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선이 끝나고···(4) >
다음날 영훈이 회사로 출근해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고승현 상무였다·
고 상무는 오랜만에 찾아온 영훈을 보고 화색을 띠며 반겼다·
“요즘 너무 바쁜 거 아니야? 어떻게 회의나 공식 행사가 아니면 코빼기도 안 비춰?”
“사실 한가한데 너무 뻔질나게 드나들면 사람들이 욕할까봐 자제했습니다· 요즘 별일 없으세요?”
“나야 하루하루가 즐겁지· 승진했겠다 내 일만 잘하면 누가 터치할 일 없겠다 해외자원사업부 윤정환 상무님이 계속 눈치주는 것만 아니면 해피해·”
“아 그렇겠네요· 만날 때마다 눈치 보시겠습니다·”
“당연하지· 한참 어려서 아직 밑에 있어야 할 놈이 같은 상무를 단 것도 화날 일인데 지금 분위기가 해외자원사업부보다 특수사업부가 회사 내에서 더 핵심 부서로 인정받는 분위기잖아· 한순간에 찬물 뒤집어 쓴 기분이 들거야· 이해해줘야지·”
“그렇군요· 참 인사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원래 사람관리가 제일 어려운 거 아니겠어? 아가씨랑은 어때? 결혼 날짜 잡았어?”
“사장님께서 알아보고 계신답니다·”
“빨리해야 할걸? 회장님 아직도 안 깨어나셨잖아· 저러다 돌아가시면 그해 결혼 어려워· 게다가 전 사장님도 병원에 누워 계시고··· 최대한 빨리 해야 할건데?”
“그래서 저도 어떻게 프로포즈를 해야 할까 고민중입니다·”
“그래 잘 준비해· 그건 그렇고 갑자기 말도 없이 찾아온 이유가 있어? 그냥 놀러온 건 아니지·”
“네· 상의 좀 드릴 게 있어서요·”
“뭔데?”
“아까 해주조선해양 강일후 사장을 만나고 왔어요·”
고승현 상무가 씨익 웃는다·
“강일후 사장? 왜? 좀 잘 봐달래? 그래도 소문을 빠른가봐?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제대로 아는 걸 보면? 특별할 거 없어· 원래 인수당하는 회사 임직원들은 인수 전이 가장 피 마르거든· 적당히 잘 달래면 되기는 하는데 그게 또 사람 마음처럼···”
영훈은 길어지려는 고 상무의 말을 끊었다·
“그게··· 잘 봐달라고 만난 게 아니었어요·”
“응? 그게 아니야? 그럼 뭐 때문에 보자고 한 건데?”
“우리 회사가 자기네 회사를 인수하는 게 영 불안한 모양이에요·”
“그건 그렇겠지· 그래서?”
“역량을 보여 달랍니다· 인수해서 잘 운영할 수 있는 역량·”
“그걸 왜 보여줘야 하는데?”
“그래야 안심할 수 있다구요·”
“우리가 안심을 시켜줘야 할 이유가 있어?”
“따지고 보면 없는데 무시하자니 좀 그렇습니다·”
“그냥 무시해버려· 정 뭐하면 잘라버린다고 해·”
“네· 그렇지 않아도 자기 목 자르는 건 상관 없다고 하더라구요·”
그제야 고 상무의 장난스러운 얼굴이 진지해졌다·
“자르라고 했다고?”
“네· 자기는 해주조선해양에 한평생을 바쳐왔다고 합니다· 동기들 잘려나갈 때 도와주지 못한 게 지금까지 마음에 걸린다네요· 제대로 경영 못하고 또 수많은 사람 자르게 할거면 그냥 인수할 때 자기를 자르라는 식으로 나오던데요?”
“하핫! 그 양반 강단 있네?”
“군산조선소까지 가져온 마당에 그걸 움직일 만한 수완을 보이라고 합니다·”
“그렇게하지 못하면? 노조라도 움직이겠대?”
“아니요· 언론을 움직일 것 같아요· 경영 능력도 없는 재벌이 마구잡이로 사업을 확장하다가 또 대규모 실업을 유도할 거라는 식으로 할 것 같은데··· 솔직히 무시해도 될 만한 일이긴 하지만 굳이 무시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싶기는 해요·”
“우리를 무진중공업이랑 똑같은 놈으로 만들겠다··· 일리는 있네· 그래서 뭘 해주면 감동하면서 우리를 받아주겠대? 발주라도 따 오래?”
“네·”
“허··· 말도 안 된다고 하자니 물건 팔아먹고 사는 상사인으로서 차마 그 이야기는 안 나오고··· 어디서 받아오래?”
“일본 미쓰이 상선이 LNG선을 발주하고 싶어하는 눈치인데 정치적인 문제인지 쉽사리 결정을 못내리고 있다고 해요·”
“미쓰이 상선?”
