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림수(3) >
영훈 일행이 대한민국 땅을 밟음과 동시에 나온 기사·
이후 후속기사들이 연이어 나왔고 무려 8천억 규모의 대형 계약이 공개됐다·
LNG 추진 자동차 운반선의 2+2 계약과 추가 초대형 LNG선 계약은 바짝 말라가던 해주조선해양 관계자들에게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그래서인지 해주조선해양 본사 로비를 통과하는 고승현 상무의 어깨는 한껏 올라가 있었고 발걸음은 경쾌하기 그지 없었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강일후 전 사장이 떠나고 새로 사장직에 오른 송유철 사장은 영훈도 오늘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반쯤 벗겨진 머리를 한쪽으로 곱게 빗어넘긴 단정한 헤어스타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그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일행을 반겼다·
“반갑습니다· 기획조정실 최영훈입니다·”
“특수사업부 고승현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앉으시죠·”
그는 자리를 가리키며 차를 내오도록 했다·
영훈과 고 상무가 자리에 앉자 그는 의자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거 참··· 생각지도 못하게 사장 자리에 앉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최영훈 상무님이 미쓰이 상선과 강일후 전 사장의 거래를 캐내셨다는 말을 듣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그랬나요?”
“강 전 사장님이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아 먼저 차부터 드시죠·”
그때 비서가 차를 내왔다·
영훈이 따뜻한 홍차를 한 모금 머금을 때 송유철 사장이 말을 이었다·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임직원들이 당황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그 만큼 해주조선해양의 미래에 대해서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겠죠·”
얼마나 앞날이 안 보였으면 자리를 걸고 백마진을 받으려고 했을까·
“그런데 솔직히 강일후 사장이 미쓰이 상선과의 뒷거래 때문에 사퇴한 것보다 어제 니폰유센과의 협상이 더 놀라웠습니다· 갑자기 UACC에서 자동차 운반선 2척을 따온 건 어떤 정보가 있었던 겁니까?”
“아닙니다· 송 사장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해주조선해양이 지금 아주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우리도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군산조선소에 일감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일본으로 날아간 거였는데 마침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를 반기더군요· 그리고 우리가 꺼내지도
않은 자동차 운반선을 요구했습니다·”
“하하 그런 우연이 있을까요?”
“사실 우리가 먼저 일본에 가기는 했지만 시기의 문제였을 뿐 그들은 언제고 해주조선해양에 자동차 운반선을 발주했을 겁니다· 저희가 알아본 바로 UACC가 중국 강남해운에 발주했던 자동차 운반선에 기술적 결함으로 건조에 문제가 생겼다는 정보를 입수했거든요·”
송유철 사장은 입을 떡 벌렸다·
“그 정보는 도대체 어떻게 입수한 겁니까?”
“죄송합니다·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 어쨌든 우리는 그 정보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었죠·”
“어쩐지 선수금 70%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인데 왜 그런 조건을 그들이 받아들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습니다· 대단하군요· 그럼 LNG선에 주식교환 옵션을 넣은 건 어떤 이유인가요?”
영훈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그냥 위험을 대비한 것일 뿐입니다· 혹시 알아요? 니폰유센이 망하기라도 할지· 그때를 대비해 주식 교환 옵션이라도 넣은 겁니다·”
“대단합니다·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말로는 굉장하다고 칭찬하지만 그가 그리 감동한 게 아니라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도 많이 부족한가 봅니다?”
“하하 이거 눈치가 보통 아니십니다· 솔직히 아직 많이 힘듭니다· 아시겠지만 사흘 전부터 기존 군산조선소 노조를 중심으로 대규모 고용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고용인원이 무려 2064명입니다· 우리 재무팀장이 그 고용계약을 체결하고 지금껏 잠을 못 잔다고 합니다· 매달 빠져나갈 월급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난다고 하더군요·”
“어려운 사정인 것 이해합니다·”
“그런 상황에 니폰유센과의 수주계약을 따오셨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만 사실 그래 봐야 1년짜리입니다· 군산조선소 도크는 한국 최대 규모고 우리 기술은 세계 최고입니다· 그 말은 곧 같은 선박을 만들어도 적은 인원을 투입해 가장 빠르게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과 같지요· LNG 추진 자동차 운반선
기술이야 마음만 먹으면 시간문제이고 설계야 몇 달이면 뽑습니다· 조립하는 거야 일도 아니죠·”
“그래도 최소 2년은 가지 않습니까?”
