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라이튼 해변에서(1) >
영국에 도착해서 보니 사실상 영훈이 해야할 일은 많지 않았다·
이미 기조실 직원들이 Nodri Clare 영국 본사와의 계약서에 문제가 없다는 걸 서울에서 확인하고 온 상태였기 때문에 인사하고 도장 찍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었던 거였다·
인수가격이야 오기 전에 확정된 일이었고 만약 본사에서 그 가격을 높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영훈도 굳이 깎을 생각이 없었다·
인수가격을 깎고 싶지가 않아서가 아니라 괜히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가 인수계약이 틀어질까 염려해서였다·
Nodri Clare의 경영자이자 디자이너인 노드리 클레어는 자신이 제안한 인수가격을 깎지 않고 계약을 진행해준 한국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면서 계약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갈등이 없으니 할 일이 없어진 영훈은 이틀만에 계약서를 들고 서울로 날아간 박 부장을 떠나보내고 꿀 같은 휴식을 보낼 수 있었다·
영국 남부 브라이튼의 그림 같은 해변에 도착한 영훈과 연희는 아름다운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음식점에 자리를 잡았다·
연희는 그림같은 대서양 해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열두 살이었나? 열세 살이었나? 어릴 때 여기에 온 적이 있어· 엄마랑 같이 왔었는데 그때 엄마랑 아빠랑 엄청 크게 싸웠었거든· 지금도 기억나· 엄마는 미술관에 가고 싶어했는데 아빠는 귀찮다면서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며 쉬다가 그 다음날 스페인으로 가자고 하셨어· 스페인 음식이
그렇게 맛있다면서·”
“부럽네·”
“후후··· 맞아· 남들이 듣기에는 호강에 겨운 이야기야· 그런데 난 지금도 그 당시가 기억에 생생해· 그 별것 아닌 다툼이 감정싸움이 되었고 당시 아빠가 내뱉은 내 가슴을 헤집은 말들은 아직도 아물지 못하고 나를 괴롭히고 있거든· 동생을 죽인 년· 재수 없는 년··· 웃기게도 아빠는 할아
버지의 외동아들인데도 그리 신뢰를 받지 못하셨대· 아빠가 젊었을 때 손대는 것마다 좋은 결과를 못 보셨다고··· 아빠는 그게 다 내 탓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재수 없어서 일을 망친다고· 칫··· 우리 할아버지 진짜 냉정하지 않아? 그깟 일 좀 못하면 어떻다고···”
“···”
영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말을 해야 그녀에게 위로가 될지 몰라서였다·
연희는 담담하게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곳 브라이튼에서 크게 싸운 그 날 내 유학이 결정됐어· 엄마는 내가 아빠 곁에서 정상적으로 자랄 수 없다는 걸 알았고 난 그 어린 나이에 엄마 곁을 떠나야 한다는 걸 인정해야 했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엄청 슬프진 않았어· 왜 어릴 때 엄마와 떨어져야 한다고 하면 막 울어야 하잖아?
눈물이 나긴 했는데 회사에서 나온 직원과 비행기에 올랐을 땐 눈물이 싹 마르는 거 있지? 이것도 다 운명이었던 걸까?”
“맞아· 멀어져야 살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야· 계속 가까이 살았다면 더 불행했을 거야·”
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을 거야· 아빠가 저렇게 쓰러지고 나서 솔직히 전혀 슬프지 않았어· 할아버지가 쓰러졌을 때도 당황스러웠지 슬픈 마음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 같아·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해봤어· 내가 나쁜 년이어서일까? 아니면 이게 정상인 걸까? 영훈 씨는 내가 못돼서라고 생각하고
있지?”
“왜 그렇게 생각해?”
“처음 나한테 했던 말 아직도 기억해· 타고 나기를 오만하게 타고나서 자기보다 못하다 싶은 인물과는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고 사람을 가려 사귄다고· 그리고 본인보다 못한 사람이면 무시하기 일쑤라 친구 선후배 형제자매를 지배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 좋은 사람을 만나기 어렵
고 결혼하더라도 불행할 거라고 했었지·”
“미안해·”
“아니야· 미안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야· 그냥 그 말이 내 머리를 때렸었어· 영훈 씨가 했던 말 꼭 내 속을 훔쳐보는 말이라 놀랐었고 더 놀란 건 내가 아빠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였어·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아빠를 내가 따라하고 있었다는 걸 그때 연수원에서 알았던 거지·”
연희는 마침 점원이 가져다 준 칵테일을 한모금 마시곤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웃겨· 왜 드라마 보면 ‘나를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그러잖아· 영훈 씨가 한 그 악담 같은 이야기를 들으니까 영훈 씨가 계속 남자로 보인 거 있지?”
“욕 먹는 거 좋아하는 스타일이구나?”
