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혹의 기술(3) >
조수석에서 듣고 있던 박병호 부장이 물었다·
“우명을 제낄 방법이 있는 겁니까?”
“이제부터 찾아봐야죠·”
“예?”
“김창훈 상무의 말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우린 아직 규모도 작고 경험도 없으니까요· 인맥빨로 자그마한 공사 하나 맡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 고작 그거 하자고 우리가 이렇게 움직이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구 실장은 그게 아니었었냐는 눈빛이었지만 박 부장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요·”
“내일 차관쪽하고 미팅 잡고 나서 생각해보자고요· 아미르 밧찬 대사가 어느 정도나 우리를 도와줄지 모르는 상태인 데다가 우리는 아직 우명건설보다 정보가 많이 부족한 상태인 것 같으니 최대한 준비해봅시다· 그리고 구 실장님은 그 카트리나인가 하는 여자분하고 계속 연락해보시
고요· 가능하면 따로 약속을 잡아서라도 미팅할 수 있으면 하도록 하세요· 아 그리고 카트리나라는 여자 집안에 대해 전부 파악해서 보고서 올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아 카트리나 인스타 아이디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럴까요?”
구 실장은 자신의 핸드폰을 빠르게 몇 번 터치하고는 연희에게 넘겼다·
연희는 핸드폰을 받아들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와··· 집이 끝내주네·”
영훈이 고개를 그녀의 어깨에 붙이며 살펴보니 마치 궁전같은 저택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카트리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파란 눈동자에 웨이브진 머릿결과 뚜렷한 이목구비는 여배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는데 그녀 옆에 세워진 슈퍼카를 보니 구 실장이 부자라고 얘기한 것이 이해가 됐다·
연희는 빠르게 사진을 넘겼고 카트리나가 지내는 집과 그녀의 방 그리고 수많은 명품 사진을 홀린 듯이 훑어보고는 연신 저건 무엇이고 저건 무엇인데 내거랑 같은 거라는 식의 자랑 아닌 자랑을 곁들였다·
그러다 도저히 못 참겠는지 연희가 구 실장에게 물었다·
“도대체 뭐하는 집이에요?”
“저도 모릅니다· 안 물어봤거든요·”
“왜 안 물어봤어요? 안 궁금했어요?”
“아니 뭐··· 저랑 상관없는 남이니까요·”
“아까 눈빛 보니까 꽤 친해 보이던데요?”
“학교 다닐 때 제가 도움을 많이 주긴 했죠· 과제를 많이 도와줬거든요·”
구 실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구 실장님 진짜 인재였구나··· 잘 해볼 생각 없었어요?”
“아무리 예뻐도 종교의 벽을 못 넘겠습니다· 전 한국 여자가 좋아요· 그리고 아마 약혼자도 있을걸요?”
연희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구 실장에게 다시 핸드폰을 넘겼다·
그리고 슬쩍 영훈의 다리를 툭 건드리고는 작게 속삭였다·
“창훈이가 쓸데없이 시비 걸고 그러지 않았어? 분명 우리 결혼 이야기 들어갔을 텐데?”
“아니· 시비 걸거나 유치한 짓을 하지는 않았어· 그런데 아는 것 같더라· SNS에 그렇게 자랑했는데 모를 리가 없겠지·”
영훈에게 반지를 받고 태그에 떡하니 프로포즈 반지라고 써놨으니 연희 주변은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온갖 곳에서 축하 문자와 전화가 쏟아졌고 누구랑 하느냐 언제 하느냐 어디서 할거냐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느냐 등등 그날 연희는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잘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 연희에게 청혼까지 했던 그가 당연히 이 정보를 모를 리 있겠는가·
“철들었나? 예전 같았으면 절대 가만히 있을 애가 아닌데··· 어쨌든 시커먼 속셈을 감추고 있을 거야· 뻔해· 자기네가 협상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가 우리는 시공사 역할만 하고 자기네가 PM을 하겠다고 나서겠지· 지금쯤 어떻게 영훈 씨랑 나를 한 방 먹여줄까 고심하고 있을걸?”
