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풍의 눈(3) >
우명건설 김창훈 상무와 그의 비서인 윤희찬 부장이 인도행 비행기를 타고 있을 때 영훈은 하얼빈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Nodri Clare의 인수가 완료되었으니 주췬과의 만남은 필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훈이 또다시 한국 땅을 떠났을 때 조재민 군산시장은 서울 리츠칼튼 호텔에 모습을 드러냈다·
민희가 감탄하며 들어왔다가 이형준 상무 어머니를 보고 입맛을 떨어뜨렸던 그 식당의 조용한 룸에서 송은채 회장과 마주했다·
창밖의 대로변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송 회장에게 말했다·
“정치계에 입문한 뒤로 요즘 많은 것이 바뀐 걸 느낍니다·”
“본인이? 아니면 주변이요?”
“내가 달라진 건 알겠는데 주변은 내가 예상하는 것 이상으로 반응한다고 할까요? 알고 있었는데도 막상 경험하니 또 느낌이 다릅니다· 새롭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합니다·”
“우리 시장님 의외로 센치하시네·”
“나 원래 센치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문학소년이었어요· 가방에 작은 시집을 항상 넣어두고서 짬짬이 읽고는 했습니다·”
“어머 그러셨어요?”
“의외지요?”
“네· 그렇게 문학소년이었던 분이 정치는 어떻게 하게 되셨어요?”
“원래 난 정치에 관심이 없었어요·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학교와 근처 라이벌 학교가 축구로 한판 붙게 됐습니다· 우린 자신이 있었죠· 영석이라고 있었는데 이 친구가 볼을 기가 막히게 찼거든요· 얼굴도 잘~ 생겼어· 공부도 잘했지· 왜 같이 다니면 든든한 친구
있지 않습니까? 걔가 딱 그랬죠·”
“그런데요?”
“우리가 2대 0으로 이기고 있을 때였나? 상대 학교의 한 녀석이 영석이한테 아주 거친 태클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자칫 잘못했으면 다리가 부러졌을지도 모르는 아주 악랄한 태클이었어요· 그러니 어찌 됐겠습니까? 축구고 나발이고 주먹으로 한판 세게 붙
었더랬습니다·”
“조 시장님이 소싯적에 패싸움까지 하셨었군요?”
조재민 시장은 그때 당시가 기억나는지 아련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릴 때야 싸움질하면서 크는 거라 별일 없이 지나갔으면 흔히 있었던 추억으로 남았을 텐데 그때 영석이가 심하게 얻어맞아서 불구가 됐습니다· 너~무 화가 나고 분을 풀 수 없었는데 학생이었으니까 우리는 뭘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영석이 부모님이 진짜 많이 힘들어하셨어요· 그런
데 더 힘들게 한 건 그때 영석이를 그렇게 죽어라 팼던 녀석이 겨우 훈방 조치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던 겁니다·”
“부잣집 아들이었나요?”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허··· 그 새끼··· 아니 그 녀석의 당숙이 검사였던 거예요· 차라리 부모님이 검사라면 이해라도 하는데 공사도 다망하신 검사님이 참 인정도 많으시지···· 내가 그때 느꼈습니다· 세상 참 더러운 거구나 하고 말이에요· 그래서 법대를 가서 정치를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정의를 세우고 싶었던 거군요?”
조 시장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아니요 정의는 무슨··· 내가 안 당하려고 그런 겁니다· 적어도 내가 힘이 있으면 내 주변 사람들은 내가 한팔 걷고 도와줄 수 있으니까· 그때 불구가 된 영석이 부모님이 화병으로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내가 두 번 다시 그 꼴 보지 않으려고 정치하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정치를 시작
하니까 이게 또 눈치 볼 사람이 한둘이 아닌 거예요·”
“실망하셨겠네요·”
“실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 한 다리 건너면 ‘내가 힘이 어느 정도네’ ‘내가 누구를 좀 아네’ 하는 허풍들이 들려옵니다· 그것뿐인가요? 좀 말이 통한다 싶으면 ‘내가 널 키워 주겠다’· ‘나만 따라와라’ 등등 별소리를 다 합니다·”
“호호··· 그중에서 강주원 의원에게 가셨던 거군요?”
