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혹의 기술(2) >
인도 라마누잔 도로교통부 차관이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당일 영훈을 비롯한 기획조정실 직원들은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적어도 점심 전에 공항에 도착해야 식사 후 공항 관계자들과 대화중인 라마누잔 일행과 얼굴이라도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구호준 실장은 이번 일이 생각보다 너무 큰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는지 아주 많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무조건 이거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가는 건 아니니까· 가볍게 갑시다·”
걱정하는 구호준 실장에게 영훈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했다·
“그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괜찮아요· 일단 준비한 것 좀 봅시다·”
“여기··· 일단 이 정도입니다·”
구호준 실장은 커다란 종이를 연달아 펼쳤다·
공항터미널을 디자인한 것으로 배치도 단면도 입면도 평면도 등 누가 보면 미리 공모전을 대비해 준비해놓은 것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언제 이런 걸 생각해뒀습니까?”
“사실 이거 제가 대학생 때 만들어둔 겁니다· 스페인에서 신공항 공모전이 있었거든요·”
“아쉽게도 탈락했나보군요·”
“아니요· 공모전에 안 나갔습니다· 혜성기업에 취업하기로 정하면서 공모전은 그냥 포기했거든요·”
“아··· 그럼 이게 몇 년 전에 만든 겁니까?”
“4년 전에 만든 겁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 만족할까요? 저야 당시에도 최선을 다해서 짜내긴 한 거지만 그래도····”
“어차피 이걸로 컨펌 받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말했듯이 저쪽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만 하려는 거니까· 한국 건설사를 끼워주겠다고 하면 그때부터 다시 제대로 만들면 됩니다·”
“그럼 다행입니다·”
오래전에 만들어둔 거라 이걸로 자신의 실력을 내세우기가 조금 부끄러웠던 것 같다·
그렇게 영훈은 구호준 실장과 박 부장 연희 그리고 몇 명의 기조실 직원들을 데리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늦지 않게 도착해서 지금쯤 둘러보고 있을 VIP라운지로 향하는데 그곳에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많은 관계자들이 모여 있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빨리했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익은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어?”
연희가 놀라 손을 들어 올렸는데 마침 그 사람이 고개를 돌리다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걸 보니 그쪽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게 확실했다·
“어떻게 여기에····”
“그러게요· 우명건설이 어떻게 알고 왔지?”
놀랍게도 라마누잔 차관과 조금 떨어져서 다소곳하게 기립해 있는 사람은 우명건설 주택영업본부장인 김창훈이었다·
봉선동에서 당시 현진건설에게 한 방 먹었던 그가 주택건설도 아닌 일에 왜 나타났을지····
영훈 일행이 급히 발걸음을 옮기며 라운지에 들어서니 중앙에 앉아 공항 관계자들과 한창 대화를 나누는 라마누잔 차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때 슬금슬금 다가오는 창훈이 연희에게 말을 붙였다·
“여기는 또 무슨 일이야?”
“그러는 너는 무슨 일인데?”
“설마 공항 건설을 따내보겠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해본적도 없잖아?”
“남이사 공항을 짓든 비행기를 만들든 신경 쓰지 마세요·”
“말이 안 되니까 그렇지·”
“봉선동 아파트 사업권은 그럼 처음부터 말이 됐고?”
연희가 비웃음을 담긴 눈빛으로 쏘아보자 창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게 고작 아파트 하나 짓는 거랑 비교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도급순위 39위였어 너네·”
“글쎄··· 세상 사람들이 다 성적순으로 행복하면 무슨 재미가 있니?”
“네가 잘 모르는구나? 사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기업 실적은 성적순으로 나올 수 있어·”
“이번에는 아닐 것 같은데?”
연희가 한쪽 눈을 찡긋한 순간 마침 라마누잔 차관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람이 영훈 일행에게 다가왔다·
“반가워요·”
“네·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연희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아미르 밧찬 주한인도대사였다·
주인도대사가 추천한 이유를 도착해서야 알았다·
이미 아미르 밧찬과 안면이 있음을 알기에 라마누잔 차관과 쉽게 인연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던 거다·
“최 상무 그대의 말을 항상 떠올리고는 합니다· 여기서 또 만나는군요· 나의 도움이 필요한가요?”
“물론입니다·”
연희가 통역해주자 영훈이 어설픈 영어로 대답했다·
아미르 밧찬은 당황하는 창훈을 두고 영훈 일행을 이끌고 라마누잔 차관에게 데려갔다·
아미르 밧찬과 귓속말로 잠시 대화를 나누던 라마누잔 차관은 영훈 일행과 악수를 하고는 말했다·
“훌륭한 인재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오늘은 약속된 일정이 있으니 언제 따로 시간을 잡도록 하는 게 어떨까요?”
