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혹의 기술(4) >
형준은 집으로 오는 내내 오만가지 생각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영훈은 분명 허튼 이야기를 하는 놈이 아니었다·
그놈이 경고하는 일이라면 일단 아무리 가능성이 낮더라도 대비는 해야 했다·
그런데 이건 예상을 벗어나는 전개였고 자신의 손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집에 도착한 형준은 마침 저녁을 마치고 담소를 나누며 과일을 먹는 가족들을 볼 수 있었다·
“식사는 하고 오니?”
어머니가 과일이라도 먹으라는 것처럼 포크를 내밀며 물었다·
형준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먹었어요· 과일은 됐어요· 속이 부대껴서····”
“뭘 먹었는데 부대껴?”
“낙지볶음을 먹었거든요· 그리고 옷도 안 갈아입었어요·”
“얘! 너 옷 갈아입고 씻는데 한세월이야· 일단 앉아· 매운 거 먹었으면 과일 먹고 속 달래야 해· 안 그럼 내일 아침부터 지옥이야· 얼른·”
형준이 할 수 없이 포크를 집어 들고 자리에 앉으니 이세준 부회장이 말했다·
“술은 안 먹은 걸 보면 회식은 아니었겠고?”
“네····”
어머니가 바로 끼어들었다·
“누구야? 혹시 여자 만났니?”
“네?”
“너 빨리 말해· 너 만나자고 집 대문부터 버스정류장까지 줄 섰어· 아버님 말씀 아시지? 이상한 여자 만나고 다닐거면 빨리 제대로 된 여자 만나라고····”
“이상한 여자 아니에요·”
형준이 말을 끊자 어머니는 화들짝 놀랐다·
“그럼 여자는 맞는 거네? 어떤 여잔데? 집안은 어떻고? 우리가 아는 집안이니?”
부정하려던 형준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버지를 보며 생각을 바꾸었다·
여자에 환장하고 다녔던 자신이 일에 몰두하며 그룹내에서 영향력을 키워가려는 모습이 아버지에게는 더 위협적일 수 있다는 게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아니 그냥··· 집안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에요·”
“이상한 애 만나지 말라니까!”
“이상한 애 아니에요· 얼마나 똑똑한데?”
“뭐하는 앤데?”
“HS그룹 기획조정실 상무 비서예요·”
“비서? 너 그게 말이 되니?”
어머니는 비서라는 말에 기겁을 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룹 경영진 치고 비서 한번 안 건드려 본 사람 없다는게 재벌들 생리였으니까·
“HS그룹 기조실 상무 나랑 친합니다· 그리고 HS그룹 외동딸이랑 결혼할 사이고요· 절대 비서 건드리거나 할 놈 아니고 그 여자도 기가 엄청 세요· 아마 어머니도 못 당할걸요?”
“그래? 데리고 와 보든가·”
“안 돼요·”
“왜 안 돼?”
“아직 사귀는 사이 아니에요·”
“뭐야? 너 요새 애들 한다는 그··· 썸인가? 그런 거 하는 거니?”
“요즘 젊은 사람들 다 그렇게 만나요·”
“허··· 알았다· 그 썸인가 하는거 오래 하지 마· 빨리 정리하고 데리고 와· 내가 보고 결정할 거니까·”
“아 네· 그러세요·”
형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민희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보다 일단 아버지의 눈을 벗어나는 게 중요했으니까·
그래서 의미심장하게 노려보는 어머니의 눈길을 무시했다·
*
인천 송도에는 한옥으로 된 호텔이 있다·
고풍스러운 디자인과 정갈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외국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말에 영훈은 차관 일행과의 약속을 한옥 호텔 식당으로 예약했다·
당연하게도 박병호 부장과 연희 그리고 구호준 실장이 미팅에 동행했다·
“이야··· 좋네·”
호텔에 도착해서 둘러보니 감탄사가 나올 만큼 좋았다·
저녁 무렵이라 은은한 조명이 호텔을 비추는데 굉장히 멋있고 아름다웠다·
“여기 음식이 아주 좋습니다· 저도 몇 번 미팅해봤는데 어지간한 한정식보다는 훨씬 낫더라고요· 가시죠·”
박 부장이 너스레를 떨며 식당으로 앞장섰다·
미리 예약한 대형 룸에 조금 앉아 있으니 곧바로 차관 일행이 도착했다·
라마누잔 차관 일행에는 아미르 밧찬 주한 인도대사와 몇 명의 수행원이 함께 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카트리나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HS물산 기획조정실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영훈이 미리 준비했던 영어로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냥 고개만 숙였다가 혹시나 몰라 손을 내미는데 다행스럽게도 일행 전부와 악수를 할 수 있었다·
종교적으로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카트리나까지도 악수에 거리낌이 없었다·
일행들이 서로 각자 자신을 소개하고 자리에 앉으니 묘하게 구호준 실장과 카트리나가 마주 보는 형태가 됐다·
박병호 부장이 구 실장과 카트리나가 미리 아는 사이였다고 이것도 인연이라는 식으로 아이스 브레이킹하며 분위기를 이끌며 식사를 시작했다·
중간중간에 음식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여 서서히 긴장을 풀고 있는데 자연산 송이구이와 생선필렛을 해치운 라마누잔 차관이 박 부장을 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인도의 경제성장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을 만큼 눈부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중국의 그늘에 가려 있지만 우리는 언제고 중국을 넘어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아직 많은 게 부족합니다· 경제성장률은 6%에 달하지만 인프라는 많이 부족해요· 앞으로 많은 부분에서 인도는
