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격수(4) >
형준은 평소에 잘 보지도 않던 연예 기사를 클릭하며 창밖을 힐끔거렸다·
1시간 전 최 상무 대신 그녀가 온다는 연락을 받고 은근 가슴이 설레고 있었다·
하지만 모양 빠지게 얼빠진 표정을 지을 생각은 없었다·
재벌 자녀도 아니고 고작 상무 비서에게 쩔쩔매는 모습은 너무 우습지 않은가·
“많이 기다리셨어요?”
순간 흠칫 놀란 형준이 얼른 핸드폰을 뒤집고 고개를 들자 민희가 말했다·
“뭘 보고 계셨기에 그렇게 놀라세요? 설마 야한 거 보고 계셨던 건 아니죠?”
“아니 날 어떻게 보고····”
“국회의원도 국회에서 누드 검색하던데 남자들은 다 그런 거 아니에요?”
“연예 기사 봤습니다·”
형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확인시켜주자 민희가 묘한 눈초리로 말했다·
“아··· 한가하신가 봐요· 보통 그 위치에 있으면 연예 기사 대신에 경제면을 주로 보지 않던가요?”
“잠깐 짬이 나서 봤던 거예요· 나 그리고 엄청나게 프로페셔널한 사람입니다· 일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이거 왜 이러지?”
“어머 죄송해요· 기분 나쁘셨던 건 아니죠?”
“아니 뭐··· 앉으세요·”
민희는 싱긋 미소지으며 자리에 앉고는 물었다·
“많이 기다리신 건 아니시죠?”
“나도 방금 왔어요·”
사실 기다린지 30분이 넘었지만 왠지 오래 기다렸다고 하면 지는 것 같은 느낌에 온 지 얼마 안 된 척 여유를 부리며 음식을 시켰다·
식당은 을지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골뱅이 전문점으로 치킨과 골뱅이 그리고 맥주를 파는 가게였다·
“이런 분위기 좋아하실 줄 몰랐어요·”
“재벌이라고 항상 스테이크에 와인만 마실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풉! 어머 죄송해요·”
“왜 웃습니까?”
“방금 좀····”
“느끼했다고요?”
“조금····”
“최 상무 이야기나 꺼내 보세요·”
형준이 심통난 표정으로 툭 내뱉자 민희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저희 상무님께서 7천억 규모 회사채 발행을 약속하셨어요· 기간은 재무팀과 협의해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발행할 예정이고 신영투자증권에서 이중 4천억 정도를 소화해주셨으면 하셨어요·”
“4천억? 흐음··· 이자율은요?”
“그건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달부터 바로 판매가 가능한지도 물어보셨어요·”
“준비야 우리가 아니라 그쪽이 하는 거지· 그게 끝인가요?”
“그리고 니폰유센에 관한 신영은행 신영투증 신영모건스탠리 일본법인에서 얻은 정보를 공유해주셨으면 한다고 하셨어요· 이 부분은 다른 은행 관계자들은 모르는 상태여야 한다고도 덧붙이셨고요·”
형준이 눈을 빛냈다·
“니폰유센? 이번에 해주조선해양이 수주 받은 그 회사 말인가요?”
“네·”
“거길 왜?”
“저도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상무님의 뜻이····”
형준은 민희의 말을 끊었다·
“정확히는 몰라도 대략적으로는 알잖아요?”
“·······”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랑 최 상무는 파트너예요· 이 정도는 알아도 될 것 같은데?”
“말씀드렸듯이 정확한 이유는 몰라요·”
“정확하지 않은 이유· 그게 듣고 싶다니까요?”
민희는 억지를 부리는 형준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절 곤란하게 하고 싶으신 거군요? 저는 내용을 전달하라는 지시만 받았지 이형준 상무님과 친분을 유지하라는 지시는 받지 않았어요· 그러니 저를 더는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거 참 농담 한번 못하겠네요· 뭐가 그렇게 빡빡합니까?”
“빡빡하게 하지 않으면 상무님의 그 느끼한 눈빛에 넘어갈까 봐 그래요·”
멈칫한 형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긴 뭐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오해하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게 있어요· 내 겉모습이나 배경을 보고 바람둥이로 여기면서 미리 선입견을 갖는 여자들도 있거든요·”
“아니라는 말이세요?”
“하하 당연하죠·”
“전 거짓말하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리고 전 거짓말인지 아닌지 아주 잘 캐치하거든요· 저희 보스가 절 왜 신뢰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순간 형준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
“거짓말을 해야 할 때는 해야 하겠죠· 그런데 여자 앞에서 거짓말하는 남자는 멋 없어요· 상무님은 그런 남자 아니시죠?”
