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풍의 눈(1) >
5년 전이었다·
평소 말 없고 공부만 열심히 하던 둘째 녀석이 그날 울면서 집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아내의 재촉에 그 녀석이 실수를 저질렀다고 했다·
그리고 들이닥친 경찰·
성폭행이란다·
어려서부터 사고 한 번 안치고 공부만 하던 녀석이 성폭행이라니····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있을까·
남들은 가고 싶어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서울대 의대에 합격한 녀석이 평소 짝사랑하던 여자아이에게 실수를 저질렀다고 했다·
암 실수지·
실수가 아니면 말이 되질 않았다·
여자아이는 계속 스토킹을 해왔다고 주장했지만 공부만 하느라 여자를 대할 줄 모르는 녀석이라서 그런 것뿐이었다·
문제는 실수건 아니건 간에 이대로 학교에 입학했다가 유죄로 판결 나는 순간 아들녀석은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 절망스러운 상황에 담당검사와 만남을 주선해준 사람이 바로 무진중공업 정호균 회장이었다·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평소 스토킹 짓을 했다는 여자의 진술은 아들녀석이 사랑하는 마음을 과하게 표현한 것으로 바뀌었고 적당한 선에서 합의까지 이루어졌다·
물론 합의 과정에서 돈이 조금 깨지긴 했지만 자식의 앞날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국 정호균 회장이 부장검사까지 움직여주며 신경 써준 이후 사건은 유야무야 덮였고 그 여학생은 이사까지 갔다고 했다·
성적도 그리 좋지 못했고 집도 넉넉하지 않았다고 하니 평소 행실이 어땠을지 짐작이 갔다·
아내는 남의 아들 인생 조질 뻔하게 했다고 그 여학생을 욕했지만 그래도 사회적 지위가 있고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자신은 아들이나 그 여학생이나 둘 다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 이후로 정 회장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무진중공업과의 합병에 최선을 다했지만 갑자기 상황이 틀어지며 합병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그렇기에 마음 한구석에 항상 은혜를 갚아야 할 시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유 오셨습니까·”
김상중 부사장이 벌떡 일어났고 정호균 회장은 인자한 얼굴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날씨가 좋아· 오면서 길에 꽃 핀 거 봤나? 눈이 즐거워· 내가 이래서 봄을 좋아해·”
“하하 회장님은 지금도 감성이 충만하시네요·”
“이게 다 늙어서 그래· 젊었을 적에는 어디 꽃이 눈에 들어오나? 여자만 눈에 들어왔지·”
“식사가 회장님 입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입맛이 없어서 6천 원짜리 순대국밥이나 30만 원짜리 코스 요리나 다 똑같아· 어디 식사가 중요한가? 대화가 중요한 거지·”
김상중 부사장은 기껏 불러놓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말로 들렸다·
김 부사장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표정을 바로 했다·
바뀐 분위기에 정 회장이 그를 빤히 바라본다·
“아무래도 해주에서 크루즈선을 시작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크루즈선? 하하하! 진짜?”
정호균 회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래 전부터 노려왔던 해주조선해양을 이상한(?) 놈들에게 놔주고 얼마나 분노를 삭였던가·
그런데 갑자기 크루즈 선이라니····
제발 다시 망해달라고 고사도 지내기 전에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격이었다·
그런데 김상중 부사장은 정 회장의 웃음에도 미소를 짓지 않았다·
“그게··· 무작정 덤벼드는 모양새가 아닙니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크루즈선 한번 만들어보겠다고 주제도 모르게 무작정 덤벼드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제야 정 회장이 얼굴의 미소를 지웠다·
“자세히 말해봐·”
“영국 최대 크루즈선사인 큐나드 크루즈사가 협력을 약속했다고 합니다· 아직 계약에 관한 사항을 협의중인데 10만 톤 규모 프리미엄급 라인을 발주 준비중이고 퀸 엘리자베스호에 기술자 파견을 허용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10만 톤? 그럼 8 9천억 하겠네?”
“그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큐나드 크루즈사가 왜 그런 짓을 해?”
“이것 역시 HS물산 기조실에서 움직인 것으로 정확히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오전 임원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논의했을 뿐입니다·”
“그렇구만· 알겠네· 내가 참 우리 김상중 부사장한테 고마운 게 많아· 전에 합병 때도 많이 고마웠는데 이제는 남의 식구가 됐는데도 이렇게 날 생각해주니 얼마나 고마워?”
“회장님께서 배려해주신 게 있는데 당연한 일입니다·”
“내 걱정 말고 식사나 들자고· 아 아들녀석은 공부 잘하고 있지?”
