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풍의 눈(2) >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어떤 계획이냐고 묻지 않으시는 건가요?”
“내가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일이니까요· 다만 한 가지는 명심하세요· 이세준 부회장이나 그 사모나 둘 다 보통 사람들은 아닙니다· 민희 씨의 상상력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조심해야 할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요·”
민희는 평온한 표정이 되어 실장실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영훈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본디 궁합이란 서로 간에 부족한 점을 보완해줄 수 있는 관계를 좋은 궁합이라 한다·
한쪽이 거칠면 한쪽이 부드러워야 하고 한쪽이 튕겨내면 한쪽이 받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래갈 수 없고 화합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형준 상무와 민희는 궁합이 상당히 좋은 편에 속했다·
더욱이 이형준 상무는 양기가 강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을 지녔다·
지금이야 단단히 목줄을 채우고 있으니 친절하고 합리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목줄이 해체되는 순간 언제 어느 순간 달려들어 목을 물려고 할지 모른다·
위기에서 구해준 은혜가 있으니 갚아야 한다?
그런 건 평범한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념일 뿐이다·
상황이 변하면 그런 은혜 따위는 머릿속에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에 민희를 곁에 두고 싶었다·
민희가 가진 음울한 카리스마는 그에게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갈 것이고 그녀는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놓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이형준 상무 어머니의 추태를 보고 마음을 접지 않은 건 오히려 그게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계획?
안 들어봐도 뻔하다·
문제는 그게 좋은 쪽으로 가게 될지 아니면 더 안 좋은 쪽으로 가게 될지가 보이지 않았다·
민희야 결혼운이 들어왔고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것 정도가 보일 뿐이고 이 상무는 별다른 흉살이 없다는 게 그나마 안도하게 한다는 정도?
어쨌거나 앞으로 지켜보는 재미는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
[HS물산 패션 브랜드 Nodri Clare 인수한다]
[7천억 상당의 대규모 인수 또다시 성공시킨 HS물산]
[HS물산 호텔 건설 조선에 이어 패션까지?]
[여성 CEO 송은채 회장 재계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다]
[신생브랜드 Nodri Clare 과연 7천억 가치 있을까?]
[빌린 돈으로 쇼핑하는 HS물산 저러다 STS 꼴 날라]
HS물산이 Nodri Clare를 인수한 이후 또 며칠 간 기사가 오르내렸다·
예상치 못한 인수에 초기에는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부정적인 여론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특히 한때 조선업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보였으나 마구잡이로 인수합병을 진행하며 덩치를 키우다 한순간에 몰락해버린 STS그룹을 거론하는 언론사도 있을 정도였다·
아직 한국에 매장을 두 곳밖에 열지 않은 브랜드를 무려 7천억이라는 거액으로 인수한 결정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HS물산의 주가는 연일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Nodri Clare 인수 확정 기사가 뜨고 나서 근 일주일간 20%나 하락하며 시장에서 어떤 시선으로 이번 인수를 보고 있는지 알게 해주었다·
여기서 또 터진 기사·
[해주조선해양 10만 톤급 초호화 크루즈 수주 임박]
[크루즈선 건조 이번에는 과연····]
기사들은 기대 반 우려 반이었지만 주식시장의 반응은 한쪽으로 급격히 치우쳐 있었다·
무려 장중에 마이너스 15%까지 빠졌다가 조금 회복해 12%가 빠진 채로 마감했으니까·
각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해주조선해양의 목표가를 일제히 하향 조정했고 투자의견을 매수에서 중립으로 변경했다·
“야 이 새끼들 이거 완전 골로 가겠는데?”
김창훈 상무가 태블릿을 바라보며 비서이자 친구인 윤희찬 부장에게 말했다·
그간 영 죽상을 하고 다니던 그가 오랜만에 생기발랄한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윤 부장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좋아?”
“싫을 게 있겠어? 해주조선해양에 3조 원 들어갔어· 이거 휘청이는 순간 HS그룹 넘어가는 거야· 바~로 STS꼴 나는 거지· 그 기자 참 내 생각이랑 똑같더라고· 인사이트가 있어·”
“그게 인사이트가 있는 거냐? 그리고 크루즈선 수주 결정된 것도 아니잖아? 공시에 올라온 것도 아니고·”
“인마 이거 감 완전히 떨어졌네· 야 생각을 해봐· 주가가 15% 급락하고 있는데 홍보팀에서 왜 가만히 있는 건데? 지금 한창 계약이 목전에 다가왔으니까 부정을 못 하는 거지·”
창훈의 주장에 윤 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난 그게 이상해·”
“뭐가?”
