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림수(2) >
문제를 건다면 자동차 운반선이 부담이지 LNG선은 그렇게 부담가는 부분이 아니긴 했다·
말 그대로 회사가 망할 정도로 휘청이지 않고서야 대금을 결제하지 못할 경우는 없으니까·
게다가 자동차 운반선은 LNG추진 기술이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17만㎥급의 초대형 LNG 수송선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편이었다·
선금을 무려 70%나 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지만 정해진 기간 내에 선박을 건조해 인도할 수 있는 회사는 전 세계에 해주조선해양이 유일했다·
가야 오키노리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
“대승적 차원에서 수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계약을 받아들였다·
대승적 차원이라는 별스런 표현까지 해가면서 자존심을 챙기려 했지만 영훈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해당 내용을 해주조선해양 측에 보냈다·
LNG 추진 자동차 운반선 2척에 선박이 예정대로 인도되면 추가로 2척을 발주하는 2+2계약에 초대형 LNG선 1척까지 총 5척에 관한 계약이었다·
아마 중국 강남해운과의 계약은 단순히 2척이 아닌 2+2 계약이었음이리라·
생각지도 못하게 큰 규모의 계약을 진행하게 된 영훈과 고승현 상무는 곧바로 해주조선해양 관계자를 호출했다·
협의가 끝났으니 제대로 된 계약단계는 해주조선해양이 진행하게 될 터였다·
영훈은 분한 가운데서도 안도의 숨을 내쉬는 가야 오키노리를 보며 궁금해졌다·
과연 선박이 건조될 때까지 니폰유센은 무사할 수 있을까?
시가총액이 5천억도 안 되는 회사가 천억이 넘는 주식을 상환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
항상 모델 같은 포스를 풍기고 다니던 한주연은 웬일인지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에 헐렁한 박스티와 청바지 차림으로 오래된 한옥집 앞에 서 있었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녀는 어느 순간 눈을 끄게 뜨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멀리 개량한복을 입고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기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도사님!”
얼마나 찾아다녔던가?
갑자기 그녀가 냈던 돈을 돌려주며 연화당을 정리하고 모습을 감췄던 명우도사였다·
대한민국에 점쟁이가 한 둘이던가?
조금 용하기는 했지만 그래 봐야 점쟁이일 뿐이었다·
그런데 신빨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그가 훌쩍 떠나버리고 나자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지막으로 그가 남기고 간 말·
‘이무기에 불과했는데 운 좋게 여의주를 물었어· 그래서 용이 돼버린 거야· 김태민은 죽어도 이 여자를 못 이길걸?’
HS물산 회장이 된 송은채 회장에게 각계의 인사들이 얼마나 많은 손길을 보내고 있는지 그리고 그녀의 딸에게 자신의 아들을 들이밀어 보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여의주가 누구인지 이제는 알고 있지만 연희와 결혼을 약속한 그 남자를 뺏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도 주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두 손 놓고 태민의 앞날이 구만리이기를 기도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녀의 야망이 너무 컸으니까·
그녀는 결정해야 했다·
김태민을 믿고 그를 더 키워줘야 할지 아니면 다른 파트너를 찾아야 할지 말이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
명우도사는 주연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퉁명스레 물었다·
영훈을 만나고 난 뒤 그는 점쟁이 생활을 청산했다·
신빨이 떨어졌다는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니었다·
그도 본인 신력의 한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으니까·
단지 욕심 때문에 억지로 붙잡고 있었지만 자신을 향해 벼락같이 호통치던 아들의 모습을 보고 다 정리하고자 마음먹었다·
그 기세에 자신을 돌보아주던 신령님도 끈 떨어진 연처럼 희미해지지 않았던가?
사실 벌어놓은 돈도 많아서 지방 몇 군데에는 땅이나 건물도 사 놓았었다·
자신을 따르던 제자 몇에게 퇴직금 식으로 섭섭하지 않게 쥐여주고 그는 서울의 청계산 인근에 암자도 아닌 그렇다고 좋은 저택도 아닌 한옥 건물을 하나 사들였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한주연이 찾아온 거였다·
“물어물어 찾아왔어요·”
“용하네· 돗자리는 내가 아니라 네가 깔아야겠어·”
그는 그녀를 지나쳐 문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는 잽싸게 그를 따랐다·
“사람 궁금하게 하시고 이렇게 도망치시면 어떻게 해요?”