“안 될 거 없죠·”
연희가 웃으며 제안을 받아들이자 차관의 수행원 중 한 명이 나섰다·
수행원은 상당히 아름다운 인도 여자였는데 그녀는 연희와 이후 일정과 관련된 대화를 주고받고는 영훈 일행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생뚱맞은 상황에 얼떨떨해하는데 갑자기 구호준 실장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게 아닌가?
박병호 부장이 황당해하며 물었다·
“뭡니까?”
“아··· 친구예요·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예쁘죠? 학교 다닐 때도 엄청 인기 많았어요·”
이때 돌아가는 상황이 마뜩잖았는지 김창훈이 영훈에게 다가와 말했다·
“잠시 이야기 좀 합시다·”
“미안한데 오늘은 좀 힘들고 언제 시간 나면 그때 하기로 하죠· 사람이 많아서 정신이 없네요·”
어차피 라마누잔 차관과 약속까지 잡은 이상 여기서 더 머물 이유는 없어졌다·
하지만 영훈 입장에서 머물 이유가 없을 뿐이지 우명건설 입장은 달랐다·
김창훈 상무는 급기야 자존심까지 버리고 영훈의 팔을 잡았다·
“거 이야기 좀 합시다· 그쪽도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일 테니까·”
영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3층에 커피숍 있던데 거기로 올라가시죠·”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우명건설 일행과 HS그룹 일행이 우르르 움직였다·
영훈은 움직이면서 구호준 실장에게 슬쩍 물었다·
“아까 그 여성분이랑 많이 친합니까?”
“카트리나요?”
“이름이 카트리나인가보죠? 인도식 이름 같지는 않은데·”
“혼혈입니다· 친구 생일파티에서 만나서 알게 됐는데 굉장히 똑똑해요· 친구도 많고 활달한 데다 같은 아시아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취향인 건지 한국인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습니다· 아마 ATS 때문이었을 거예요· 당시에는 ATS가 지금처럼 폭발적인 인기를 끌지 않았는데 K팝 팬이
라 다 꿰고 있을걸요?”
ATS는 영훈도 아는 세계적인 아이돌이다·
한류열풍의 선두주자라고 이름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로 세계적인 보이그룹이다·
“아··· ATS가 참 많은 일을 하네요·”
“그런 셈이죠·”
“어쨌든 젊은 나이에 저 자리까지 올랐으니 능력은 굉장하겠네요·”
“똑똑하긴 한데 같이 일해본 적이 없으니 능력이 어떤지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아마 저 자리까지 올라간 게 꼭 능력 때문이지는 않을 겁니다· 쟤네 집이 굉장히 부자거든요·”
이렇게 좋을 수가····
“아 그래요?”
“그게 좋은 건가요?”
구호준 실장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어왔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집에 돈이 많다는 건 그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거니까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여성과 구 실장님이 친하다는데 당연히 좋은 거 아닙니까?”
“아니 그런데··· 카트리나가 절 위해 그렇게 힘을 써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닙니다·”
“친분은 있다가도 없는 거고 없다가도 있는 거죠·”
“친분이 아니라 돈 아닌가요?”
의혹이 짙은 구 실장의 눈빛·
영훈은 웃으며 말했다·
“돈은 물과 같습니다· 움직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죠· 어떤 곳에서는 헤어졌다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다시 만납니다· 사람의 인연이 그와 같습니다·”
구 실장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HS그룹 실세 중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기획조정실 실장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훈은 그가 알아들었는지 신경 쓰지 않고 그를 지나쳤다·
“다 같이 토론할 것도 아니고 둘이서만 이야기합시다·”
“그러죠·”
김창훈 상무는 무거운 얼굴로 제안했고 영훈은 받아들였다·
양쪽의 일행이 두 편으로 갈라 모여 있는 와중에 창훈과 영훈만 커피 한 잔씩 들고 공항터미널이 한눈에 보이는 창가를 바라보며 섰다·
창훈은 커피를 홀짝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쉽사리 열지 못하는 느낌·
영훈은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창훈이 연희에게 결혼하자고 했던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한참을 그러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제법 준비를 많이 했네요· 주한인도대사를 엮어놨을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이번엔 힘들 겁니다·”
“경고하려고 대화하자고 한 겁니까?”