“그럴지도 모르지·”
“불안해· 봉선동에서도 크게 데인데다가 현진중공업에 투자 들어갔다가 지금까지 물려서 허덕인대· 마이너스 20%라고 하던가? 이를 갈고 있을거야·”
“그래서 더 재미있을 수도 있지·”
영훈은 웃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본사에 도착해서 업무를 이어가다 퇴근 무렵 영훈은 을지로의 한 유명 낙지볶음 가게로 향했다·
형준과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인데 항상 블루문에서만 보는 게 지겹고 맛없는 술만 홀짝이는 것도 싫어서 식당으로 불러냈다·
시뻘건 낙지볶음이 맛있게 익어가는 것에 영훈이 군침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형준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요즘 연락도 안 하더라?”
“뭐 급한 일 있었습니까?”
“그건 아니었지만 비서만 떨렁 두 번이나 보내놓고 연락도 없는 건 너무한거 아니야?”
“이거 왜 이러세요? 여자가 나가서 더 좋아했던 게 아니구요?”
“뭘 더 좋아해····”
형준이 시선을 쓰윽 피한다·
영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 나온 김에 물어볼게요· 어땠습니까? 마음에 들었어요?”
“내 스타일 아니야· 너무 뻣뻣해·”
형준은 입술을 씰룩이며 별로였다는 티를 팍팍 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지는 못해도 사람의 운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영훈이다·
민희가 형준을 싫어할 수는 있어도 형준이 민희를 싫어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상무님과의 자리에 나가지 말도록 지시할게요·”
“뭘 그렇게까지 해? 일이잖아·”
“그때는 내가 바빠서 할 수 없이 보낸 거지만 앞으로 그렇게 바쁠 일도 없을 것 같으니까요·”
형준은 콧잔등을 만지작거리더니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크흠··· 아니 뭐 꼭 싫다는 건 아니고····”
“아니고요?”
“그런데 네 비서 성격이 원래 그렇게 쌀쌀맞냐?”
“쌀쌀맞은 게 아니라 고분고분하지 않으니까 괜히 심통나서 그런 거 아닙니까?”
형준은 인상을 쓰다가 물었다·
“이거 먼저 물어보자· 나한테 왜 소개시켜 준 거야? 만나보라고 한 이유가 있을 거잖아·”
“솔직히 상무님이 어떤 여자를 만나든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내 인생도 아니고 남의 인생에 여자나 남자를 소개시켜줘서 나중에 원망 듣기도 싫고요· 그런데 상무님은 어찌 됐든 우리와 같이 가게 될 파트너 아닙니까? 신영금융을 무사히 잘 물려받아서 같이 롱런했으면 좋겠는데 괜
히 이상한 여자 만나서 고생할까 봐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내가 무슨 이상한 여자를 만나?”
“아버지한테 당했던 거 벌써 잊었습니까? 얼마나 지났다고?”
형준은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 깔았다·
“그때는 진지한 만남이 아니라 그냥 즐기려고 만난 거야·”
“싫다고 하면 굳이 권하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말했듯이 나중에 괜한 원망 듣기 싫으니까·”
“그래서 네 비서는 확실한 여자다 그거야? 그런데 난 좀 그래· 결국 네 사람이잖아· 어떻게 보면 네 사람을 쁘락치로 심어놓겠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건 인정합니다·”
“왜 또 쿨하게 인정하지? 불안하게?”
“맞는 말이니까요· 그런데 제가 굳이 사람을 심어가며 상무님에 대해 알아야 할 무언가가 있을까요? 그냥 다 알 것 같은데····”
형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씨발··· 기분 더러운데 반박할 수가 없네·”
“상무님은 어떤 여자 만날 겁니까?”
“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어떤 여자를 만날 거냐니?”
“알기 쉽게 이지선다로 하죠· 집안 좋은 여자? 아니면 그냥 예쁜 여자?”
형준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말했다·
“당연히 집안이지· 예쁜 여자는 지금까지 숱하게 만났어· 지금은 배경이 중요하니까· 안 그래도 몇몇 곳에서 만나보라고 연락 온다니까·”
“그럴 것 같았습니다· 상무님에게 좋은 배경은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여자의 배경 굉장히 중요하긴 합니다· 그 여자가 가지고 올 엄청난 자본과 힘이 욕심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예요·”
“그런데 왜?”
“잘 생각하세요· 배경은 그 여자의 것이에요· 상무님의 것이 아닙니다· 언제고 이혼하면 다시 떨어져 나갈 힘이고 돈입니다·”
“그럼 네가 소개해준 그 여자는?”