“본래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궁금한 것 투성이인 게 사람이다·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다고 뭐가 달라질까?”
“제 인생에 무척 중요한 일이에요·”
“지금이야 그렇게 보이겠지·”
“네?”
“학교 다닐 때는 시험 한 번이 인생에 중요한 일처럼 보이고 남자를 만날 때는 저 남자가 최고의 남자처럼 보이며 취업을 할 때는 저 회사에 붙으면 인생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게 사람이다·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이 당장 네 인생을 바꿔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한주연은 아예 평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말했다·
“나비효과라고 있어요· 나비의 날개짓 한번이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태풍으로 변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나비의 날개짓이 태풍으로 변한들 네가 그대로인데 뭐가 바뀔 것 같으냐?”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네가 원하는 것· 더 좋은 남자를 원하는 것이냐? 알려주면? 그 남자가 널 영부인이라도 만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야···”
“넌 타고나기를 인덕과 인망이 부족하고 속이 좁다· 속이 좁으면 배짱이 있고 멀리 볼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것도 부족하다· 좋은 남자도 네 옆에 있으면 좋은 기가 흩어질 게 분명한데 누구를 더 원해?”
한주연은 화가 치밀어 입술을 깨물었다·
명우도사는 그 모습에 들고 있던 나무 지팡이로 그녀가 앉은 평상을 탁 때리며 말을 이었다·
“썩 내려가! 신력이 떨어졌으니 누굴 점지해줄 상황도 아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뻗쳐오른 주연은 명우도사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더니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집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는 걸 지그시 지켜보던 명우도사는 뜨근하게 열기가 오른 방으로 들어갔다·
한쪽 구석에 굴러다니는 빈 막걸리 병을 흘깃 쳐다본 그는 시장에서 사온 족발이 올려진 상 앞에 털썩 앉았다·
“흐흐··· 점은 옘병···”
그는 실소를 하며 막걸리를 한 사발 가득 부었다·
그때 밖에서 누가 문을 톡톡 두들겼다·
화가 난 한주연이 다시 돌아왔음이 분명했다·
한숨을 푹 쉰 그가 기름진 앞다리살을 한 점 입에 집어넣고 막걸리를 입가심하듯 들이킨 다음 문을 여는데 뜻밖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서 있었다·
“이게 누구야?”
놀랍게도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는 임복희였다·
선글라스를 멋들어지게 쓰고 명품옷을 휘감은 그녀는 잠시 선글라스를 들어올려 집을 둘러보곤 말했다·
“이건 뭐예요? 오빠 이런 거 안 좋아하잖아· 일할 때 빼고는 그렇게 고급스러운 거 좋아하던 양반이 그동안 벌어둔 돈 어디다 쓰고 이게 다 뭐람?”
“뭐하러 왔어?”
“내가 오빠 예뻐서 찾아왔겠어요? 나 들어가도 되지?”
“들어와·”
그녀는 명우도사를 따라 방으로 들어와 한 상 펼쳐진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얼씨구? 신당은 어디 있고? 족발은 또 뭐예요? 여기까지 배달이 되나?”
“신빨도 떨어졌는데 기도는 해서 뭐해? 족발은 요 밑에 시장에서 사왔다·”
“진짜 다 놓은 거야?”
“이제 좀 쉬려고 그런다· 머리가 깨끗해· 아주 좋아·”
“그러다 죽어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뭐 때문에 심통난 사춘기 애들 마냥 이러는 건데?”
“할 말 없으면 족발이나 먹고 가·”
“그러지 말고 나 부탁 하나 들어줘요·”
그녀는 족발 옆에 손바닥 만한 인물 사진을 하나 올려놓고는 말했다·
“전라도에서 적당한 건설업체 하나 운영하는 사람이에요·”
“근데?”
“정치인 하나 엮에서 출세하고 싶나봐· 내가 하나 물어줬는데 대차게 까였다지 뭐예요? 사흘간 신령님께 치성을 올려봤는데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답을 안 주세요· 그래서 적당한 사람이···”
명우도사는 그녀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흥! 또 버릇이 도졌구나?”
“그러지 말아요· 나도 먹고 살아야지·”
“또 주식하다 말아먹었냐?”
임복희는 쌍심지를 치켜 뜨더니 쫑알거렸다·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된 정보였단 말이에요·”
“내가 이 바닥에서 주식하다 망하는 점쟁이를 한두 명 본 게 아니지만 너처럼 끈질기게 계속 망하는 점쟁이는 처음 본다· 그래서 얼마나 날렸는데?”