“강주원 의원이 전라도에서는 힘 좀 쓰거든요· 내 잘 알지· 영석이 사건 무마시켰던 검사가 바로 강주원이거든·”
이번에는 송은채 회장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그건····”
“예상하지 못했죠잉? 흐흐··· 내가 그 인간 밑에 들어갔을 때 영석이 부모님 무덤 앞에 가서 한 시간을 울었습니다· 방법이 없었어요· 전라도에서 나고 자랐는데 어디 경상도 가서 출마하겠습니까? 전라도에서 정치하려면 그 인간이 최고의 선택인데···· 왜 살면서 돌이켜보면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부분이 보이지 않습니까? 딱 그때 같아요· 그때부터 내가 국회의원이 됐는데도 가슴이 답답해· 남들은 의원님 의원님 하면서 떠받들어 주는데도 그냥 답답한 거예요·”
“인생 참 쉽지 않아요· 난 조 시장님께 그렇게 절절한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거든요·”
“이 사연 아무나 못 듣습니다· 오죽하면 마누라도 모르겠어요 흐흐····”
조 시장은 목이 타는지 화이트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강주원 의원을 날리고 내가 그 자리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최 상무의 제안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내가 전국구 의원이 될 수 있겠더라고요· 하··· 이게 또 막상 기대를 가져보니까 그 유혹을 끊을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빨가벗고 달
려드는 가시나들 앞에서도 참아본 적 있는데 최 상무가 그려주는 미래는 못 참겠더라고요·”
“최 상무가 그래요· 생각지 않았던 목표를 제시하고 이루어 나가죠·”
“그렇게 최 상무가 준 과일을 받아먹고 이 자리까지 오니 당에서 날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평생 전화 한 통 안 줄 것 같던 중진 의원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연락이 와요· 내가 귀찮아 죽겠어·”
“호호 무슨 자랑을 그렇게 하세요?”
“내가 회장님 앞이니까 자랑하는 겁니다· 다른 데 가서 이런 말 하면 재수 없다고 욕먹어요·”
“알긴 아시네·”
“이게 다 회장님과 최 상무 덕분입니다· 그리고 회장님은 참 복도 많습니다· 그런 인재를 옆에 두시고··· 아예 사위로 만드신다면서요?”
“딸자식이 이런 식으로 효도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래서 인생 모른다고 하는 건가 봐요·”
“하하하! 회장님 농담도 잘 하시네· 내가 회장님한테 한 소리 듣고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또 꿍한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땐 내가 실수했지· 정신 번쩍 났습니다·”
“정신 번쩍 나라고 그렇게 말한 거예요 큰일 하실 분인데····”
“촐싹댔죠?”
“호호호·”
송 회장이 웃자 그가 씁쓸해하며 말했다·
“쯧··· 내가 그때 회장님한테 제대로 배웠습니다·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해주시니 내가 뭐라고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시장님이 아니면 감사를 크게 받고 싶은데 그냥 말로 넘어갈게요·”
“하하하! 이거 말로는 못 당하겠습니다· 회사를 경영하기 전에는 전업주부셨다고 하던데 지루해서 어떻게 참으셨어요?”
“저도 나름 놀라는 중이에요· 생각보다 더 적응을 잘하는 것 같아서요· 그나저나 언제고 올라오실 줄은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뭐 용건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크게 별다를 건 없습니다· 그냥 가볍게 부탁할 게 하나 있고 또 궁금한 게 하나 생긴 김에 올라와서 회장님한테 감사도 드리고 그러는 거죠·”
“말씀하세요·”
“요즘 해주조선해양에서 크루즈선을 수주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주가가 많이 빠졌던데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그가 놀리려고 물어본 게 아니라고 판단했다·
“네 괜찮아요· 그게 왜 궁금하셨을까요?”
“조선소 노조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미 무진중공업 때문에 한차례 크게 데어 본 사람들이에요· 일감이 생긴 건 좋은데 그것 때문에 또 조선소가 문을 닫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인 겁니다· 노조 간부 하나는 직접 찾아와서 제발 좀 말려달라는 말까지 했어요· 회사에 요청해야지 나
한테 요청하는 상황이니 웃기죠?”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맞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저들은 조선소가 돌아가게 된 게 제가 일에 상당 부분을 개입해서 그렇게 된 걸로 알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게 꼭 말이 안 되는 것만도 아닙니다· 저 역시 대외적으로 쌓은 이미지가 있으니까 이 상황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기도 하
고·”
“그래서요?”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고 해주조선해양의 뜻이 뭔지 알아야 내가 손발을 맞춰줄 수 있어요· 건조할 생각이 있다면 내가 저들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고 밀어볼 생각입니다· 하지만 다른 뜻이 있다면 대외적으로 발을 맞춰줄 수도 있어요· 어떤 의미입니까?”
송 회장은 잠시 숨을 내쉬고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수주를 받을 수도 있어요· 가능성은 꽤 큰 편이에요·”
“으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왜 수주를 받는 건지는 안 물어보시나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그 결과가 우리 군산 시민들에게 악영향을 끼치지는 않겠죠?”