“히히··· 그런가? 아니야· 그게 아니야· 영훈 씨한테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반대로 어쩌면 내 결혼생활이 그렇게 불행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연희는 은연중에 알고 있었던 거다·
아버지로부터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자신의 결혼생활 또한 그렇게 될 거라는 걸·
“그래?”
“응 영훈 씨 옆에 있으면 그 이상할 정도로 대단한 능력 덕분에 나에게 닥쳐올 불행이 다 비켜갈 것 같았어· 그리고 내 예상이 맞았지·”
영훈도 칵테일을 한모금 마셨다·
달콤하고 씁쓸한 음료가 목구멍을 화끈하게 달구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난 내 사주를 잊었어· 내 미래도 어떻게 될지 몰라· 사주에 나무가 없는 여자를 만나야 하는 건 아직 기억이 나는데···”
연희가 말을 끊었다·
“내 사주에 나무가 없어?”
“응 만약 나무가 있었다면 엄청 고민했을 거야·”
“후후 우린 정말 인연인가 봐·”
“그랬으면 좋겠어·”
“우리는 행복할 거야· 내 감이 그래· 이곳 바다를 보니까 오기를 잘한 것 같아· 그때 꼬였던 내 인생이 이제 다시 자리 잡는 것 같아·”
연희는 바다내음을 맡는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키고 내뱉었다·
가슴에 올려진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그녀의 얼굴은 평온하고 후련해 보였다·
그녀는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영훈 씨 이야기를 해줘· 듣고 싶어·”
영훈은 칵테일 잔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나를 키워준 스님이 계셨어· 내 인생을 구원해준 분이셔·”
“구원해줬다고?”
“네 생각과는 달리 본래 난 주변을 불행하게 만들 운명을 타고 났어· 스님은 한눈에 그걸 알아보셨던 거지· 한눈에 내가 한 니라를 위태롭게 할 정도의 인물이라고 보셨던 거야·”
“진짜?”
연희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내 어릴 때의 생활은 사투와 같았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산속에 나를 꽁꽁 묶어놓은 스님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렇게 태어나게 한 부모님에 대한 원망까지 내 마음은 온통 칠흑같이 검었던 것 같아· 그 생각이 조금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기가 막히게도 사주를 배우면서였어· 점쟁이가
되지 않기 위해 배운 건데··· 그게 운명인 거지· 운명을 알고 나니까 분노도 원망도 다 사그라들었어· 그때부터 절의 생활을 받아들였어·”
“불자가 된 거야?”
“아니 일종의 템플스테이 생활이었어· 스님은 내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으셨고 난 절을 내 놀이터처럼 돌아다녔어· 다 좋았는데 딱 하나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게 아쉬웠어· 스님은 내가 꼭 원하면 다닐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그때는 나도 내가 무서워서 안 가겠다고 했지· 대학
도 포기하고 게임만 했는데 나이 서른 넘어서 이렇게 잘 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네·”
“그러게 이렇게 예쁜 여자랑 결혼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거야·”
“하하하 맞아· 정말 그랬어·”
영훈은 문득 처음 취업했던 대부업체를 떠올렸다·
막 취업했을 때만 해도 어떡해서든 잘 적응해서 사회의 일원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또 다른 두려움 때문에 대부업체를 떠나서 대기업에 취업하게 되다니 사람의 인생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영훈 씨는 좋은 CEO가 될 수 있을 거야·”
연희의 말에 영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CEO? 내가 CEO가 되길 바래?”
“그럼? 안 하려고 했어? 엄마는 나이도 많고 내가 결혼하면 천천히 나한테 회사를 물려주려고 할 텐데 그럼 그게 영훈 씨 것도 되잖아·”
“음···”
“왜? 그게 문제 될 것 같아?”
“그게 아니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 눈앞에 보이는 일을 열심히 하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난 목표가 없었던 것 같아·”
처음엔 그저 인정받는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었는데 그걸 이루고 나니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부터 목표를 가져보는 건 어때?”
“글쎄 무서워서 그래도 될지 모르겠네· 목표를 가진다는 게 어쩌면 욕심을 부린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때 옆에서 누가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왔나요?”
영국 특유의 발음으로 말을 건네는 이는 넉넉한 덩치에 머리는 반쯤 벗겨진 장년의 남자였다·
그의 맞은 편에는 이제 중학교쯤 다닐 것 같은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딱 봐도 부녀지간이 분명해 보였다·
영어를 잘하는 연희가 대답했다·
“맞아요· 단번에 맞히다니 혹시 한국을 잘 아세요?”
“물론이에요· 쏜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아··· 저도 좋아해요·”
대한민국의 최고 스포츠스타인 쏜을 거론한 그는 한참동안 쏜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일장연설을 해댔다·
연희가 간간히 옆에서 통역했고 영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자 그는 신이 난 듯 열변을 토하다가 이내 물었다·
“그냥 친구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연인 사이인가요?”
