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진··· 회사원의 모든 것(1) >
인도 공항 건설 프로젝트 건은 그렇게 넘어갔다·
이제 어떤 결과가 나오든 기다리기만 하면 될 터였다·
박병호 부장은 이왕 이렇게 된 거 Nodri Clare 인수만 마무리되면 인도로 직접 날아가 확실하게 마무리를 하겠다고 했지만 영훈이 말렸다·
박 부장이 날아가서 결정할 수 있을 정도라면 그가 가지 않더라도 어차피 HS그룹에 손을 들어 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HS그룹에 손을 들어 주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낫다고 여겼다·
구도일 사장이 가진 재운을 생각하면 계약이 안 된 게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수도 있을 테니까·
어쩌면 라마누잔 차관이 인천공항으로 오게 된 일련의 과정이 전부 구도일 사장의 재운 덕일 수 있다고 보았다·
송은채 회장은 요 며칠간 진행된 일련의 사항을 영훈에게 보고 받고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물었다·
“잘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라는 거잖아?”
“맞습니다·”
“그래 지원해야 할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오늘 출발이지?”
“맞습니다·”
본래 인도 건보다 앞서 처리해야 할 일이 Nodri Clare 인수였다·
중국에 있는 주췬이 가진 쇼핑 플랫폼에서 2/4분기에 넣을 명품 브랜드 품목을 알려달라고 전해왔기 때문이다·
Nodri Clare를 인수하지 못한다면 굳이 그 플랫폼에 넣을 이유가 없다·
시급히 Nodri Clare 인수를 결정짓고 중국 진출을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했다·
“가서 너무 일만 하지 말고 간김에 하루나 이틀 정도 쉬고 와· 지금까지 일만 했잖아·”
“그래도 되겠습니까?”
“급한 일 없잖아· 선거는 끝났고 주우진 의원이 벌린 일은 사그러들었으니까· 참 재주도 좋아 그치?”
“야당의 힘이 작용한 결과일 겁니다· 그래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게 앞으로 조재민 의원과 저희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을 겁니다·”
송 회장이 피식 웃었다·
“최 상무도 순진한 구석이 있네·”
“순진한 생각인가요?”
“소위 쌍팔년도 시절에는 정치인들이 가진 권력으로 재벌들을 찍어 눌렀어· 나도 어렸을 때 보고 경험했었고·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못해· 돈이 곧 권력이 돼버렸거든· 조 의원을 건들면 곤란하겠지· 그런데 우리를 건들면 그건 곧 정치적으로 기업을 죽이는 일이야· 수만 명의 일자리가
위태로워지는데 쉽게 건들 수 있겠어? 법만 잘 지키고 살면 돼· 우리 최 상무가 또 그런 쪽은 절대 눈길도 안 주잖아·”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그런 사람에게 그렇다고 하는 거지· 잘 다녀오고· 지금까지 고생했으니까 편히 쉬다 와·”
“네·”
“프로포즈 반지 예쁘더라· 연희가 골랐니?”
영훈이 쑥스럽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네· 제가 그 쪽으로 안목이 없는 걸 아는지 반지 호수랑 브랜드 모델명까지 콕 찍어 주더라구요·”
“똑똑한 거야· 남자 헷갈리게 해서 피곤하게 하지 않잖아· 걔도 언제부터였는지 성격이 많이 바뀐 것 같아· 예전이었으면 주변 사람 엄청 피곤하게 했을 텐데 최 상무를 만나서 그런 걸까?”
“하하···”
영훈이 머쓱하게 웃으니 송 회장이 일어섰다·
“바쁠 테니 얼른 출발해· 연희 고게 또 최 상무 오래 붙들었다고 뭐라 하겠다·”
“아직 시간 여유 있습니다·”
“면세점 들를 거 아니야· 연희가 그냥 지나치겠어? 알아서 선물도 좀 사주고 그래·”
“알겠습니다·”
*
“다녀오세요·”
영훈이 기획조정실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비추고 나가자 직원들의 얼굴에 한줄기 미소가 그려졌다·
기조실의 장인 최영훈 상무도 떠나고 회장의 딸과 박병호 부장까지 모두 짐을 싸서 영국으로 떠났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는 거다·
아무리 최영훈 상무가 눈치주지 않고 임연희가 회장 딸로 갑질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같은 공간에서 숨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압박이 되는건 어쩔 수 없다·
여기에 고등학교 때 학생주임처럼 깐깐한 박병호 부장까지 자리를 비웠으니 직원들의 얼굴에 꽃이 피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민희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영훈과 같이 있을 때는 시키지 않은 일이라도 알아서 척척 해내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누구보다 노력한 그녀였다·
혹시나 영어가 필요한 순간이 올까봐 입사 후에 끊었던 영어학원까지 추가로 다니는 그녀였다·
출장을 떠나며 영훈이 추가로 지시한 일도 없었고 다녀올 때까지 쉬고 있으라는 말에 그녀는 오래간만에 쇼핑몰 사이트를 둘러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데 톡이 울렸다·
[안 바쁘면 커피 한잔 어때?]