변화할 겁니다· 우리의 야심을 당신들도 알고 있겠죠·”
“그렇습니다·”
박 부장은 대답했고 연희는 옆에서 영훈에게 열심히 통역했다·
“이런 기회를 놓치기 힘들다고 생각할 거라는 것 이해합니다· 하지만 외부에 보이는 것처럼 돈을 퍼부어가며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아직 많은 게 부족하니까요· 신공항 백 개 건설은 우리 정부의 강력한 의중이 반영됐지만 막상 그에 투입되는 자금은 고작 1조 루피(한화 약 16조 원)에
불과합니다· 인천공항 한 곳을 건설하는 데만 지금까지 7천억 루피 이상이 들어갔다고 들었어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많은 이익을 남기지 못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 그 부분 때문에 고민이 되긴 했었다·
100개의 공항이라고 하면 엄청난 규모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막상 뜯어보면 국제 공항급 규모는 몇 군데 없었으니까·
혹시나 돈 몇 푼 안 되는 지방 공항 건설을 맡게 될 것 같으면 망설임 없이 발을 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김창훈 상무의 PM 제안이 없었다면 말이다·
박 부장이 대답 대신 영훈을 돌아보았고 통역을 다 전해 들은 영훈이 입을 열었다·
“한국과 인도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지금보다 더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HS그룹은 전 세계에 원자재 식품 철강 석유제품 등을 거래할 수 있는 무역망을 갖추고 있습니다· 상당한 규모의 건설장비 생산업체와 호텔 세계적인 조선 회사도 소유하고 있습니
다· 그렇다고 우리 회사가 한국 최고라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영훈은 HS그룹에 현진기계를 슬쩍 끼워 넣었다·
외부에서 볼 때에는 현진중공업 계열과 한 뿌리로 보일 테니 같은 가족이라고 생각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다양한 면을 보라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HS그룹보다 훨씬 더 크고 대단한 기업들도 많습니다만 우리는 더 다양하고 깊게 동반자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들이 원하는 게 뭡니까?”
“우리는 우명건설 그리고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금융그룹인 신영금융그룹과 컨소시엄을 맺고 부지면적 천만 제곱미터 이상 국제공항 프로젝트를 맡아보고자 합니다·”
라마누잔 차관은 깜짝 놀랐다·
“그 정도 규모를 원한다는 건 조금 의외군요· 미안하지만 국내 여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내 건설사를 밀어줄 수밖에 없어요·”
“딱 한 곳이면 됩니다· 100개나 되는 공항 건설 모두를 우리가 맡겠다는 게 아닙니다· 단 한 곳의 공항을 부지매입부터 설계 시공사 선정 환경관리 등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끝내겠습니다·”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겠다는 건가요? 오오··· 그건····”
차관이 고개를 흔들며 부정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그런데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아미르 밧찬 주한 인도대사가 차관에게 속삭였다·
“한국 건설회사의 시공능력은 다들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명건설은 세계적인 프로젝트도 해냈던 능력 있는 업체이기도 하지요· 어쩌면 더 적은 비용으로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예산에서 얼마나 더 요구하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 차관님도 알지 않습니까·”
라마누잔 차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사를 하다 보면 기존에 예상했던 금액에 딱 맞추어 끝내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특히 설계나 시공능력과는 별개로 부정부패가 만연한 곳이면 이런 상황이 상당히 흔하다고 볼 수 있었다·
눈먼 돈·
세금을 보는 기업인들의 관점은 한국이나 외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물론 해외건설사에 공사를 맡긴다고 해도 부정부패가 사라지는 건 절대 아니다·
방식이 바뀌는 것일 뿐·
어찌 보면 그게 그렇게 중요한 부분일까 생각할 수 있는데 라마누잔 차관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미미하게 움직이고는 다시 수저를 놀렸다·
디저트까지 마무리한 뒤 이어진 대화는 지지부진했다·
라마누잔 차관은 애매한 모습을 보였고 아미르 밧찬 대사는 더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박병호 부장과 구호준 실장의 열정적인 브리핑으로 HS건설을 알렸지만 PM을 해보겠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쉽사리 긍정적인 내색을 하지 못했다·
결국 한 시간 더 이어진 대화에도 큰 소득을 내지 못한 채 미팅은 마무리되고 말았다·
허탈한 박병호 부장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PM을 넘겨주는 건 많이 부담스러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실망하기는 이른데 아마 우명건설이 나름대로 노력할 겁니다·”
영훈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의미가 없습니다· 우명건설이 일을 해결하면 대장이 되는 거 아닙니까?”