“3억이요·”
“허··· 많이도 날렸구나·”
“에효··· 우리 신령님은 왜 주식에 관해서는 입도 뻥끗 안 하실까? 알려주면 좀 좋아? 그러니까 한번 도와줘요· 내가 발이 넓기는 해도 오빠 만큼 정치하는 인간들 잘 보지는 못하잖우·”
“난 이제 손 털었다·”
“그럼 뭐하고 살려고?”
“뭐하긴? 이렇게 즐기다 죽는 거지·”
“새장가라도 들게?”
“그것도 좋고~”
명우도사는 만사 다 귀찮다는 듯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그 모습에 임복희는 한쪽 입꼬리를 스윽 올리더니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베트남에서 사업하는 사람을 잘 알고 있거든요· 무슨 사업인고 하니 베트남에서 한국남자랑 현지인이랑 중매를 해주는 사업이라고 하더라구요?”
“근데?”
“아무리 돈이 많으면 뭐해? 요새 젊은애들이 오빠같이 할아버지랑 만나주기나 할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말만 잘해주면 그 인간한테 최고 좋은 신부감을 추천해달라고 할 수 있는데··· 돈만 많으면 나이 이십대 초반에서 중반도 만날 수 있다던가?”
“큼··· 그건 네 도움 없이도 내가 하려면 할 수 있어·”
“그렇기야 하겠지· 돈은 돈대로 받아놓고 막상 현지 가서 마음에도 안 차는 여자들 소개받다가 올 수도 있는 거 아니우?”
“너는 다르다고?”
“기왕지사 아는 사람 통해서 하면 얼마나 믿음직해? 응? 얼른 점지 좀 해줘봐요·”
마음이 동했는지 명우도사가 슬그머니 다시 몸을 일으킨다·
“여당? 야당?”
“그게 뭐가 중요해?”
명우도사는 사진 속 남자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중요할 것 같은데?”
“어째서?”
“얼굴만 봐도 살이 가득해· 그냥저냥 권력자에 빌붙어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받아먹고 살 사람이 아니야·”
임복희는 목이 마른지 명우도사의 막걸리를 한 사발 쭉 들이키더니 말했다·
“아이고 좋네· 내가 이래서 오빠 찾으러 온 거잖수· 기가 막히게 본다니까?”
“그래서 여당이야? 야당이야?”
“이 인간을 대차게 깐 인간이 여당이에요·”
“그럼 야당쪽 정치인이 맞겠네· 한번 원한을 가지면 쉽게 잊지 않는 놈이야·”
“야당 누구?”
명우도사는 입을 삐죽 내밀고 한참 사진을 보더니 말했다·
“주우진이·”
“지역구가 평택인 그 주우진? 이제 고작 2선인 주우진?”
“그래· 잘 맞겠어·”
“오빠가 주우진을 어떻게 알아?”
“뭘 어떻게 알아? 뉴스 봤으니까 알지·”
“진짜 잘 맞을까?”
“믿기 싫으면 믿지 말든가·”
“못 믿는 건 아니고···”
“그건 됐고 너도 이제 적당히 해 먹어· 그러다 탈 난다· 어째 수십 년이 흘러도 수법이 변하지를 않아?”
“대한민국에서 땅만큼 확실한게 있는 줄 알아요?”
“그런데 왜 계속 주식에 손을 대? 땅으로 재미 봤으면 계속 땅만 파면 될 게 아니야?”
임복희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나도 몰라· 그냥 빨간불만 보면 가슴이 벌렁벌렁 뛰는데 어떻게 해요? 안 하고 배겨?”
“병이다 병·”
“나도 이제 오빠처럼 건물이나 살까봐· 어쨌든 고마워요· 내가 그 사람한테 오빠 연락처 줄게· 그런데 집 좀 바꿔야겠다· 이래서 젊은 여자가 살려고 하겠어?”
“이 집도 싼 건 아니야·”
“후줄근해· 베트남 가기 전에 요 앞 아파트 하나 사서 사진이나 찍어놔요· 그래야 먹혀· 그 얼굴에 이런 집이면 아무리 내 추천이라도 쉽지 않아요·”
“잔소리는···”
그녀가 떠나고 명우도사는 빈 잔에 막걸리를 따르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술이 좀 깬 다음에 아파트를 알아보러 다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노림수(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