“주가가 저렇게 떨어질 걸 몰랐겠어? 지금 회사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런데 네 말대로 크루즈선을 수주한다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제 발등 찍는 일인 걸 경영진이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
“알아도 크루즈선이라니까 눈이 뒤집혔겠지·”
“단순히 눈이 뒤집혔다고 하기에는 상황이 안 좋아· 노드린지 뭐시긴지 패션 브랜드도 7천억이나 들여서 샀으니 통장에 현금도 많지 않을 텐데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어·”
“겁나냐?”
윤 부장은 창훈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넌 안 나냐?”
“왜? 내가 왜 겁나야 하는데?”
“봉선동 때 한번 데어 봤잖아· 초반에는 저 새끼들 무슨 헛짓거리를 하는 거냐고 너랑 나랑 얼마나 무시했어? 그런데 지나고 나니까 어떻게 됐지?”
“새끼 재수 없는 소리는··· 지난 일이잖아·”
“넌 역사를 왜 배운다고 생각하냐?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암기하기 위해서 배운다고 생각해? 아니야·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려고 배우는 거고 실수한 역사가 있다면 반복하지 않으려고 배우는 거야·”
창훈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린다·
“알았어 인마· 회사에서 선생질은····”
“다시 돌아와서 무진중공업이 군산에 그 깽판을 쳐놓을 정도로 한입에 홀랑 해버리려고 했던 해주조선해양까지 먹었어· 그렇게 잘 해놓고 갑자기 여기서 똥볼을 찬다고? 왜?”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말이지·”
“그 ‘왜’가 중요한 거라고· 차라리 홍보팀에서 ‘이 기사가 진짜다 또는 거짓이다’라는 반응이 나오면 무슨 생각인지 추측이라도 해볼 텐데 이건 뭐··· 인천에서도 그래·”
“인천?”
“그래· 인천공항에서 만났을 때· 컨소시엄을 구성하자고 했지만 그놈들도 머리가 있을 텐데 그냥 다 수긍하고 넘어갔잖아·”
“그건 지들도 지네 수준을 아니까 그런 거지· 설마 우리를 제치고 PM을 하려고 하겠어? HS건설이 가진 게 뭐가 있어? 경험은 뭣도 없고 기술력이나 인프라도 우리가 훨씬 많은데· 우리가 주는 공사 받아먹는다는 자체가 이번에 큰 경험이 될 거라고 판단했을 거야·”
“나도 HS건설이 다른 일반 건설사였다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그런데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최영훈 상무는 좀 느낌이 달라· 너는 연적이라서 그를 무시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상하게 그가 커다란 벽같이 느껴져·”
“지랄····”
윤 부장은 애써 무시하는 창훈의 마음을 이해하며 말을 이었다·
“그때 차관 일행을 인도로 보내고 나서 다 잘 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더라고· 그래서 알아봤어·”
“뭘?”
“HS건설 쪽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말이야· 너도 들었잖아 인천 한옥 호텔에서 식사하면서 꼬드긴 거·”
“라마누잔 차관이 그랬었지· 제법 감동적인 제안이었다고 말이야·”
“왠지 그게 끝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호텔에 알아봤는데 HS건설 사람들이 호텔을 나온 건 차관 일행하고 식사를 마친지 몇 시간이 지난 후였대·”
창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윤 부장을 바라보았다·
“왜 그걸 이제야 말해?”
“일단 누구를 만났는지 알아낸 뒤에 말하려고 했지· 그런데 젊은 인도 여자를 만났다는 거 외에는 알아낸 게 없어·”
“젊은 인도 여자? 수행원 중에 하나겠네?”
“그렇지· 그런데 그때 젊은 여자 수행원이 몇 명이었는지 기억나?”
“내가 기억하는 것만 세 명? 맞지?”