“민희 씨가 좋다고 한 것도 아닌데 너무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 같아서 조금 그렇긴 합니다만····”
“그건 감안하고 들을게·”
“아마 민희 씨가 상무님 옆에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녀는 눈치와 상황판단이 빠르거든요· 그냥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면 본능적으로 거짓인지 아닌지 잘 캐치합니다· 천부적으로····”
“귀신이야?”
“그냥 촉이 뛰어난 겁니다· 사람은 타고날 때부터 다 다른 재능을 타고 납니다· 귀가 예민한 사람이 있고 손이 발달한 사람이 있죠· 말을 유창하게 잘하는 사람이 있고 계산에 밝은 사람이 있습니다· 민희 씨는 말투와 표정 몸짓 등을 가지고 본능적으로 잘 캐치하는 편인 겁니다·”
“귀신이네· 그런데 왜 비서나 하고 있대?”
이게 잘 풀려서 비서를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잘 안 풀려서 비서를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문서나 숫자로 드러나는 재능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는 그저 주변에서 쟤 눈치 빠르다 정도로 표현됐을 거고 자신은 그게 엄청난 재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너는 그걸 알아봤다 이 말이야?”
“네 저 사람 잘 보는 거 아시잖아요·”
“···졸라 재수 없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나는 욕했는데 왜 지가 칭찬으로 바꾸는 거야?”
형준은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며 낙지를 흡입했다·
“그건 그렇고 회사채는 다음 주에 발행 예정입니다· 4천억 소화 가능하시다고 한 거 변함없죠?”
“응 그건 틀림없어·”
“그리고 우리가 지금 인도에서 뭐 하나 하려고 합니다·”
형준은 낙지를 씹으며 영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너희는 뭘 이렇게 자꾸 벌려? 적당히 해· 이제 해주조선해양 돌아가기 시작했고 HS관광도 이제 돈 벌어다 주기 시작했어· 7천억 끌어다 또 회사 하나 인수한다면서 또 무슨 회사를 인수하려고? 부루마블 하냐? 회사경영이 게임이야?”
“성격 참 급하시네· 회사를 인수한다는 게 아니라 인도에서 앞으로 대규모 공항 건설 사업을 진행하고 있답니다·”
“공항? 그래 들어봤어· 졸라 많이 짓는다는데?”
“우리는 규모도 작고 경험도 많지 않으니까 우명건설에서 우리랑 신영이랑 셋이서 같이 손잡고 컨소시엄을 구성하자고 제안했어요·”
“거기에 왜 금융사를 낀다고?”
“Project Management를 따내려고 하는데····”
“PM을 한다고? 우명이?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따내려고? 그거 못 따낼 텐데?”
“어떻게 한번 비벼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시죠?”
“이거야 뭐 돈이 많이 나가는 것도 아니고··· 거들어줄 수 있기는 한데 정확한 사업 내용을 알아야지· 금융사가 필요 없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PM이면 토지까지 전부 맡으려나? 하여튼 사업 내용 정해지면 그때 말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요즘 집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어 살얼음판이긴 한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 건지 이게 익숙해지니까 또 살만해· 눈 딱 감고 아버지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려고 계속 노력하다 보니까 이제는 나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말이 나오더라고· 할아버지도 집에서는 별말 없으시고· 좋아·”
“잘됐네요· 그런데 긴장 늦추지 마세요·”
“왜? 뭐 또 있어?”
“그런 건 아니지만 쉽게 물러날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건 알지만 이제 더 뭘 하겠어? 넌 할아버지가 아예 손을 놓을 거라고 했지만 은근 내 편 들어주고 있는 게 아니면 이렇게 됐겠어? 그리고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몇몇 이사진까지 포섭해놨어· 준비 철저하다고·”
형준은 불안한 가운데서도 자신감을 드러냈다·
공포에 익숙해지다 보니 이제 여유를 찾은 듯했다·
형준이 가진 특유의 허세가 있기는 했지만 마냥 두려워 벌벌 떨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잘 살펴보세요· 방향을 아예 바꿀 수도 있습니다·”
“방향을 어떻게 바꿔?”
“원래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죠·”
“어?”
“그룹 내 질서를 바꾸려 할지도 모릅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분이니까요·”
< 유혹의 기술(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