 후 술을 내오자 영훈이 먼저 술병을 들었다·
“일단 한잔 받으시죠·”
“미안하지만 술은 됐네· 식사를 끝내고 바로 거제로 내려갈 예정이거든·”
영훈은 술병을 내려놓고 말했다·
어째 단호한 표정을 보아하니 오늘 그저 인사나 하자고 만나자고 한 건 아닌 듯했다·
“이유가 중요합니까?”
“그래 중요하네· 그것도 아주· 십 년이 넘었네· 잘 나가던 회사가 고통의 시간 속을 헤매기 시작한 지 십 년이 지났어· 그런데 현진중공업을 멀쩡히 잘 가지고 있던 회사가 갑자기 계열 분리를 하더니 또 다른 조선업을 하겠다고 덤비고 있어· 차라리 현진중공업이 사겠다고 했으면 이해라도 하지 상사가 왜 우리
를 사려고 하냔 말이야·”
“그래서 뭐가 걱정이 되는 겁니까?”
“다! 모든 게 다 걱정이 돼· 오늘 기사 봤나? 카타르페트롤리엄에서 가스전 확장 사업을 연기했어· 이건 시작이 될지도 몰라· 아직 수주잔량은 남아 있지만 언제 수주가 끊겨서 다시 굶주림이 시작될지 모른다고· 그런데 자네들은 거기에 군산조선소까지 끼얹었어· 생각해봤나? 군산조선소에 인력을 몇 명이나 충
당해야 할지 생각해봤냐고·”
“최소 2천 명 이상은 되어야 합니다·”
“허··· 완전히 미쳤군· 2천 명? 그 인원들 월급 제대로 나가려면 군산 조선소 도크가 계속 돌아가야 해· 거제에서 일감 빼서 군산에 박으면 최대 1년이야· 1년이 지나면 거제랑 군산 도크가 놀게 된다고·”
“그럼 그 전에 일감 열심히 받아오면 되겠군요·”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 아니지?”
영훈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해합니다· 오랜 기간 어려움을 겪으셨으니 많이 걱정되시겠죠· 그런데 저한테 이렇게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해서 많은 일감을 따오는 것· 그게 회사원의 업무 아닙니까?”
“난 자네들을 믿을 수 없어·”
“그래서요?”
“믿음을 주지 못하면 우린 이 인수를 받아들일 수 없어· 힘이 없는 우리가 무조건 인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할 테지·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골치 아프게 만들 수는 있어·”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왔다·
“원하는 게 뭡니까?”
“믿음을 주게·”
“어떻게 드리면 될까요?”
“일본 미쓰이 상선이 얼마 전에 LNG추진 페리 2척을 미쓰비시중공업에 발주했다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본 조선회사들은 LNG 기술이 국내보다 많이 떨어지는 게 현실이야· 그러다 보니 크기가 작은 선박을 발주하면서 기술을 키워가려는 상황이지· 하지만 발주를 낸 미쓰이 상선이라고 상황을 느긋하게
지켜볼 수만은 없는 입장이야· 전 세계적으로 LNG운임 가격이 조금씩 상승하고 있는 추세거든· 배를 발주하고 받고 난 다음에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면 이미 경쟁에서 뒤처진 상태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요?”
“미쓰이 상선을 구슬려봐· 지금 돈을 쥐고 쓰지 못해 안달하고 있을 게 분명해· 아마 정치적인 문제까지 엮여있을 수도 있지만 이미 다른 해운사인 니센 카이운이 무진중공업에 LNG선을 3척 발주한 상황이야· 이대로 가다간 LNG 운송 시장을 잃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을걸?”
“해주조선해양 직원들은요?”
“부끄럽지만 우리는 잘 안 됐네· 흔들리지 않았어· 그러니 우리한테 믿음을 주게· HS물산의 식구가 된 후에도 회사에서 잘리지 않고 오래 일할 수 있다는 믿음· 직원들은 그게 필요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받아들였다고 믿겠네·”
영훈은 단호한 강일후 사장의 표정을 보고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
요 며칠 형준은 곤충이 된 것처럼 더듬이를 바짝 세우고 다녔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와 대화하고 난 뒤 아무것도 아닌 오해였다고 결론을 내려주고 나서 일이 마무리된 것이 아니라 2차전이 시작되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집에 안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말 한마디를 할 때도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고 가족과 같이 식사할 때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평소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집에서는 철저하게 연기에 몰입한 형준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아이고 여기까지 다 오고··· 갑지기 웬일이야?”
“잘 지내셨죠?”
형준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색하게 웃으며 맞은편에 앉는 사람은 신영투자증권 장근형 사장·
신영은행에서부터 일을 시작한 그는 근속연수가 20년을 넘는 신영인이었다·
“투자회사 사장이 요즘 같은 시기에 잘 지낼 수가 있나·”
“하긴 요즘 시장이 안 좋죠?”
“대외적인 요인들 때문에 예측하기도 쉽지가 않아· 편드 실적이라도 괜찮으면 모르겠는데 국내 펀드는 물론이고 해외 펀드도 미국 주식이 주가 아니면 실적이 영 별로니····”
“호텔은 어때요?”