“유치하게 그런 걸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린 이곳 인천공항 건설에 참여한 건설사입니다· 이곳뿐만 아니라 양양 공항과 무안공항까지 우리가 지었습니다· 그간 쌓은 경험이 달라요·”
“그래서요? 설마 그래서 포기하라 그 말을 하려는 건 아닐 테죠?”
창훈은 잠시 주저하더니 말했다·
“손을 합칩시다·”
“손을 잡자고요?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요?”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게요· HS그룹 수완 있는 거· 우리는 경험과 인적 물적 자원이 풍부합니다· 당신들의 수완과 자본이 더해지면 우리는 인도가 건설하는 상당한 규모의 공항건설에 한 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수완뿐만 아니라 자본을 더했다·
그가 말하는 자본이 HS그룹이 가진 자금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HS그룹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신영금융그룹을 말하는 것이리라·
“컨소시엄을 구성하자는 거군요?”
“맞습니다·”
“으음····”
영훈이 고민하자 창훈이 채근하듯 말했다·
“이봐요 HS건설이 이제 좀 커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들 입장에선 고작 한국에 있는 중소형 건설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공사를 따낸다고 해도 지방 소도시에 지어질 소규모 공항을 따내거나 대형 국제공항 건설에 일부분 참여할 수 있으면 다행일 겁니다· 이건 그대들을 무시하
는 게 아니라 아주 객관적으로 평가한 거예요·”
“그럼 우명건설은요?”
“우리도 아마 대형 국제공항 건설의 한 프로젝트에 선정되는 정도일 뿐일 겁니다·”
“그럼 우리 둘이 손을 합치면요?”
“세 개의 회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한다면 PM(Project Management)까지 진출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안 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무려 100개가 넘는 공항을 지으려고 한다고요· 그걸 한 개의 회사가 전부 맡을 수 있겠어요? 우리가 하나 얻어가는 거·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죠?”
눈에 불을 켜고 열변을 토하는 그를 보고 차마 모른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고민해보겠습니다·”
“시간 오래 끌지 말아요· 그리고 우리끼리 경쟁해서 남 좋은 일 시키지 맙시다·”
“연락하죠·”
영훈은 그가 말하는 남 좋은 일이 도대체 뭔지 고민하며 일행들과 함께 공항을 빠져나왔다·
연희와 구 실장 그리고 박 부장과 같은 차를 타고 돌아올 때 연희가 물었다·
“창훈이가 뭐래요?”
“손을 합치잡니다· 컨소시엄을 구성하자고 하는데요?”
“갑자기요? 왜?”
“자잘한 공사 따내서 남 좋은 일 시키지 말고 PM을 해보자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대답은 구호준 실장이 했다·
“PM이요? Project Management인데 이게 쉽게 말하면 하나의 거대한 빌딩을 짓는다고 가정할 때 건물을 짓는 과정뿐만 아니라 토지 매입부터 건물의 설계 시공 감리까지 전반적인 사업을 총괄하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이건 세계적인 건축회사가 주로 하지 주어진 공사 받아먹기만 하
는 우리나라 건설사는····”
“못 하나요?”
“거의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상당한 경험이 필요한 일이니까요· 그래서 국내에서 건설된 초고층 빌딩들도 전부 PM은 외국 회사에서 맡은 겁니다· 삼전물산에서 지었다고 극찬받는 두바이 호텔 있죠? 그것도 다 외국회사가 PM 맡아서 삼전물산은 그냥 짓기만 한 거예요·”
“그럼 우리나라 건설사는 왜 PM을 안 합니까?”
“경험을 쌓을 곳이 없거든요· 주로 대형 프로젝트는 국가에서 발주를 주고 관리하는 데다가 해외에서 경험을 쌓으려고 하면 경험이 많은 해외건설사만 찾으니까 경험을 쌓고 싶어도 쌓을 데가 없는 겁니다·”
“흐음··· 그래서 이번 기회에 PM을 해보자는 건가?”
그런데 구 실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거짓말입니다· 컨소시엄은 몸 하나에 머리가 여러 개인 뱀이나 마찬가진데 그거 관리 안 됩니다· 아파트 하나 건설할 때도 엄청나게 남겨 먹는데 토지매입부터 설계 시공 감리까지 전부 총괄하는 PM이 얼마나 남겨 먹는 줄 아십니까? 사실상 전체 프로젝트 이익의 절반 이상 가져갑니
다· 시공 맡은 회사는 별로 가져가는 게 없어요· 앉아서 일거리만 주고 돈방석 앉는 그 일을 공평하게 나눈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아····”
그제야 영훈은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연희가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할 거예요?”
“합시다 그 컨소시엄·”
< 유혹의 기술(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