“설렁설렁 일할 때야 그렇지만 그럼 직원들 월급 주고 나면 회사가 남는 게 없습니다·”
“결국 더 많은 수주가 필요하다는 말이군요·”
“네· 우는 소리로 들리는 것 인정합니다· 사실 우는 소리가 맞기도 합니다· 하하 말 그대로 울고 싶거든요· 저 큰 조선소 안정적으로 돌리고 직원들 월급 주려면 최소 3년치 일감이 쌓여 있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본사에서 최대한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이렇게 우는 소리만 해서 죄송합니다· 물론 우리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카타르 쪽이 요새 조금 어렵긴 하지만 그렇다고 가스 사업 자체를 축소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카타르 쪽에서 최소 열 척 이상의 대규모 수주를 이루어 낸다면 그때 가서는 진짜 숨을 돌릴 수 있겠지요·”
“잘 될 수 있을 겁니다· 믿고 있습니다·”
“너무 어두운 이야기만 해죠? 일단 이번 계약을 마무리 짓는 대로 축하 자리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아무리 부족하다고 하지만 계약규모만 8천억에 달합니다· 그냥 지나갈 수 없죠·”
“하하 알겠습니다·”
영훈은 웃었지만 급격한 피로감이 엄습해 옴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저 군산시민들이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런데 일은 커졌고 고려해야 할 일은 늘어났다·
이제 2천 명의 근로자와 군산 경제가 HS그룹의 손에 달렸다고 생각하니 가슴에 큰 돌을 얹은 것처럼 답답해졌다·
어려운 일을 해결하고 왔다 생각했는데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는 기분·
갑자기 연희가 보고 싶어졌다·
*
부산 백병원·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있는 임창호 회장을 송은채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도 병상에 누워있는 신세·
시아버지도 병상에 누워있는 신세·
둘 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었다·
아들은 오래 전에 명을 달리 했고 이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딸 하나 뿐이었다·
특히 시아버지는 아예 깨어나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더욱 마음이 안 좋았다·
어차피 계열사 분리도 다 끝냈고 원하는 것도 없었다·
바라는 게 하나 있다면 딱 하루만이라도 몸을 일으켜 손녀딸 결혼식이라도 지켜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여긴 웬일이야?”
현진관광 전 사장이었던 임은진이 아니꼬운 표정으로 나타났다·
“그냥 얼굴 좀 뵈려구요·”
“회장 취임했다고 자랑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솔직히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네요·”
임은진의 얼굴이 확 일그러진다·
설마 저렇게 대놓고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뭐라고?”
“나랑 연희 얼마나 무시했어요? 그것 뿐이에요? 현진물산 차지하겠다고 임원들 구워삶아 회사 조직이 엉망이 되게 만들었잖아요?”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 증거 있어?”
“소리 지르지 말아요· 아무리 아버님이 누워 계신다고 하지만 그래도 형님이랑 저 싸우는 거 다 듣고 계실지도 몰라요· 형님은 딸이라서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전 며느리라 아버님 앞에서 고성 지르면서 싸우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흥!”
임은진도 차마 누워있는 아버지 앞에서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돌린다·
송은채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도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그룹사 회장이 되니까 형님에 대한 서운한 마음도 많이 사라졌어요· 그래 그럴 수 있지· 욕심이 났을 수 있겠지·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형님을 보고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네요·”
“아주 욕을 하는구나· 예전에는 속으로 엄청 욕했나봐?”
송은채는 대답 없이 몸을 돌려 병실을 빠져나갔다·
무언의 긍정·
화가 뻗친 임은진이 따라 나오는데 그때 딱 김태민 부회장이 다가와 송은채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오셨어요·”
“오랜만이다· 부회장 취임 축하해· 주주총회 때 가보지도 못했네·”
“아닙니다· 의결권 양도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얼굴 좋아보이네· 결혼한다며?”
“아직 이야기 진행중이고 날짜는 곧 잡을 예정입니다·”
“GK그룹이라니 잘 됐네·”
“연희도 곧 결혼한다면서요?”
“그래·”
“날짜는 잡았습니다·”
“우리는 아직 잡지는 않았는데 여름 전에 하려고·”
“너무 이른 거 아닙니까?”
