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혹의 기술(1) >
저녁 무렵 영훈은 긴장된 마음으로 청담동의 한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까만 밤 하늘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지 얼마나 됐을까?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에요·”
연희는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연희는 박병호 부장과 정신없이 일하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영훈과 마주할 수 있었다·
회사채 발행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이제 본격적인 인수협상에 들어갈 생각으로 꿈에 부푼 그녀는 이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기회라며 상당히 들떠 있는 상태였다·
“바빴어요?”
“그렇죠· 재무팀하고 회의가 길어졌거든요·”
“재무팀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똑같아요· 회사 재정을 생각할 때 너무 모험이라고요· 우려가 많아요· 회사채 금리랑 만기를 생각할 때 내년에 돌아올 만기자금을 과연 무리 없이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대요· 자칫 잘못하면 HS관광에서 호텔 매각한 자금을 끌어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박 부장님이랑 저랑 계속 설득했죠·”
아무리 회사에서 가장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기획조정실 실장이 추진하는 일이라고 해도 재무팀으로써는 할 말을 한 셈이다·
그들의 우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수고했어요·”
“나 많이 안 늦었죠?”
“네· 안 그래도 연희 씨가 일찍 올 것 같지 않아서 음식은 일행 오면 준비해달라고 했어요·”
“히히··· 요즘 운전하는 건 어때요? 많이 안 무서워요? 사고 안 내는 것 보면 기특하긴 한데·”
“저 운동신경 좋습니다· 산에서 장작 패는 게 그냥 보면 쉬워 보이는데 막상 해보면 운동신경이 많이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한 번에 장작의 중심에 도끼를 내리꽂으려면 균형감과 눈이 좋아야 하거든요· 어지간한 남자들은 도끼질 하라고 하면 겁먹어서 제대로 못 합니다·”
영훈의 주접에 연희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쳐다볼 뿐이었다·
예전에는 남자들의 이런 허세를 보면 그저 기가 차고 유치해 보였는데 어째서 영훈의 이런 허세는 귀엽기만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오~ 운전실력이 빨리 늘어서 다행이에요· 사실 영훈 씨가 차 가지고 움직일 때마다 조금 불안했거든요·”
“다들 이렇게 배우는 거겠죠·”
“운전하는 게 재밌어요?”
“연희 씨는 안 재밌어요?”
“전 그닥····”
“어렸을 때 드라마로 놀이공원 같은 데를 가면 꼭 범퍼카를 타는 장면을 보여주잖아요? 그걸 보면서 되게 부러웠습니다· 나도 타보고 싶은데··· 그러면서요· 산에서 내려왔을 때 취직한 다음 운전도 꼭 해보고 싶었는데 회사에서 공짜로 차도 내주고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엄마한테 말해서 더 좋은 차 내달라고 할까요?”
“이제는 내가 사도 됩니다· 저 월급 많이 들어와요·”
“아··· 맞다· 연봉계약은 어떻게 했어요? 생각해보니까 왜 이걸 생각 못 했지? 나도 웃기네· 승진하면 당연히 연봉도 궁금해야 하는데 그냥 승진한 것만 좋아했었네요·”
“부자라서 그런 겁니다·”
“아··· 그 말은 좀 아프다· 내가 꼭 아무것도 모르는 재벌집 막내딸이 된 것 같잖아요·”
“그 정도는 받아들이고 살아요· 남들은 그 타이틀 죽어도 못 따는 거니까· 대신 좋은 일 많이 하고 군산조선소처럼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 주도록 노력하면 남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재벌집 막내딸이라고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럼요· 지금도 연희 씨 많이 바뀌었어요· 상도 많이 바뀌었고·”
“어떻게 바뀌었는데요?”
“음··· 그건 비밀로 할게요· 인생이 다 보인다는 게 그렇게 축복인 건 아닙니다· 난 이제 당신의 미래에 대해 미리 알고 싶지 않아요·”
“그럼요?”
“내 미래는 살아가면서 겪어가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의 미래도····”
연희는 감동했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영훈은 미리 준비했던 반지 케이스를 꺼내 내밀었다·
“한 번도 여자를 만나 사랑해보지 않았어서 내 마음이 사랑인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당신과 같이 하고 싶은 마음은 확실해요· 아마 이게 사랑일 거예요· 나와 결혼해줄래요?”
연희는 입을 막고 잠시 시간을 보내다 손을 척 내밀었다·
“좋아요· 손에 껴줘요 얼른·”
영훈은 조심스럽게 반지를 꺼내 그녀의 약지에 끼워주었다·
그녀가 미리 사이즈와 모델까지 정해준 만큼 그녀의 손에 딱 맞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니 어찌나 아름다운지 영훈의 얼굴에도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연희는 마음에 쏙 드는지 손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감탄했다·
“예쁘다·”
“마음에 들어요?”