자원개발팀 오지환 부장이었다·
[어디로 갈까요?]
[내가 맛있는 커피집 알아놨는데 거기서 볼까?]
[좋아요·]
톡을 마친 민희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자연히 직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기조실 직원 중에 유난히 말이 많고 발이 넓은 김문원 대리가 슬쩍 물어온다·
“어디 가요?”
“네· 잠시 외부에 다녀올게요·”
“바쁘시네?”
“대리님은 안 바쁘세요?”
“우리야 항상 바쁘죠· 조금 있으면 점심인데 먹고 들어오겠네요?”
“아마도 그럴 것 같은데요?”
“그렇구나··· 오늘 어르신들도 없고 회식이나 할까 하는데 같이 한잔 할래요?”
“그래요·”
민희의 승낙이 의외였는지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나왔다·
“오~ 알겠습니다·”
기획조정실에 여자는 둘 뿐이었다·
그런데 연희는 회장님의 딸인데다가 기조실 최영훈 상무와 결혼한다는 소문이 쫘악 퍼져 있으니 아무리 미인이라고 해도 감히 말 한번 붙이기 힘든 게 사실이다·
반면 민희는 평소 일 외적으로는 다른 사원들과 대화를 자주 나누지 않았고 항상 바빴기에 다른 의미로 말을 붙이지 못했는데 회식에 참여한다니 좋아하는 거였다·
그렇게 사무실을 나온 민희는 을지로에서 조금 떨어진 충무로의 한 카페로 들어섰다·
“여기!”
오지환 부장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들고 있다가 민희가 가까이오자 미리 시켜놓은 음료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요즘 젊은 여자들이 이거 좋아 하더라고· 괜히 음료 시킨다고 말 길어지고 어색할까봐 미리 시켜놨어·”
“센스 있으시네요·”
“내가 그래서 이 외모에 장가갔잖아· 우리 마누라 엄청 예뻐· 다 이 센스 덕분이지· 최 상무님 출장 가셧다던데 맞아?”
“네· 아까 출발하셨어요·”
“며칠 걸리시겠네?”
“일주일은 안 넘으실 거예요·”
“Nodri Clare 때문인가?”
“네·”
오 부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그렇게 사업성이 좋아? 영업팀에 물어보니까 매출이 좋긴 하지만 인수를 결정지을 만큼 뭐가 확실히 보이는 건 아니라던데?”
이미 회사 임원들은 Nodri Clare 인수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재무팀에서 회사채 발행을 준비하고 있는데 임원들이 모를 수 없었던 거다·
“상무님은 이유 없는 사업 진행은 하지 않으십니다·”
“당연하지· 고작 입사 1년도 안 된 쌩 신입이 상무를 달았는데 우리와 같은 사고를 가지고 있을 리 없잖아· 난 그 이유가 궁금한 거지·”
“중국을 바라보고 계세요·”
“중국?”
“네·”
“인수 후에 중국에 진출한다? 일리가 없는 건 아닌데··· 쉽지 않은데? 지금까지 중국에 들어갔던 수많은 사업들 중에 잘된 거 몇 없어· 중국인들이 영화 보기 시작하면 난리 날 거라고 극장 사업 진출했던 CS그룹이 엄청나게 손해봤고 중국인들이 커피 마시기 시작하면 또 난리 날 거라고
들어갔던 커피브랜드들 박살 났지· 그나마 화장품이 좀 힘을 받았는데 그것도 이제 복제품들 다 돌고 있고 중국 브랜드 성장률이 상당해서 이제 고작 몇 년 안 남았다는 말이 돌아· 역사가 있는 명품도 아니고 신규 브랜드가 중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그 부분은 이미 고려하고 계십니다·”
“고려했는데도 인수를 한다고? 7천억이나 들여서? 뭐야? 우리가 모르는···”
오 부장은 거기까지 말하다 뭔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혹시 중국이 참여하는 건가?”
“맞습니다·”
“중국에서 핸들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거네?”
“네·”
“힘이 상당한 사람인가?”