“네· LNG추진 페리 2척을 미쓰비시중공업에 발주하면서 미쓰비시중공업의 기술력을 끌어올려주려는 상황인데 마음을 바꿔서 우리쪽에 발주를 내도록 해줬으면 하더군요·”
“얼마나?”
“몇 척을 수주해달라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진짜 딱 능력만 보여달라 그 이야기네?”
“만약 가능하기만 하다면 강 사장은 물론이고 해주조선해양 직원들에게도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는 하겠지· 하지만 쉽지는 않을걸? 미쓰이 상선이면 우리도 잘 알지· 우리랑 거래도 꽤 했던 곳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선택지를 잘 골랐다고 할 수 있기는 한데··· 난 반대야·”
“그런가요?”
“아마 사장님도 반대할걸?”
“이유가 뭡니까?”
“건방지잖아·”
“그게 단가요?”
“최 상무는 이게 별거 아닌 것 같겠지만 의외로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해· 그렇게 걱정되고 우리의 능력이 궁금했으면 그런식의 협박 비스무레한 걸 할 게 아니라 부탁을 했어야지· 그래도 들어줄까 말까인데 감히 누굴 시험해? 아마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리 엎고 나왔을걸?”
“흐음··· 그렇군요·”
“그럼 최 상무는 어떡할건데?”
“굳이 반대하는 일을 할 필요는 없죠·”
“포기하게?”
“네·”
“쓰읍··· 이러면 재미 없는데···”
“왜요? 내가 억지로 밀어붙일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럴 줄 알았지· 최 상무 나이 때는 한번 결정한 일을 타인의 의견으로 되돌리는 게 쉽지 않으니까· 난 당연히 나서서 한번 해보고 안 되면 말겠다는 식으로 나올 줄 알았어·”
“사장님도 반대할 거라는데 굳이 나설 이유가 없잖아요·”
영훈이 어깨를 으쓱이자 고승현 상무가 입맛을 다셨다·
“쩝··· 왠지 내가 지는 기분인데·”
“이게 뭐라고 이기고 지는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러지 말고 그럼 이렇게 하자고·”
“네?”
“건방지긴 하지만 우리한테도 손해는 아니야· 지금 우리 회사 주가가 계속 하락세인 건 알지? 부채비율은 높아지고 주주들은 해주조선해양 인수가 부담이 될 거라고 말하고 있어· 현진관광 인수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 이 와중에 추가 수주를 받아오면 주가에도 도움이 될 거야·”
“그렇군요·”
“강원도 삼척과 서울을 오가는 호노다 세쿠라는 미쓰이 상선 한국지부장이 있어·”
“삼척이요?”
“국내 LNG가스 수입은 주로 삼척 호산항을 통해 이루어지거든· 호산항에 한국가스공사 생산기지가 있기도 하고· 그래서 서울과 삼척을 오가는데 나와 몇 번 만나기도 했어· 급하게 추가로 미국 셰일가스를 들여와야 했을 때 이용했거든· 일단 그 사람을 만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자고· 아 그 전에
해주조선해양 선박 기술자 하나 보내 달라고 해· 난 기름 파는 재주는 있어도 기름을 담고 다니는 배에 대한 지식은 젬병이니까·”
“하하 알겠습니다·”
“약속 잡으면 연락 줄게·”
영훈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상무님께 의논드리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찝찝해· 울며 겨자 먹는 기분이야·”
“해주조선해양은 이제 거의 우리 회사 아닙니까? 우리 회사 일감 받아오는 일이라고 생각하시죠·”
“그래서 억지로 참고 넘어가주는 거야·”
“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어차피 최 상무가 할 일 아니야?”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전 가스 싣는 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상무님이 도와주셔야죠·”
“흥 현진관광 인수할 때는 호텔에 대해 잘 알면서 했어?”
“뭐 그렇게 생각하니 별거 아닌 것 같기는 하네요·”
“우리 딱 세 척을 목표로 하자· 그러면 한 7천억 되려나?”
“와··· 어마어마 한데요?”
“그 정도는 돼야 프로포즈 선물로 제격이지· 아 참 프로포즈 선물은 정했어? 아가씨가 눈이 엄청 높을 건데?”
“네 브랜드랑 모델명 손가락 사이즈까지 적어주셨습니다·”
“하하하! 고민할 필요 없어서 좋겠네·”
“그러게 말이에요·”
그렇게 특수사업부에서 나온 영훈이 기조실로 올라왔을 때 연희가 다가와 말했다·
“무슨 일 있어요? 민희 씨가 그러는데 특수사업부에 내려갔었다면서요?”
“네· 어제 해주조선해양 강일후 사장 만났었잖아요?”