“그럼요· 누가 골랐는데· 고마워요·”
“작은 이벤트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이게 이벤튼데 뭐가 더 필요해요? 아··· 우리 신혼집은 어디로 할 거예요?”
“그냥 당신이 준 오피스텔에 신혼살림 차리면 되지 않아요?”
“거긴 혼자 살기 딱 좋아요· 그리고 신혼살림 들어갈 자리도 없어· 회사 근처가 좋을까요? 아니면 강변?”
“연희 씨 원하는 대로·”
“오케이· 대신 내가 몇 개 추려놓을 테니까 집은 같이 보러 가기에요· 알겠죠?”
“그건 당연하죠·”
“그런데 우리 언제까지 존댓말 할 거예요? 결혼해서도 계속? 존댓말 하는 게 결혼생활에 좋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나는 그냥 좀 남처럼 느껴져요· 가족 같지 않아·”
“그럼 이제 서로 말 놓을까?”
연희는 기다렸다는 듯 소리쳤다·
“응! 좋았어· 아휴 내가 원래 꼬박꼬박 존댓말 하는 스타일이 아니거든· 영훈 씨 앞에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몰라·”
“하하 어떻게 참았어?”
“사랑의 힘으로? 히히····”
그때 연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 문숙 아줌마네?”
“백화점에서 뵀던 사모님?”
“응· 무슨 일이지?”
“일단 받아·”
연희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연희니?]
“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나야 그렇지· 그때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고맙다는 말도 못 했다·]
“어떻게 됐어요?”
[말도 마· 아들 새끼는 믿을 수 없다고 자기가 그 애랑 얘기해본다 어쩐다 한동안 난리도 아니었어· 걔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거야· 그래서 걔랑 직접 경찰서에서 범죄경력조회서를 떼어 오겠다고 하고서는 결국 못 떼어 온 거 있지?]
“어머 정말요?”
[경찰서 앞에서 1시간을 실랑이를 했대· 처음에는 날 못 믿는 거냐 우리 사랑이 이 정도냐 뭐 이랬겠지· 뻔해· 그런데 우리 아들이 내 성격 알거든· 내가 어설프게 넘어갈 사람이 또 아니잖니· 날 설득하려면 범죄경력조회 서류 떼어 가야 한다는 거 아니까 막무가내로 잡아끌었는데 글쎄 거기서 도망갔단다·]
“어떡해····”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너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니· 우리 집안 재산 거덜내고 집안 풍비박산될 뻔했던 거야·]
“결혼 전에 알았으니까 다행이에요·”
[청첩장 돌리기 전에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니· 예식장 예약 다 해놓고 신혼집 구하는 중이었는데····]
“취소비용은 생각하지 마세요·”
[취소비용도 취소비용이지만 우리 아들 지금 식음 전폐하고 방에 틀어박혀 있다· 뭘 잘했다고····]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작정하고 속이는데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래야지··· 바쁘니?]
“아니요 바쁘지는 않아요·”
[이번에 너무 고마워서··· 내가 어떻게 감사를 할까 생각하다가 우리 바깥 양반한테 계속 속일 일도 아니라서 얘기를 했어· 그러니까 너무 고맙다고 하면서 그러는 거야· 모레 인천공항으로 인도 도로교통부 차관이 입국할 거래·]
“어? 그래요? 무슨 일로요?”
[정확한 내용은 주한 인도 대사관으로 연락을 달라고 하던데?]
“그래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하니까 한번 알아봐·]
“알겠어요 아주머니· 감사해요·”
[내가 더 고맙지· 언제 남자친구랑 같이 저녁이나 하자· 너무 고마워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
“네 영훈 씨 시간 맞으면 언제고 연락 드릴게요· 들어가세요·”
연희는 전화를 끊고는 손바닥을 딱 쳤다·
“대박! 모레 인천공항으로 인도 도로교통부 차관이 입국할 거래·”
“도로교통부 차관?”
“응·”
“무슨 일로?”
“정확한 건 주한 인도 대사관 쪽으로 문의하라고 하던데? 대사님이 직접 알려주려고 하시나 봐·”
“으음··· 그런데 만나면 우리가 할 만한 게 있을까?”
“도로교통부 차관이니까 도로나 기반 시설 때문에 온 게 아니겠어?”
“그 정도는 자국 건설사에 맡기지 않나?”
“외국 건설사랑 입찰로 경쟁 붙이는 건 흔하잖아·”
“그럼 남는 게 별로 없을 텐데····”
영훈은 그동안 해외에 진출해서 공사를 따냈던 수많은 건설사가 왜 부실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교육을 받았다·
계열사 한 축을 건설사가 담당하는 만큼 건설사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존 건설사들이 해외 공사에서 저가 수주로 공사를 따내도 손해만 봐왔던 걸 알고 있기에 그런 식의 경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있으니까 연결시켜 주려는 게 아닐까?”