“물론이에요·”
“그러면 됐습니다· 제가 잘 달래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고맙긴요· 이건 일도 아닙니다· 그런 일도 처리 못 하면 시장직 내려놓아야죠· 뭐 그건 됐고· 하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처음 말씀드렸듯이 요새 저한테 쉬지 않고 전화가 걸려 옵니다· 그중에 참 난감한 요청이 있어요· 송 회장님 만나게 다리 좀 놔달라는 겁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부러운 모양입니다· 기업 하나 잘 물어서 전국구로 올라서니까 다들 뭐라도 하고 싶은 거지요· 다 거절할 수 있는데 딱 한 명은 거절을 못 하겠습니다· 천보윤 의원이라고 아시지요?”
“알죠· 서울에서 3선 하신 양반이죠?”
“네· 사무총장이고 당 대표고 다 거절할 수 있는데 이 양반한테는 거절할 수가 없어요· 내가 아주 큰 빚을 졌거든·”
“물어보면 대답해주실 건가요?”
“내가 나중에 때가 되면 말씀드릴게요· 가능하겠습니까?”
송 회장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절할게요·”
“어째 느낌이 딱 왔습니다· 정치랑 더는 엮이기 싫어서 그러십니까?”
“네·”
“하··· 이거 난감하네요· 그럼 회장님이 아니라 최 상무는 어떻습니까?”
“최 상무만 말인가요?”
“예·”
“흠··· 날씨가 좋아요· 오신 김에 하루 푹 쉬시고 가세요· 시장님의 제안은 최 상무에게 물어볼게요·”
“감사합니다·”
송 회장은 송구스러워하는 조 시장을 보고 복잡한 마음으로 식당을 나왔다·
송구스러워하지 않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송구스러워한다는 게 그녀를 찝찝하게 만들었다·
*
“미안하게 됐습니다·”
어렵게 만난 라마누잔 차관이 창훈을 보자마자 한 말이다·
정말 어렵게 만났다·
쉽게 연락이 되리라 생각했는데 도로교통부를 통한 연락은 전달이 되지 않았고 핸드폰은 아예 꺼진 상태였다·
결국 본사를 움직여 하루 꼬박 라마누잔 차관 집을 찾았고 문을 두드려 사람을 불러낸 끝에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라마누잔 차관은 서울에서 봤을 때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호의적인 웃음이나 호탕한 언변은 사라지고 창훈과 희찬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윤희찬 부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이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아예 탈락한 겁니까? 총리님이 주관한다고 했으니 도대체 어떤 곳을 밀어주려는 겁니까?”
자국 건설사를 밀어주려는 의도라고 생각했던 윤 부장은 라마누잔 차관의 대답에 혼란을 느꼈다·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당신들의 컨소시엄이 탈락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확실하지 않지만 총리는 당신들의 컨소시엄을 나쁘게 보지 않고 있어요·”
“그럼 도대체 왜 미안하게 됐다는 겁니까?”
“컨소시엄에 선정된다고 해도 당신들이 원하는 결과는 아닐 테니까·”
“예? 그게 무슨····”
“PM 주관사가 당신네 회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창훈은 그 말을 듣자마자 한국말로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어째 느낌이 더럽더라니까· 그 새끼들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다니까!”
윤희찬 부장은 창훈이 뭐라 씨불이든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총리님 입에서 직접 나온 이야기입니까?”
“나도 알지 못해요·”
“그런데 어떻게 확신합니까?”
“총리관저에서 도는 소문은 진실보다 더 강력한 법입니다·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곧 사실이 될 테니까요· 그게 총리의 의도입니다·”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HS건설에서 총리와 연결된 줄을 잡았다는 것·
윤 부장은 흥분해서 길길이 날뛰는 창훈을 잡아 차관의 집을 나왔다·
“어떻게 하지? 한번 알아보자· 총리한테 접근하기만 하면 돼· 우리도 잘하면····”
윤 부장은 창훈의 말을 끊었다·
“한 달도 안 남았어· 여기서 잘못하다간 프로젝트 전체가 날아갈 거야·”
“그럼 어쩌자고?”
“어쩌긴? 최영훈 상무한테 한번 숙이고 들어가야지·”
“미쳤어? 난 못해·”
“그럼? 너 이대로 포기할 거야? 형한테 다 넘겨줄 거야?”
“·······”
“정신 차려 인마· 똑바로 못 할 거면 말해· 나도 인생 편하게 살게· 이기고 싶어?”
입술을 깨물고 갈등하던 창훈이 말했다·
“숙이면? PM 주관사 가지고 올 수 있냐?”
“가지고 올 수 있으면? 숙일 거야?”
“씨발··· 그래· 가지고 올 수 있으면 내가 그 새끼한테 엉덩이라도 대줄 수 있다·”
윤 부장은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그래 그 정도 각오는 있어야지· 그런데 표정 실감난다· 진짜 누구한테 대준 적 있냐?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지?”
“닥쳐 이 새끼야! 미친 새끼!”
윤 부장은 날아오는 창훈의 손길을 피하며 얼른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태풍의 눈(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