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격수(2) >
주우진 의원의 저격성 기사는 HS물산에서도 가볍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송은채 회장이 직접 영훈을 불러들였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송 회장이 영훈을 소파에 앉혀 놓고 한 첫 마디는 예상을 벗어났다·
“6월 첫째 주 토요일 어때?”
“네?”
“결혼 날짜 말이야·”
사실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에서 사주를 가장 잘 보는 사람이 영훈이다·
그렇기에 날을 받고자 하면 영훈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전문가인 거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굳이 나서서 날을 잡지 않았던 건 자신의 사주를 애써 잊었던 이유와 비슷했다·
자신의 미래를 계산해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 회장이 날을 받아오면 어떤 날짜가 됐든 계산조차 해보지 않고 군말 없이 받아들일 참이었다·
“좋습니다·”
“진짜?”
“그럼요·”
“우리 연희랑 마지못해 결혼하는 건 아니지?”
“그 정도로 낯이 두껍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굳이 그렇게까지 살 이유도 없고요·”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믿기지 않는데 최 상무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냥 믿게 돼· 며칠 전에 부산에 다녀왔어·”
“회장님은 어떠십니까?”
“아직 눈을 못 뜨시네· 그렇게 정정하시던 분이··· 이래서 살아 계실 때 잘하라고 하는 걸 거야·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잘하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쓰러지시니까 계속 마음이 안 좋아·”
“그게 당연할 겁니다·”
“시아버님은 뭐든 철저한 분이셨어· 무엇보다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셔서 가족에게도 차갑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연희 동생만큼은 그 누구보다 예뻐하셨지·”
송은채 회장의 얼굴은 지금까지 봤었던 그 어떤 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실수도 아니었어· 그저 운이 없었던 거야· 유독 누나를 따랐던 그 녀석이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졌어· 연희는 그것도 모르고 놀고 있다가 나중에야 알았던 거지·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은 표현할 수도 없다고 하지? 연희 잘못이 아니니까 지금까지 걔 앞에서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했어· 내가 아니더라도 시아버지
와 연희 아빠한테 넘칠 만큼 미움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렇군요·”
“어린 나이에 외국을 떠돌 수밖에 없었던 연희가 난 무사히 자라준 것만 해도 정말 감사하고 고마워· 그런 연희가 최 상무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을 때 솔직히 난 기뻤어· 어디서 이상한 남자 데리고 와서 결혼한다고 할 줄 알았거든·”
“·······”
“그런 면에서 난 운이 참 좋아· 주변에 적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때 여기 최 상무가 나타나 줬잖아?”
“회장님만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저도 운이 좋았습니다· 회장님이 아니면 누가 절 이런 번듯한 직장에 신입사원으로 뽑아주겠습니까?”
“그럼 우리 둘 다 운이 좋았다고 하자·”
“네·”
“그건 그렇고 기사 봤지? 조재민 시장 말이야·”
“봤습니다·”
“어떻게 생각해?”
영훈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조금 곤란한 상황이 됐습니다·”
“자세히 말해봐·”
“다른 국회의원이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습니다· LH공사 직원을 돈으로 움직인 것도 아니고 한국 내 여론은 본래 오래가지 않으니 시간만 조금 끌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일 겁니다·”
“그런데 조 시장은?”
“야망이 있는 인물인데 거기다 조심스러운 사람입니다· 주변 평판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고요·”
“대통령까지 생각한다는 거지?”
“맞습니다· 증거가 없다지만 LH공사 실무자가 조 시장 인척입니다· 정황증거가 딱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전 정치를 잘 모르지만 지금까지 오랜 시간 뉴스를 보아오면서 정치인들이 제대로 된 증거를 가지고 상대방을 몰아붙이는 건 몇 번 본 적 없는 것 같습니다· 정치하는 자들에게는 중요한 건 상대방이 잘못
한 점이 있다는 걸 국민들이 믿게 하는 것일 테니까요·”
“후후··· 그건 맞아·”
“그리고 조 시장은 그걸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적당히 권력이나 누리고 살 사람이라면 별것 아닌 공격이 되겠지만 아마 조재민 시장은 심적으로 상당히 쫓기고 있을 겁니다·”
송은채 사장은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때 영훈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김시원 보좌관이었다·
“조재민 시장 보좌관입니다·”
“그래? 받아 봐·”
영훈은 앉은 자리에서 전화를 받아 스피커로 돌렸다·
“최영훈입니다·”
“김시원입니다· 기사 보셨죠?”