“그렇겠지? 일단 자초지종 들어보고 고민하던지 하자·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마침 음식이 나왔다·
연희는 반지 케이스가 한쪽에 나오도록 구도를 잡고 스테이크 사진을 찍었다·
SNS에 뭐라고 글을 남길지 안 봐도 이미 보이는 듯했다·
*
다음날 출근한 영훈이 점심 전 미팅을 소집했다·
당연히 Nodri Clare 인수와 관련된 회의라고 생각했던 팀원들은 영훈의 첫 마디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일 인천공항으로 인도 도로교통부차관이 방문할 거라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인도 도로교통부차관이 무슨 일로 방문하는 겁니까?”
박 부장의 물음에 연희가 대답했다·
“방금 주한 인도 대사관과 통화했는데요· 라마누잔 인도 도로교통부차관이 자국 건설 관계자들을 동행하고 인천공항을 둘러볼 예정이라고 해요· 이미 대사관을 통해 인천공항 관계자들에게 통보됐고 협조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인천공항을 둘러본다면 공항 건설 때문이겠네요? 음··· 인도가 신공항을 많이 건설할 거라는 이야기는 들은 적 있습니다·”
연희가 정보를 보탰다·
“정확히는 2024년까지 신공항을 100개 추가 건설한다는 계획이에요·”
“사이즈 어마어마하네·”
“인천공항과 싱가포르 창이공항도 둘러볼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무시무시한 프로젝트이긴 한데··· 상무님께서는 어떤 계획을 잡고 계시는 겁니까?”
영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Nodri Clare 인수만으로도 정신없는 와중에 들어온 정보라 그냥 넘길까도 생각해봤는데··· 봉선동 있잖아요·”
“네·”
“국내 아파트 건설로 꽤 많은 이익을 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세계적인 건설사는 국내에서 아파트만 지어서는 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HS건설은 작년만 해도 도급순위 39위였습니다· 봉선동 아파트 사업권을 따낸 것도 대단한 일이었죠· 얼마 전에 그런 의혹이 불거졌을 정도니까요·”
“맞습니다· 그런데 계속 아파트만 지을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저가 수주로 힘만 쏟고 손해 볼 상황만 아니면 HS건설 쪽에서 한번 얼쩡거려봐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얼쩡거려 본다는 말이죠?”
“공개 입찰을 하겠다고 나온 상황도 아니고 그냥 공항을 둘러보러 왔는데 적극적으로 우리가 한번 해보겠다고 나서는 것도 웃기니까요· 클럽에 예쁜 여자가 보이는데 그냥 춤만 추러 온 건지 아니면 남자도 만나러 온 건지 알아야 끝나고 소주 한잔 하자고 불러낼 거 아닙니까·”
“하하 맞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스타일이 어떤 건지 알면 더욱 좋겠지요·”
“그리고 아무리 찔러도 들어갈 구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면 인도 대사님이 우리한테 정보를 줬을까요?”
“일리가 있습니다·”
박병호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으니 정보를 줬을 텐데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포기하기는 아쉬울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얼쩡거려 볼까요?”
“HS건설에 구호준 실장이라고 있을 거예요· 지금도 실장일지는 모르겠는데 구도일 사장 동생입니다· 막내라 나이 차이가 많은··· 하여튼 그 사람이 능력 있다던데 부르죠·”
“구호준 실장이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일단 인도 쪽 라인 동원해서 말만 앞세우는 건지 진짜 신공항을 100개나 세우려는 건지 확인 좀 부탁드립니다·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되고 해외 건설사가 참여할 구석은 있는 건지 100개 만들 거라고 했으면 지금쯤 어디에 세울지 계획 정도는 발표하지 않았겠어요? 게다가 우선순위도 있을 테고·”
“알겠습니다· 바로 확보하겠습니다·”
“구호준 실장 바로 불러서 계획을 세워 봅시다· 비집고 들어갈 만한 구석이 있는지·”
“그런데 구호준 실장이라는 사람 능력이 괜찮은가요? 상대가 도로교통부 차관에다가 그 옆에 잘생기고 든든한 오빠들까지 같이 있을 텐데·”
박 부장이 말하는 잘생긴 오빠들은 자국 건설사를 말하는 거였다·
영훈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저도 잘 모릅니다· 벡텔에서 스카웃 하려고 했다고 하니 적어도 춤 하나는 기가 막히게 추지 않겠어요?”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났을 때 연희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데 영훈 씨 클럽 많이 다녀봤나 봐?”
“어? 아니··· 드라마에서 봤지·”
“진짜?”
“진짜라니까·”
연희는 찌릿한 눈빛을 남기고 회의실을 나갔다·
< 유혹의 기술(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