“네가 있을 때 매입했던 호텔들은 상황이 괜찮아· 좋은 투자가 확실했어· 경기도 안 타고 매출 흐름도 견조해· 이 기조를 이어서 우리도 계속 해외 호텔들을 주시하고 있어· 좋은 투자였어·”
“하하 이거 다행이에요· 제가 손댄 게 영 별로였으면 얼굴 들고 여기 오기도 쉽지 않을 거 아닙니까·”
“회장님 손자인 네가 설마 얼굴 못 들고 다니겠어? 그런데 여기는 갑자기 무슨 일로 왔어? 술 마시자는 거 아니면 누구 만나러 가지도 않잖아?”
형준은 씁쓸하게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룸싸롱에서 불러놓고 조용히 이야기했을 텐데 문제는 이 사람이 그런 곳은 절대 가지 않는 사람이라는데 있었다·
이 바닥에서 그러기 쉽지 않은데 장근형 사장은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회식도 저녁만 먹고 바로 일어서는 사람이었다·
“소문 못 들으셨나 봐요· 이형준 사람 바뀌었다는 말 못 들으셨습니까?”
“듣기는 했지· 난 솔직히 이 상무 술 마시고 다니는 거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술 마시고 능력이 부족하면 문제인데 요새 아주 슈퍼맨이던데? 그렇게 일 잘하면 젊은 남자가 좀 노는 게 뭐가 문제겠어·”
“이야··· 우리 장 사장님 많이 바뀌셨네· 예전에는 그렇게 구박하셔놓고?”
“그때는 이 상무가 영 믿음이 안 가서 그랬지· 호텔 건 결과 좋고 요즘 일 시원시원하게 하니 내 평가가 달라진 거 아니겠어?”
“그 평가에서 조금 더 올려주세요· 요즘은 어지간해서는 룸싸롱도 잘 안 갑니다·”
“오··· 이유가 있을 때만 간다?”
“그런 셈이죠·”
“소문이 실제라니 그것보다 좋을 게 있나· 그럼 오늘 방문도 당연히 이유가 있을 테고?”
“맞습니다·”
“말해봐· 뭐 도와달라는 거야?”
“그것도 맞습니다· 저 좀 도와주십쇼·”
장근형 사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많이 도와주고 있지 않아? 현진관광 인수전에도 많이 도와줬었고 말이야· 그런데 뭘 또 도와줘? 어디 또 잡아먹고 싶은 데가 있어?”
“그건 아닙니다· 현진투증 자산을 움직여달라는 게 아니라 사장님께 부탁드리고 싶어서 왔거든요·”
“나? 내가 도와줄 일이 있나?”
“네· 사장님의 도움이 절실하거든요·”
“내가 뭐라고?”
“사장님은 신영금융지주 이사시지 않습니까·”
순간 장근형 사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긴 하지· 나도 까먹고 있었는데····”
본래 신영은행 부행장이 상무이사직을 겸하고 있다가 퇴사하고 난 뒤 장근형 사장이 그 뒤를 이어 상무이사직을 맡고 있었다·
장근형 사장이야 어차피 회장의 거수기 노릇을 한다고 생각했기에 상무이사직을 맡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지금 회장의 손자가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어떻게 그걸 까먹습니까?”
“나도 이제나저제나 하고 있잖아· 월급쟁이들이 다 그렇지· 뭐 연봉이 조금 높아진 건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었어· 덕분에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거든·”
“아직 정정하십니다· 오래 일하셔야죠·”
“하하하 오래 일하고 싶은데 말이야· 지금 누가 내 회사생활을 위협하는 말을 하고 있지 않겠어?”
“설마 그게 저는 아니겠죠?”
“왜 아니겠나? 그러니까 못 들은 걸로 할 테니 이만 가 봐·”
장근형 사장이 아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형준이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새 새로 사귄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는 도를 닦은 건지 어지간해서는 흥분을 하지 않아요· 아무리 천지개벽할 일이 생겨도 말이에요·”
“어?”
“그래서 저도 이제 그 친구 따라서 흥분하지 않고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해볼까 합니다· 사장님께서는 저를 보내고 아버지께 전화하시겠죠? 아니라고 말하지는 마세요· 믿지 않으니까·”
“더 해봐·”
“그럼 전 할아버지께 중동 자원개발 투자 때 손실 났던 1조 5천억 중에 일부 금액이 룩셈부르크에 있는 지방 은행에 들어간 정황을 말씀드릴 겁니다·”
장근형 사장의 눈빛이 떨리기 시작했다·
“너··· 어떻게····”
“전 아버지에게 호되게 혼이 나겠죠· 아주 곤란한 상황일 텐데 뭐··· 그럭저럭 넘어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은 어떻게 될까요? 다른 곳도 아니고 조세피난처에 5백만 달러 규모면··· 아버지도 커버쳐주지 못할걸요? 아마 저보다 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룩셈부르크 은행에 들어간 돈 못 본 척 해드리겠습니다· 그걸로 노후에 해외에 저택 하나 사놓으시고 편안히 여생 보내세요· 대신 나중에 아버지와 저 이렇게 둘 중에 한편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제 편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회장님께서 그 상황을 두고 보실까?”
“어쩌면··· 어쩌면 그냥 두고 보실지도 모릅니다· 원래 세상일이라는 게 웃기는 짬뽕 아닙니까? 하하하!”
< 총선이 끝나고···(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