“아 맞다· 어젯밤에 별다른 이야기가 없어서 그냥 인사나 하고 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전화통을 붙잡고 1시간 내내 예식장 컨셉과 신혼여행지에 대해 떠들어대니 말할 타이밍을 못 잡았었다·
“네· 조금 웃긴 상황이었거든요·”
“웃겨요? 어떻게요?”
“글쎄 우리더러 배를 수주해오라는 말을 하더라구요·”
“배를요? 그네들도 영업조직 있잖아요?”
“군산조선소까지 떠안겼으니 그걸 돌릴 만한 영업력을 보여줘야 자기네들도 안심하고 인수를 받아들이겠다는 거예요·”
“어머 안 받아들이면 어쩌겠다고? 신경 쓰지 말아요·”
“고승현 상무님하고 같은 말을 하네요·”
“상무님도 그러죠?”
“네 그래서 신경 안 쓰겠다고 하니 상무님이 기분 나쁜 건 나쁜 거고 수주를 받아오면 그건 나쁜 게 아니니 해보자고 하시더라구요·”
“그건 그렇지만···”
연희는 입을 툭 내밀며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낸다·
“다행스러운 건 친절하게도 일단 배가 필요할 만한 회사를 콕 찍어주기는 했어요· 일본 미쓰이 상선이라고 상당히 큰 해운업체라고 하더라구요·”
“나도 들어봤어요·”
“그래서 상무님이 미쓰이 상선 관계자와 미팅을 잡아보겠다고 하셨어요· 나도 참석할 거고·”
“얼마 짜리 계약이 될 것 같아요?”
“나도 잘 모르지만 한 척에 2천억이 넘는다고 하니 한 척만 수주해도 적은 계약은 아닐 텐데 고 상무님은 세 척을 목표로 잡겠다고 하던데요?”
“세 척이요? 그럼 약 7천억 규모? 와··· 쎄긴 하네· 그럼 이렇게 해주면 우리를 인정하겠대요?”
“몇 척을 해달라는 말은 없었으니 한 척만 해도 인정하겠다는 것 같아요·”
“애사심이 투철한 사람인가봐요? 그러다 짤리면 어쩌려고 그러지?”
“나중에 가서는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나왔어요·”
“허··· 회사에 오래 있었대요?”
“해주조선해양이 첫 입사였나 봐요· 그래서 회사에 애정이 아주 많다는 걸 엄청나게 피력하더라구요·”
연희는 영훈의 어조가 조금 이상하다는 걸 파악했다·
“피력했다? 그럼 아니라는 거예요?”
“그는 물의 사주를 타고났는데 재성이 과해서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조직이나 사람에게 큰 정을 주지 않아요· 자신의 이익을 최고로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니 회사에 충성심이 높아서 한 직장에 오래 다닌 게 아니라 그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하지 않은 겁니
다·”
연희는 이제 사주 이야기만 나오면 눈을 빛냈다·
아예 영훈의 옆에 의자를 끌고와 앉아서 물었다·
“그리고요?”
“대개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부족하면 자기만의 생각이 확고해서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데 이 사람은 금전적인 유혹이 있을 때는 쉽게 흔들릴 겁니다· 그렇기에 때로는 탐욕을 부리다가 또는 주변 사람을 너무 믿다가 큰 곤란을 겪기도 해요· 그리고 양인이 공망이라 태생적으로 거짓말을 잘합니다· 아마 그는 스
스로도 자신이 거짓말을 잘한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거짓말로 주변 사람들에게 미움을 잘 사지 않기도 해요·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까요?”
“그럼 회사를 위한다는 말은···?”
“거짓말이죠·”
“그럼 도대체 왜 그런 거예요?”
“말했잖아요· 그는 귀가 얇고 탐욕을 부리는 성향이 있다고· 누가 그 자를 옆에서 흔든 겁니다·”
“누가요?”
영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빙그레 웃었다·
“저도 그게 궁금해요· 누가 그런 건지·”
“그럼 그 자가 원하는 대로 배를 수주해 올 거예요?”
“바라는 게 미쓰이 상사에서 배를 수주해 달라는 거였으니 일단 원하는 대로 움직여봐야 그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만약 문제가 드러나면···?”
“잘라야죠· 잘 됐지 않아요? 저런 사주를 가진 사람이 아무 문제 없다는 이유로 저 자리에 계속 앉아 있으면 불안해서 어떻게 두고 보겠어요? 해주조선해양에서 20년을 넘게 근무한 사람이면 쫓아낼 명분도 많지 않은데·”
“가만 보면 당신도 참 대단해요· 그럼 앉은 자리에서 그가 거짓말 하고 있는 걸 알았을 텐데 어떻게 티를 안 내고 있었어요?”
“그가 20년 넘게 한 직장에서 근무한 만큼 저도 20년 넘게 절에서 수행했거든요·”
< 총선이 끝나고···(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