뻔히 알면서 묻는 듯한 눈빛에 형준은 섬뜩함마저 느꼈다·
“크흠··· 뭐····”
“오늘 맥주랑 골뱅이는 제가 살게요· 전에 소고기도 얻어 먹었는데 계속 얻어먹으면 염치 없잖아요?”
“이거 뭐 얼마 한다고··· 내가 사도 됩니다·”
“괜찮아요· 서로 법인카드로 긁는 건데 내가 내니 네가 내니 하는 건 우습잖아요·”
“아니 뭘 그렇게까지····”
이렇게 되니 전에 산 소고기도 고작 법인카드로 긁어서 생색낸 상황이 되어 버렸다·
결국 형준은 1시간 내내 자신이 원하는 분위기를 만들지 못하고 자리를 쫑내야 했다·
마지막에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민희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래서 마음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아무래도 영훈을 만나야겠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말려들어가는 저 여자를 상대하려면 영훈의 도움이 필요했다·
*
아침에 출근한 영훈은 민희에게 어제 미팅 관련해서 간단한 보고를 받고 박병호 부장을 만났다·
박 부장은 어제 저녁부터 고작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꽤나 의미있는 내용을 가지고 왔다·
“일단 평택 통일평화당 선거운동 본부장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우규민이라고 선거판에서 10년 넘게 활동하던 사람인데 보통 선거 한번 할 때마다 집이 하나씩 생긴다는 소문입니다·”
“빠르시네요· 소문까지 들으시고·”
“평택에 저희 공장도 있고 평택항을 통해 꽤 많은 물자가 들어옵니다· 당연히 우리 회사 직원들이나 하청업체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거주하고 있죠·”
“오··· 그렇군요·”
“평택 바닥에서 수십 년 거주하며 살던 이들이 다 우리 식구나 다름없으니 선거철에 어떤 이야기가 돌았는지 확인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전화 한 통에 별별 이야기들을 다 들려주었거든요· 일단 우규민이라는 본부장은 꽤 능력이 좋기는 했습니다· 본인이 손댄 선거는 거의 다 당선을 시켰고 그 과정
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한 건 틀림없는 것 같고요·”
“선거자금에서 흘러나간 게 맞기는 한 건가요?”
“우리 쪽 하청업체 대표가 말하기를 선거가 끝나고 우규민 와이프가 현금으로 용인의 상가를 매입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다고 했답니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어서 지금 직원 보내서 확인 중에 있습니다·”
“으음··· 다른 건요?”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대놓고 돈을 뿌리거나 하는 일은 많이 없다고 합니다만 그래도 선거철만 되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티를 안 내고 돈을 뿌린다고 합니다· 마침 잘된 게 저와 연락한 하청업체 대표가 평택 중소기업 살리기 운동본부 대표입니다·”
참 절묘한 상황이다·
“정말요?”
“네· 식사 얻어먹은 건 부지기수고 과일에 고기에··· 선물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고 하더군요·”
“선거법 위반 아닙니까?”
“맞습니다·”
“딱 걸리긴 했네· 너무 쉽게 걸려서 당황스러울 정도인데요?”
“솔직히 저도 전화통화 몇 번에 이렇게 쉽게 잡을지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지역구가 평택이 아니라 고양시나 포천 같은 곳이었으면 절대 이렇게 쉽게 알아내지 못했을 겁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폭로하실 겁니까?”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대로 폭로하면 하청업체가 무척 곤란하겠죠?”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 나름 깊게 이어온 인연이었을 텐데 우리와의 갑을 관계 때문에 사실상 마지못해 폭로한 상황이니까요·”
물어본다고 그냥 쉽게쉽게 대답한 건 아니었나보다·
영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우리 쪽 기자 있죠?”
“네·”
“기사 하나만 냅시다· 적당히 추려서 주우진 의원이 선거에서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는 수준으로 가볍게·”
“핵심은 비껴가게 말입니까?”
“네 우리가 기사를 냈다는 정도만 티를 내주시면 됩니다·”
“그렇다고 주우진 의원이 쉽게 물러날까요?”
“물러나진 않더라도 대화는 하고 싶을 겁니다· 어느 정도나 알고 있는 건지 궁금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
박 부장이 나가고 딱 1시간 만에 기사가 올라갔다·
[주우진 의원 지역구 주민에 금품 제공 의혹]
그리고 기사가 나간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영훈의 전화가 울렸다·
“최영훈입니다·”
“너 나랑 해보자는 거야?”
바짝 독이 오른 주우진 의원의 목소리·
“그럴 리가요· 어느 기업인이 정치인과 맞짱을 뜨고 싶겠습니까?”