“네 봤습니다·”
“지금 시장님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는 중입니다· 4시 전에는 도착할 것 같은데 시간을 내주셔야겠습니다·”
영훈은 슬쩍 송은채 회장을 돌아보았다·
송 회장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서초동 조용한 곳에 자리 잡아놓겠습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영훈을 보고 송 회장이 말했다·
“직접 오는 걸 보니 역시 최 상무의 예상이 맞았네· 항상 느끼지만 진짜 귀신같아·”
“그리 어려운 예상은 아니었습니다·”
“서초동에서 만난다고?”
“경부고속도로 타고 강북까지 올라오려면 시간을 더 잡아먹어야 할 테니까요·”
송 회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조재민 시장 내가 만날까 하는데·”
“회장님께서요?”
“언제고 한번은 봐야 할 사람이잖아· 군산이야 멀어서 못 갔지만 서울까지 올라왔는데 얼굴도 안 볼 수 없지 않겠어?”
“그렇긴 하네요· 알겠습니다· 김시원 보좌관에게 문자 보내놓겠습니다·”
“최 상무도 같이 갈까?”
“아닙니다· 집중이 분산됩니다·”
송 회장과 조 시장이 만난다면 그만큼 그녀의 격을 올려줘야 한다·
적어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만큼은 송 회장을 들러리처럼 세워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녀는 결코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다·
조재민 시장을 만나려고 마음먹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
“알겠어· 그럼 최 상무는 출장 다녀온 연희랑 Nodri Clare 인수에 주력하는 건가?”
“그러려고 했는데 조금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주우진 의원이라는 사람에 대해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요·”
“주우진 의원? 왜?”
“제가 드라마랑 영화를 보니까 주인공이 누명을 쓰면 그 누명을 해명하려 할수록 일이 더 꼬이더라고요·”
송 회장은 영훈의 말을 알아들었다·
“하하 그래· 수고해·”
“네·”
영훈은 회장실을 나와 기획조정실로 돌아왔다·
기조실 분위기 역시 오늘 뜬 기사 때문에 뒤숭숭했다·
조재민 시장과 회사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적어도 무슨 연관이 있으리라는 정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영훈이 들어오자 다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눈만 빼꼼히 내밀며 분위기를 살피는 모습들이었다·
그런데 영훈이 기조실로 돌아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박 부장도 연희도 아니었다·
“민희 씨 잠깐만 들어와 봐요·”
“네·”
민희가 따라 들어와 조용히 문을 닫자 영훈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때 안 물어봤는데 이형준 상무 만나보니까 어땠어요? 부담가지지 말고요·”
“으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바람기가 조금 있는 것 같지만 사람은 나빠 보이지 않던데요?”
“바람기가 있으면 사람이 나쁜 거 아닌가요?”
“돈이 많은 사람이니까요· 많은 유혹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해할 수 있다?”
“아니요· 나쁜 버릇은 고쳐야죠·”
역시 보통이 아니다·
“이야기는 좀 통해요?”
“네·”
“잘됐네요· 그럼 박병호 부장에게 재무팀과 상의해서 회사채 발행에 관한 보고서 올리라고 할 테니까 이형준 상무 만나서 7천억짜리 회사채 발행하고 다음 달부터 판매 가능할지 확인해보세요· 적어도 4천억 정도는 신영투자증권에서 사들여줬으면 한다는 말도 덧붙이고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신영은행이 일본 쪽과 밀접하게 연관돼있다고 들었어요· 앞으로 니폰유센에 관해서 신영은행이나 신영투증 신영모건스탠리 일본법인에서 얻은 정보를 우리와 공유해줬으면 한다고도 전해주세요· 이 부분은 신영은행 관계자들이 알지 못했으면 좋겠고요·”
“알겠습니다·”
“수고하고 박병호 부장님도 불러줄래요?”
“네·”
민희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
경부고속도로에서 교보타워 사거리 방면으로 빠져나오면 10분 거리에 5성급 호텔이 있는데 이게 딱 HS관광이 소유한 켄싱턴 호텔이다·
조용하게 국회의원이나 국정 관계자를 접대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는 셈이었다·
미리 하나의 엘리베이터와 통로만 통제하면 주차장에서부터 방까지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들어올 수 있으니까·
조재민 시장 역시 호텔 그랜드스위트룸까지 들어오면서 철저하게 지켜지는 통제에 매우 만족했다·
그리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강남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뷰까지·
“좋군요·”
조 시장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송은채 회장은 다리를 꼬고 앉아 차를 홀짝이고는 말했다·
“최 상무 대신에 제가 와서 실망한 건 아니시죠?”