“상황이 상황인데 빨리 해야지·”
김태민은 어색하게 웃다가 슬쩍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오늘 기사 봤습니다· 해주조선해양이 니폰유센한테 LNG선이랑 자동차 운반선 수주했다고 하던데 HS물산에서 움직였다면서요?”
“갑자기 그건 왜?”
“확실히 할아버지께서 현진물산을 키우신 걸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진물산의 영업조직력을 본격적으로 움직여서 수주를 따오는 그림을 옛날부터 그리셨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아쉽니?”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숙모에게 부탁 하나만 드리고 싶어요·”
“무슨 부탁?”
“이미 많이 가지셨으니까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좀 양보 해주셨으면 해서요· 지분정리도 다 됐겠다 더 욕심낼 것도 없잖아요?”
“맞아· 사실 별로 원하는 건 없어·”
“그럼 잘 됐네요· 안 그래도 우리 법무팀 직원들 요즘 정신 없는데 얼마 남지도 않은 유산 가지고도 싸우면 퇴근 못 합니다·”
“그러렴·”
혹시나 할아버지가 남길 유산을 욕심낼까 걱정했던 태민은 원하는 걸 얻었음에도 뭔가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까짓것 네가 다 먹으라는 태도에 굴욕감이 든 것이다·
하지만 태민은 참았다·
“감사합니다·”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가 가진 경기도 일대의 대지와 주식 지분들 그리고 자신도 알지 못하는 무기명 채권들까지·
그것들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
인당 40만 원이 넘는 고급 일식집·
주우진 의원은 불편한 얼굴로 맞은편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국회의원이 된 이후 얼마나 많은 접대를 받아봤겠는가?
식사비가 비싸서 불편한 게 아니라 비싼 식사비를 내는 맞은편 남자의 의도를 모르기에 불편한 거였다·
그래서 강윤기가 술잔에 술을 따라도 받기만 할 뿐 입에 대지는 않았다·
“나를 보자고 했다고?”
“네·”
“영민주택 강윤기 대표라··· 전라도에서 주로 활동하는 건설회사라고 들었는데 나를 왜 찾아왔나?”
“전라도에서 주로 일감을 받아 일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한 동네에서만 일할 수 있겠습니까· 회사도 사람도 자고로 큰 물에서 놀아야 성공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주우진 국회의원은 강윤기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다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한데 난 사람을 잘 믿지 않아· 더군다나 오늘 처음 만난 기업인을 뭘 믿고 같이 하자고 파이팅을 하겠나?”
“그런가요? 이해합니다· 그럼 오늘은 식사를 대접해드리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영훈과의 만남 이후로 윤기는 조금 달라졌다·
영훈에게서 풍기는 알 수 없는 여유로움이 가진 강력한 카리스마를 자신도 모르게 동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주우진 의원은 조금 뜻밖이었다·
대개 이런 자리를 마련하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어떡해서든 자신을 어필하려고 하는데 이 사람은 달랐기 때문이다·
“정치인에게 식사 자리는 꽤 예민한 자리라네· 더군다나 이렇게 비싼 식사는 특히 더 조심을 해야 하지· 아무런 사심이 없는 식사라고 해도 나중에 어떤 공격을 받을지 모르거든·”
속내를 꺼내 놓으라는 말이다·
“전 꿈이 있습니다· 아주 큰 기업가가 되는 게 꿈이죠· 이병천 정주연 같은 큰 기업가 말입니다· 그런데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제가 그런 큰 기업가가 되기 위해서는 큰 정치인들과의 교류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평택에서 2선 아직 중앙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의원님을 단번에 신문 1면에 오르게 해드리겠습니다·”
어찌 보면 기분이 나쁠 수 있는 말이지만 주 의원은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오히려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떻게?”
“지금 국민들에게 가장 많은 지지와 주목을 받는 여당 의원의 약점이라면 어떨까요?”
“가장 많은 지지와 주목을 받는 여당 의원의 약점이라··· 그게 누군가?”
“조재민 의원입니다·”
주우진 의원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술잔을 가볍게 넘기고는 말했다·
“조재민의 저격수가 될 수 있다 그 말이지?”
“맞습니다·”
“재미있군· 들지·”
주우진 의원이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 노림수(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