“네· 사고 안 치고 열심히 공부중입니다·”
“그래 사내새끼가 한 번 정도는 실수할 수도 있는 거야· 어깨 펴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의사 되라고 해·”
“녀석도 회장님에 대해서 항상 감사함을 품고 있습니다· 언제고 회장님께 꼭 은혜를 갚고 싶다고 합니다·”
“그냥 열심히 살아· 그게 날 위하는 거야· 어서 드세·”
그렇게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고 정호균 회장은 해주조선해양의 크루즈선 수주에 대해 더 물어보지 않았다·
김상중 부회장은 의아했지만 회장이 이미 관심을 꺼버린 이후라 여기서 더 깊게 들어갈 수도 없었다·
어쨌든 자신이 할 일은 다 했으니 김 부사장은 조용히 식사를 마칠 뿐이었다·
“오늘 즐거웠네· 다음에 또 보세·”
“영광이었습니다·”
그렇게 김상중 부사장의 어깨를 두드려준 정호균 회장은 수행비서와 함께 음식점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차에는 수행비서 말고도 정 회장의 아들인 무진건설기계 정근호 사장이 앉아 있었다·
“넌 여기서 뭐해?”
“근처에서 사람 좀 만나고 있다가 아버지가 여기에서 식사하신다고 해서 왔습니다·”
“기사는?”
“밖에 있기는 한데 따로 갈까요?”
“됐다· 가는 김에 같이 들어가자·”
“해주 김상중 부사장 만났다면서요? 그 인간이 밥값을 하던가요?”
아들의 물음에 정 회장이 말했다·
“해주조선해양이 크루즈를 건드린다고 하더구나·”
“크루즈선을요?”
“정신 빠진 놈··· 고작 그것 때문에 헐레벌떡 달려와 일러바치는 꼴이라니····”
“그래도 기특하지 않습니까?”
“이거 이거··· 너는 여태 뭘 배웠냐? 일러바치면 뭐가 달라져?”
“네?”
“근호야 사람은 말이다·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면 성과를 들고 와야 하는 법이다· 사촌이 땅을 사는 걸 보면 배가 아파할 주인한테 사촌이 땅을 샀다고 일러바치기만 하면 주인이 종놈을 예뻐할 것 같으냐? 너는? 너는 예뻐할 거냐?”
“아닙니다·”
“그럼 네가 종놈이라면 어찌할 거냐?”
“사촌이 땅을 못 사게 하든 주인에게 사촌이 산 땅보다 더 좋은 땅을 사게 하든 해야 합니다·”
“그렇다· 그게 바로 종놈이 주인 눈에 드는 방법이다· 공부만 할 줄 아는 놈은 한계가 분명한 법이야· 그래서 공부를 잘하는 놈보다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을 옆에 둬야 하는 거지· 숫자만 가지고 주물럭거리는 놈이 아니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그런데 누가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인지 판단을 못 하니··· 쯧쯧쯧····”
혀를 차는 정 회장의 태도에 아들인 정근호 사장이 어깨를 움츠렸다·
“죄송합니다·”
“내가 이번에 절실하게 느꼈다· 밥값을 하는 놈이 하나도 없어· 너도 밥값해!”
“예·”
정 사장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자 불만스럽다는 티를 팍팍 풍기던 정 회장이 나직이 말했다·
“해주조선해양이 정말 크루즈선을 욕심내고 있는지 계속 주시해· 조금 모자란 종놈이라도 티내지 말고 신경 써주고·”
“김상중 부사장 말입니까?”
“그래 이제 네가 관리해라· 밥값 못하는 놈 밥값하게 만드는 것도 다 능력이다· 애비가 못했으니 너라도 해야 회사가 흔들리지 않는 게야·”
“네· 그리고 해주조선해양 좀 흔들어보겠습니다· 이 상황에 크루즈까지 건드린다고 하면 주가가 볼 만할 겁니다·”
“흥! 주제도 모르는 놈들····”
정호균 회장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
긴 휴가를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영훈은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회장실로 불려갔다·
“잘 쉬다 오라니까 무슨 일을 그렇게 해와?”
“일하려고 마음먹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말 몇 마디 한 게 전부인데요·”
“누구는 그 말 몇 마디 못해서 될 일도 그르치는데 우리 최 상무는 아무것도 아닌 걸 참 잘도 엮어내네·”
“Nodri Clare 인수는 어떻게 됐습니까?”
“최 상무 영국에 있을 때 검토 끝냈고 다음주에 자금 집행할 거야· 오자마자 또 중국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괜찮겠어?”