“그럴 리가요· HS그룹의 회장이 직접 만나기를 원하는데 굳이 아랫사람을 찾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럼 다행이네요· 오신 김에 하루 묵고 가세요· 다른 분도 아니고 조재민 시장님께 이 정도는 해드릴 수 있답니다·”
“말씀은 고맙지만 한가하게 호텔에서 일을 볼 상황이 아닙니다· 제가 여기까지 온 이유도 아시겠지만 솔직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이에요·”
“자금이 움직인 건 아니라고 알고 있어요·”
조 시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다·
조재민 시장은 수많은 차가 오가는 강남대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그냥 의혹을 제기할 겁니다· 그리고 그 의혹을 언론이 받아쓰겠죠· 받아 쓰는 게 아니라 심층취재까지 하며 제기된 의혹을 더욱 크게 부풀릴 겁니다· 사업 규모를 부풀리고 사업권을 따낸 건설회사가 가지는 이익을 부풀리고 나와 HS그룹의 유착관계를 부풀릴 겁니다· 그럼 그걸 가지고 검찰이 칼을
들이대겠죠· LH공사를 압수수색하고 시청을 압수수색 할 겁니다· 아무것도 안 나온들 그때 가면 나에게 무슨 이미지가 남을까요? 억울한 희생자? 난 그걸 원하지 않습니다·”
“검찰이 그 정도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나도 최악의 경우를 말한 겁니다· 최악의 경우· 말 그대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가정인데 이게 결코 불가능한 게 아니에요· 더욱 문제는 이 최악의 경우가 진행되면 중간에 막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시장님이 원하는 건요?”
“HS건설이 봉선동 사업권을 포기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안 돼요·”
조재민 시장은 그녀가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모습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그 말이 나올 거라고 기다렸다는 듯 칼같이 잘라왔다·
“봉선동 사업 말고도 HS건설에 내가 꽤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집적단지에 HS건설이 참여한 것만으로도 무려 천억 규모 아닙니까?”
“정부 발주 공사가 얼마나 남을 것 같아요? 공사대금 천억 내주면 그중에 백억도 남기기 힘들어요· 백억이면 감사할 수준일걸요?”
“회장님 길게 보는 게 어떻습니까? 내가 곤란을 겪으면 HS그룹도 미래에 거두어들일 이익이 줄어든다는 걸 생각하세요·”
“우리가 사업권을 포기한다고 의원님에 대한 의혹이 줄어든다고 보지 않아요· 오히려 더욱 뭔가 있으니까 제 발 저린다고 보겠죠· 게다가 공사는 이미 시작됐고 부지 매입에 들어간 돈에다 하청업체에 공사대금 일부까지 나간 상황이에요· 되돌릴 수 없어요·”
“후····”
조 시장은 강하게 압박한다고 원하는 대로 진행될 사안이 아니라고 느꼈다·
긴 한숨을 토해내는 조 시장을 보며 송 회장이 말했다·
“그렇게 안절부절하지 말아요·”
“내가 가만히 있게 생겼소?”
송 회장은 팔짱을 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조금 냉정한 말투로 말했다·
“곤란한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시장님이 그렇게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이면 주변 사람들도 불안해해요· 그리고 애초에 기사가 터졌다고 허둥지둥 서울로 올라오는 짓도 해서는 안 됐어요·”
“짓?”
조 시장의 얼굴이 일그러짐에도 송 회장은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고작 의혹 하나 터뜨린 것뿐이에요· 증거도 없는 의혹 하나· 저들의 의도를 알기 때문에 불안한 건 이해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무겁게 행동했어야죠· 정치인은 천년이 넘게 자리를 지키는 거대한 바위 같아야 한다는 거 모르시나요?”
“······”
“기다리세요·”
그제야 조 시장은 자신이 너무 흥분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내가 너무 흥분했군요· 미안합니다· 그런데 기다리면 무슨 해결책이 나올 거라고 보는 겁니까?”
송 회장은 다시 차분한 안색으로 말했다·
“최 상무가 그러더군요· 누명을 썼을 땐 해명하려 하면 할수록 일이 더 꼬인다고· 사실 엄밀히 말하면 누명은 아니지만····”
“그게 무슨···?”
“말했죠? 무거워야 한다고· 엉덩이를 무겁게 하고 기다리세요· 주우진 의원은 시장님만 건드린 게 아니라 우리를 건드린 것이기도 하니까·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고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올라오세요· 그때는 웃으면서 같이 식사라도 해요· 배웅하지는 않을게요· 그럼····”
송은채 회장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재민 시장을 두고 방을 나갔다·
< 저격수(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