“맞아요· 영국에 일하러 왔다가 일을 마치고 휴양지에서 쉬는 중이에요· 이곳은 참 조용하고 아름다운 지역이라 한국에 가서도 또 오고 싶어질 것 같아요·”
“브라이튼은 환상적인 곳이죠· 아름다운 해변 친절한 사람들 그리고 끝내주는 축구팀이 있는 곳이니까요·”
“그렇군요·”
연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계속 화제를 축구로 끌고 갈 듯한 남자를 보며 서서히 지쳐갔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영훈이 끼어들었다·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이즈 그레이트 팀·”
엄지를 치켜 세우는 영훈을 보며 남자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맞아요· 좋은 팀이에요· 빅 6에게는 많이 부족하지만 우리 지역 사람들은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자부심을 느끼고 있죠·”
연희는 통역해주면서 의외라는 듯 말을 덧붙였다·
“해외 축구도 즐겨 봤어요?”
“즐겨 보는 정도까지는 아니야· 가끔 재방을 하면 보는 수준이지· 절은 새벽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밤늦게 축구 보면 다음날 일어나질 못해· 대신 축구 게임을 좋아했지·”
이때 남자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번 시즌은 강등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예요· 강등 당하게 되면 지역 주민들은 크게 실망할 겁니다·”
시즌이 마무리 되어 가는 프리미어 리그는 이제 고작 세 경기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다·
애초 강등권과는 거리가 멀었던 브라이튼은 시즌 막바지 10연패라는 악몽 같은 흐름을 바꾸기 위해 감독을 교체하는 강수를 두었다·
세 경기 중에 최소 두 경기는 이겨야 남을 수 있다고 했던가?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새로운 감독이 온다고 하던데요? 쉐인 랄프 감독 맞나요?”
“알고 있군요· 좋은 감독이니까 아마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 겁니다·”
“잘 되길 바랄게요·”
영훈은 그렇게 말하고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궁금했던 연희가 물었다·
“왜?”
“아··· 그 새로 온다는 감독 있잖아·”
“응·”
“아마 팀을 더 망쳐 놓을 거야·”
“어떻게 알아?”
“얼굴에 덕이 없거든·”
“서양사람들 관상도 보는 거야?”
“다 맞는 건 아닌데 그래도 특징적인 면은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 같아· 서양 사람들이 다 코가 크다고 해서 그 모양이 비슷한 건 아니거든· 나도 이게 맞을까 생각해봤는데 찬찬히 살펴보면 그냥 보여·”
“와··· 그럼 이제 브라이튼 앤··· 하여튼 그 팀은 떨어지는 거야?”
“그럴걸? 덕이 부족한 건 둘째치고 기가 부족해· 원래 뭐든지 흐름이라는 게 중요하거든· 게으른 사람이 한순간에 부지런한 사람으로 변하려면 평생 느껴본 적 없는 강력한 충격이 필요하지· 부모님이 쓰러진다든가 사랑하던 여자가 떠난다든가 뭐 그런··· 회사도 팀도 마찬가지인 거야·
무너지려는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아주 강한 기를 가진 사람이 리더가 돼야 하는데 침침한 눈을 보면 기가 약한 사람이야·”
“정말?”
“그리고 턱이 약해서 아랫사람을 다스리지도 못할 거고 천창이 약해서 명예운도 없어· 좋은 감독이 되지 못할 거고 아마 브라이튼은 강등 당할 거야·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거지·”
고작 해봐야 남의 나라 축구팀이기에 영훈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옆에서 갑자기 어설픈 한국말이 들려왔다·
“진짜로 브라이튼이 강등 당할 거라고 생각해요?”
영훈이나 연희나 둘 다 깜짝 놀라 고개를 홱 돌리니 남자의 딸로 보이는 여자애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어? 한국말··· 할 줄 아니?”
“전 ATS 팬이에요· 한국말 배웠어요· 진짜 쉐인 랄프가 그런 감독이라고 생각해요?”
영훈은 마음이 아팠다·
좋아하는 팀이 떨어진다는 말이 어린 팬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테니·
“아니야· 그냥 우리끼리 추측한 거야· 원래 영국에서도 내기 많이 하잖아· 그것처럼 아마추어가 아무것도 모르고 한 말이니까 신경쓰지 마· 브라이튼은 분명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여자아이는 흔들리는 눈으로 영훈을 보았다·
그리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천천히 한국어를 내뱉었다·
“우리 아빠는 브라이튼의 구단주예요· 강등은 안 돼요·”
“어?”
“아까 한 말 진짜인가요?”
“아니야· 그냥 허풍이었어· 여기 언니한테 잘 보이려고 허풍 친 거야· 허풍 그러니까 거짓말인 거지· 진짜야·”
“거짓말·”
“응?”
“아빠! 저 사람이 우리 팀 강등 당할 거래·”
영훈은 입이 방정이라는 말을 다시금 실감했다·
< 브라이튼 해변에서(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