“쇼핑 플랫폼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이에요·”
“하··· 그런 사람하고 이미 입을 맞추고 진행하는 거였어? 와··· 완전히 바보 됐네? 지금 이것 때문에 아래에서 말들이 많았던 거 알아?”
“알고 있습니다·”
회사가 확장에만 열을 올리다 큰일 난다는 말이 이미 직원들 사이에 돌고 있는 걸 민희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반론 한번 하지않고 그냥 흘려들었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니까·
오지환 부장은 한참 동안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생각이 다 있으신 거였네· 이래서 뱁새는 황새의 행동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면 안 되는 거라니까· 커피 두고 뭐해? 제사 지내는 것도 아니고 마셔· 마셔·”
“훗 네· 잘 마실게요·”
민희가 쪼로록 커피를 빨며 한참 맛을 음미할 때 오지환 부장이 슬쩍 운을 뗐다·
“그럼 Nodri Clare 인수 마무리되면 중국이랑 협력하는데 주력하는 건가?”
“아마도 그렇게 될 거예요·”
“그럼 상무님도 계속 중국 오가시느라 바쁘시겠네?”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왜?”
“이미 이야기는 어느 정도 끝낸 상태에서 진행하시는 거라 많아 봐야 한두 번?”
“그럼 실무쪽에서 진행하겠다는 거네? 기조실만 가지고 되나?”
민희는 미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아마 많은 업무가 발생할 것 같지는 않아요·”
“흐음··· 그래?”
은근히 낙담하는 오 부장을 보며 그녀가 실망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상무님이 Nodri Clare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장 우선순위로 두시는 건 해주조선해양 건이에요·”
“그건 이미 마무리됐잖아?”
“인수는 마무리됐지만 군산조선소 일감이 적어서 계속 신경을 쓰고 계시거든요· 얼마 전에 니폰유센과 노르웨이 UACC에게 수주를 받게 된 것도 상무님의 그런 의중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였어요·”
“그건 이해가 가· 그런데 거기서 또 수주를 받으려고 하신다고? 해주조선해양은 뭐하고? 걔네들도 노는 거 아니잖아? 일감 부족하면 거제에서 만들 거 군산으로 돌릴 텐데? 그리고 아직 수주잔량도 꽤 남은 걸로 알고 있고”
“더 깊은 내용은 제 권한 밖이에요·”
알려줄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말에 오 부장은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알려줄 수 없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이유라는 것이고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라면 더더욱 흥미가 동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상무님이 추가 수주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는 거네?”
“네·”
“좋아· 이거 커피 한 잔으로 너무 비싼 정보를 들은 것 같아서 양심에 걸리네·”
“아니에요· 전에 도와주신 것도 있으니까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내가 그거 알아내려고 고생 꽤나 했어· 아유~ 말도 마· 고등학교 동창부터 처남 친구까지 달달 볶았다니까· 더 필요한 건 없고?”
“네· 필요한 게 있다면 말씀드릴게요·”
“그래 언제든지·”
“아 만약 상무님에게 조금 더 깊은 인상을 주고 싶으시다면요·”
“응?”
“니폰유센을 알아보세요·”
“니폰유센? 왜?”
“상무님이 관심이 많으시거든요·”
“··· 오케이· 접수했어· 아유~ 우리 김민희 씨 너무 야무져· 누가 데려갈지 참 부럽네· 어떻게··· 남자친구 없으면 내가 소개팅 좀 해줄까? 내 아는 동생이 검사야· 솔로·”
“괜찮습니다·”
“하긴 중매 잘못 서면 뺨이 석대라지? 민희 씨는 똑똑하니까 알아서 잘 할 거야· 그럼 나 먼저 일어설 테니까 천천히 마시고 나와·”
“들어가세요·”
오지환 부장은 커피숍을 나서며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나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너 재작년에 러시아에 중고차 4천대 날랐을 때 니폰유센 선박 이용했지? 그래· 그때 누가 핸들링했어? 걔 나한테 전화 좀 하라고 해라· 이유는 묻지 말고· 오케이·”
전화를 끊은 오 부장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나 지금 회사 복귀하니까 모든 일 올스톱하고 니폰유센에 관해서 파악해놔· 매출실적은 당연한 거고 재무 상황 위주로 파악해· 특히 회사채 누가 얼마만큼 가지고 있는지 세세하게 파악해· 새끼··· 점심은 도시락으로 때워· 28분 정도 후에 들어간다·”
전화를 끊은 그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미미하게 퍼지는 그의 미소와 불끈 쥔 주먹은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떠한 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 승진··· 회사원의 모든 것(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