“제가 처리해야 할 일이니까요· 괜찮습니다·”
“크루즈선은 뭐야? 진짜 할 거야?”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해주조선해양쪽 사람들이랑 얘기를 더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해주조선 송 사장이 나한테 하소연을 하던데? 크루즈 할 거면 돈 쥐어달라고· Nodri Clare 인수할 돈 자기네한테 주면 잘 할 수 있다고 하더라니까·”
“하하 그랬나요?”
“최소 현금 5천억은 쥐고 있어야 마음 놓고 할 수 있다고 하소연을 하더라구· 5천억도 부족하대· 아이고··· 돈 들어갈 데 천지다· 그치?”
“그럼 하지 말까요?”
“우리 최 상무가 돈 벌어다 줄 거잖아· 아니야?”
“전 능력 없습니다· 능력 있는 직원들이 Nodri Clare 대박낼 겁니다·”
“능력이 없긴··· 어쨌든 그래야 할 것 같아· 내부에서도 지금 불안하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초기에 무수한 기업을 빨아들이면서 확장했던 몇몇 기업들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너무 마음 쓰지 마· 지금껏 최 상무가 했던 모든 일이 최 상무만 좋자고 했던 일들이
아니었던 것 아니까· 군산조선소는 특히 그랬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 중국에서 잘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응 그리고 결혼식 말이야·”
“네? 네····”
살짝 긴장하는 영훈을 보고 송 회장이 미소 지었다·
“긴장하긴? 최 상무 생각해서 가족끼리만 오붓하게 할까 생각했는데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 꽁꽁 싸매고 결혼시키는 것도 그렇고 외부에서 보기에도 조금 그래·”
“그럼요· 당연합니다·”
“결혼식 전부터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결혼식이 많이 불편할 수 있을 거야· 이해 좀 해줘·”
부모님 자리도 비어있을 테고 친구들도 없으며 부를 친척도 없었다·
당연히 주변에서 수군거릴 테고 귀에 들려오기라도 하면 기분이 안 나쁠 수는 없을 거라고 걱정하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영훈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쓰이지 않았다·
“전 괜찮습니다· 오히려 회장님이 난처하실 게 걱정이네요·”
“나? 후후··· 고작 그런 걸로 내가 난처해할까· 연희는 그 성격에 욱할지도 모르니 최 상무가 잘 돌봐줘·”
“알겠습니다·”
“그럼 고생하고·”
영훈은 그렇게 송 회장과의 만남을 마치고 기획조정실로 돌아오니 박병호 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 한국 온 사이에 또 일을 만드셨다구요?”
“그렇게 됐네요·”
“준비해야 할 게 있습니까?”
“이건 해주조선해양과 의논해야 할 일이라서요· 부장님은 Nodri Clare 인수만 신경써주시면 됩니다· 회의는 10분 뒤에 하죠· 민희 씨는 나 좀 보구요·”
박 부장에게 회의가 있음을 알리고 들어오니 민희가 바로 따라 들어온다·
“별 일 없었습니까?”
민희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실장님이 안 계실 때 종로 리츠칼튼을 지나가다가 거기 직원이 저를 알아봐서 호텔에서 식사를 하게 됐었습니다·”
“그래요? 맛있게 했어요?”
“음··· 거기서 신영금융 이형준 실장 어머니를 만나게 됐습니다·”
영훈은 고개를 갸웃하다 말했다·
“계속해봐요·”
“이형준 상무 어머니는 비슷한 또래의 여자분과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어떻게 심상치 않았는데요?”
“불륜 같았습니다·”
“흐음····”
이형준 상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어머니가 지금도 바람을 피고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참 세상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세준 부회장인데····
안쓰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민희는 조금 주저하다가 말했다·
“전에 이형준 상무님을 한번 만나보라고 하셨던 거····”
“아 미안해요· 만약 민희 씨가 싫다고 하면 나 때문에 억지로 만나지 않아도 돼요· 난 신경 쓰지 말아요·”
“그게 아니라 혹시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인지 정확히 알 수 있을까 해서요·”
영훈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
“다른 의미는 없어요· 정말 잘 어울려 보였을 뿐이니까· 다만 민희 씨는 남들이 느끼는 부담감과 중압감을 오히려 즐길 것 같았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유는 없어요 그냥 느낌이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알고 있잖아요?”
“네?”
“만약 아예 만나지 않겠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고민하고 있는 걸 보니까 민희 씨라면 어느 정도 계획을 세워놨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녀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네· 맞습니다·”
< 태풍의 눈(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