박 부장은 영훈이 현실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상무님 꿈은 크게 가지는 게 좋은 것처럼 일도 최대한 목표를 높게 잡는 게 좋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건설사는 아직 그만한 경험이 없습니다· 이럴 때 우명건설을 앞세워서 경험을 쌓는 건 수익 창출보다 더 값진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일리 있는 말씀이네요· 그런데 아직 끝난 상황도 아닌데 벌써부터 우명건설 아래에서 주는 공사를 받아먹겠다는 마음가짐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차관 일행의 귀국이 내일입니다· 인도로 돌아가고 나면 기회가 없습니다·”
“아직 비행기 안 탔습니다·”
영훈은 그렇게 말하면서 구 실장에게 물었다·
“연락해봤어요?”
“네· 그런데 과연 올지····”
“올 겁니다· 아마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으니까 돌아가셔도 됩니다·”
이 상황에 가란다고 누가 돌아갈 수 있을까·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을 알자 박 부장도 더는 뭐라 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고 연희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누가 올 거라는 거예요?”
“카트리나에게 연락해보라고 했어·”
“그 부잣집 딸? 그런데 이 상황을 뒤집을 만큼 큰 힘이 있을까?”
“모르지·”
영훈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그녀는 그에게 무슨 생각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렇게 한 시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카트리나가 들어왔다·
그녀는 구 실장에게 살짝 눈인사를 해 보이고는 자리에 앉더니 말했다·
“나를 왜 보자고 했어요?”
“우리 HS그룹은 당신과 아주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영훈의 말에 놀란 사람은 카트리나뿐만이 아니었다·
박 부장이나 구 실장 그리고 통역한 연희까지 영훈을 돌아볼 정도였다·
“뭘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가요?”
“당신과 우리 구호준 실장이 같은 학교였다는 말에 우리는 당신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당신의 집안을 파악해낼 수 없었어요·”
구호준 실장이 인스타 주소를 알려줄 때만 해도 그녀의 집안을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됐다·
그런데 막상 알아보려고 파보기 시작하니 도통 알아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인도 사람이고 어머니는 미국 사람인데 어느 곳에서도 어머니와 같이 찍은 사진이 없었다·
SNS에 나온 그 휘황찬란한 집을 알아보니 집주인이 인도에서 엄청난 부자인 건 맞는데 그 사람의 자식은 카트리나가 아니었다·
구 실장은 그때부터 당황했지만 영훈은 이제 그녀에게 신경 쓰지 말고 이번 프로젝트에 집중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오늘 카트리나와 악수하고 나서야 그녀를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생년월일을 알아냈던 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집안이 뭐가 중요하죠? 내가 부자였으면 했나요?”
“그건 아닙니다· 당신이 부자건 아니건 MIT 공대를 졸업한 인재니까요·”
구 실장이 졸업한 대학이 바로 MIT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알아주는 건축학과를 나왔으니 벡텔에서 구 실장과 그 친구들을 스카웃 하려 했었다는 말은 아마 가짜가 아니었을 거다·
“그럼요?”
“우리는 인도에서 많은 사업을 진행하고 싶고 당신이 다리가 되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럴 능력이 있다고 보는 건가요?”
“네·”
“무슨 근거로 그러시죠?”
“사실상 이번에 입국한 일행의 가장 실세는 라마누잔 차관이 아니라 바로 당신 아닌가요?”
카트리나는 연희의 통역을 듣고 난 뒤 크게 놀랐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그 표정·
“우리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면 물러나겠습니다· 하지만 아니라고는 하지 말아요· 다 알고 있으니까· 일어날까요?”
“생각할 시간을··· 아니 좋아요· 대신 단둘이서 대화하고 싶어요· 통역할 분은 있어도 좋아요·”
이렇게 되자 자연스럽게 박 부장과 구 실장이 자리를 떴다·
그 사이 연희가 영훈에게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거에요?”
“귀한 사람이 될 여자입니다·”
“네?”
“옛날로 따지면 왕비가 될 사주라고 할까요?”
“집안도 별거 없다면서요?”
“옛날에도 빈이 중전의 자리를 차지한 적이 있었습니다· 애첩이 계속 첩의 자리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죠·”
< 유혹의 기술(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