“내가 모를 줄 알아? 이 기사 네가 냈지?”
“글쎄요· 그런데 이 기사가 의원님을 많이 곤란하게 만들었나요? 내용을 보니 증거는 없고 순 의혹 투성이던데 말이죠·”
“너 이 새끼··· 뭐 하자는 거야?”
“자꾸 오해하십니다· 그건 그렇고 오늘 날이 좋던데 전통차 어떠십니까? 종로 3가 쪽에 전통차 기가 막히게 하는 곳이 있던데 제가 언제 시간 되면 대접해 드리고 싶네요· 아 보는 사람이 많다면 종로 리츠칼튼에 전통차와 떡이 상당히 좋습니다·”
“지금 가지·”
“기다리겠습니다·”
엉덩이가 들썩이는 걸 보니 박병호 부장이 제대로 집기는 한 것 같다·
곧바로 회사를 나와 호텔 직원들에게 VIP 손님이 오실 거라는 내용을 전달했다·
HS관광이 HS물산 소유가 된 게 이렇게 편하게 작용할 줄이야·
기업이 호텔을 가지고 있으니 접대가 너무 편했다·
게다가 봉선동 사업 선정 때도 큰 메리트가 있었으니 영훈은 느긋하게 호텔을 둘러보면서 괜히 뿌듯함을 느꼈다·
30여 분의 시간이 더 흐르고 주우진 의원이 미리 잡아놓은 스위트룸에 도착했다·
“또 뵙는군요·”
“감히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협박해?”
그는 아직도 열이 뻗치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안색으로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영훈은 그의 뒤에 서 있는 보좌관을 향해 말했다·
“잠깐 나가 있으시죠?”
“내 보좌관은 나와 같아·”
주 의원이 반대하자 영훈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저었다·
“저는 주 의원님과 대화하고 싶은 거지 다른 사람이 끼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렇게 같이 하길 원하신다면 나중에 이 자리에서 했던 이야기를 전달하시지요· 그런데 아마 전달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후회하지 마시고 그냥 내보내시는 게 어떨까요?”
잠시 고민하던 주 의원이 보좌관에게 나가라고 고갯짓을 한다·
보좌관이 나가자 주 의원이 영훈의 맞은편에 앉았다·
“너 장온섬유 강만수 사장 털었지? 알아보니까 장온섬유가 너희 하청이라며? 잘 걸렸다 싶지?”
그 사이에 빨리도 알아냈다·
“그럼 당선 취소가 될 수도 있다는 거 알고 계시겠네요?”
“잘못 생각했어· 지금 다시 전화해봐· 아마 다른 소리를 할걸?”
영훈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와··· 대단하시네요 몇 시간 지났다고···· 그런데 선거 끝나고 캠프 본부장 아내가 현금으로 용인에 상가를 샀다고 하던데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것도 선거법 위반 아닌가?”
이건 생각하지 못했는지 주 의원의 눈가가 떨린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더욱 거친 기세로 말했다·
“그걸로 날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내 허락 없이 선거자금 홀랑 처먹은 그 새끼 내가 가만 둘 것 같아? 지금 여기를 나가는 즉시 고발 조치할 거야· 더 있나? 더 있으면 내놔봐·”
영훈은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그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말했다·
“이쯤 되면 서로 그냥 마무리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잖아요? 주 의원님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의정활동 전념하시고 우린 우리대로 아파트 짓고 군산조선소 돌리면서 경제활동하면 서로 좋은 거 아닙니까?”
“그것도 그렇지·”
그는 인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씨익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 처음에는 조재민이만 잡고 흔들면서 주가 좀 올려보려고 했는데 HS물산이 조재민 대신에 커버를 치고 나오네? 진짜 뭐가 있다는 거잖아? 이거··· 내 육감이 이건 그냥 물어야 하는 거라고 막 울리고 있거든·”
영훈은 주 의원이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는 걸 보면서 말했다·
“그 육감 틀린 것 같은데····”
“맞을걸?”
비릿하게 웃는 그를 보며 영훈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여기서 그만두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원님의 아름다운 두 따님과 아내분이 공중파 저녁 뉴스로 평생 모르고 살았던 의원님의 숨겨둔 아들 소식을 듣게 될 수가 있어요·”
“뭐 뭐라고···?”
떨리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영훈이 말을 이었다·
“사적인 거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억지로 빙빙 돌리고 있는데 자꾸 그러시면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서로 관두자고요· 아시겠습니까? 그럼 의원님께서 동의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육감··· 믿지 마세요· 제 앞에서는·”
영훈은 충격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주우진 의원을 두고 방을 나갔다·
< 저격수(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