“다시 찾아보니까 다섯 명이더라고· 그중에 누구를 만났는지 모르겠어·”
“야! 걱정하지 마· 다른 나라도 아니고 인도야· 여자가 무슨 힘이 있어? 우리는 차관을 꽉 잡고 있다고· 그때 라마누잔 그 인간이 여자 둘에 정신 못 차리는 거 못 봤냐? 아주 그냥 천국을 본 것 같았잖아· 크크큭····”
“그렇긴 한데··· 그래도 계속 불안하네· 아무래도 인도 한번 가야 되지 않을까 싶은데?”
“오케이 스케줄 잡아보자· 단속해놓는 게 마음 편하면 그렇게 해야지· 그리고 메일 온 거 있지?”
윤 부장은 그제야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에 올려진 서류를 가지고 와 창훈의 앞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거야· 마두라이(Madurai)에 추가적으로 국제공항을 지을 생각인 것 같아· 위치는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진 풀리유르 지역인데 일단 위치상 주민들 숫자도 많지 않고 산지도 없어서 공항을 짓기에는 나쁘지 않아·”
“지가는?”
“토지매입 예상 비용으로 저쪽에서는 대략 천억 정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우리가 직접 가봐야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아·”
“건설자재는 현지에서 조달해야겠고 장비는?”
“이건 우리가 손댈 수 있지· 우리 계열사인 우명종합기계에서 중장비 구매하기로 하자·”
“좋지· HS건설한테 시공은 어느 정도나 맡길까?”
“50% 이상 줘야 할걸? 우리가 전체 사업이익의 50% 넘게 가져가는 걸 알 텐데 시공까지 다 가져가면 반발할 거야·”
“그래 뭐··· 주자· 아깝긴 하지만 존심 한번 세워줘야 나중에도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겠지· 총 사업이익은 어느 정도 보고 있어?”
“계산해보니까 대략 4천억 정도? 그렇게 많지는 않아·”
“해외 발주 공사에서 4천억이나 남겨 먹으면 역대급이지· 지금까지 물 밖을 벗어난 사업치고 손해 안 본 게 몇이나 돼? 아마 진짜 4천억 넘게 벌어 오면 우리 아버지가 내 볼에 뽀뽀를 해줄지도 몰라·”
“그건 그렇겠다· 4천억 벌어다 줘 PM(Project Management) 경험치 올려줘· 만약 추가로 사업 따내면 넌 바로 차기 회장감이다·”
창훈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흐흐··· 그래도 우리 형님 젖히기 힘들다· 알지? 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잖아 우리 형·”
“알지· 만약 태양광 판넬이 지금보다 가격이 조금만 더 높았으면 네가 감히 회장 자리를 꿈꿀 수 없었을 거라는 것도 알지·”
“태양광··· 말만 그럴듯하지 앞으로도 언제 수익 낼지 깜깜해· 저거 수익 낼 때가 되면 아마 내가 결혼하고 애가 셋은 낳은 상태일걸? 흐흐··· 당연히 와이프는 연희고 말이야·”
“에휴··· 난 어째 네가 우명그룹 회장이 되는 것보다 연희라는 여자랑 결혼하는 게 더 안 그려지나 모르겠다·”
“질투하는 거 알아· 솔직히 예쁘지? 너도 남자니까 그건 이해할게· 그러게 내가 결혼 조금만 늦게 하라니까· 그걸 못 참고 결혼을 하냐?”
“난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
“웃기고 있네· 네가 무슨····”
창훈이 윤 부장을 놀리려는 순간 윤 부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윤 부장은 손을 들어 창훈의 입을 막고는 전화를 받았다·
“어 나야· 뭐?”
떨리는 윤 부장의 동공·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에 창훈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 부장은 전화를 끊고 말했다·
“일 났다·”
“뭔데?”
“라마누잔 차관이 신항공 건설 사업에서 빠지게 됐단다·”
“뭔 소리야 그게?”
“마호디 총리가 중요 사업이라고 직접 관여하기로 결정했대· 이거··· 느낌이 좋지 않아·”
창훈은 벌게진 얼굴로 머리를 쓸어올리다가 말했다·
“지금 당장 인도행 비행기표 끊어· 가장 빠른 걸로· 현지에 우리 쪽 사람 있나?”
“찾아볼게·”
바로 움직이던 창훈이 순간 멈칫했다·
“왜?”
“혹시 이거 HS건설이 수작 부린 건 아니겠지?”
윤희찬 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야·”
“그렇겠지?”
“당연하지·”
윤 부장은 창훈에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내심 자신의 불안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발 이번만큼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 태풍의 눈(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