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풍의 눈(4) >
현진중공업의 CEO가 된 김태민은 요즈음 단 한 번도 주변에 미소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직원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현진그룹에서 현진물산의 계열사 분리 그리고 현진관광의 이탈 마지막으로 해주조선해양의 충격적인 인수과정까지·
자기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던 부하직원이 회사를 나가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과정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다·
사촌이 땅만 사도 배가 아픈 법인데 그 사촌이 산 땅이 하필 개발 전 판교 땅이었다고 생각하면 석 달 열흘을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워도 이상하지 않다·
지금 김태민과 그의 엄마가 딱 그랬다·
“요즘 주연이는 만나는 거니?”
이제 전업주부로 전락한 임지은 현진관광 전 사장이 물었다·
“몰라요·”
태민은 회장실 상석에 앉아 엄마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처음 이 의자에 앉았을 때 얼마나 기뻐했던가?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에 들어가는 조선회사의 CEO가 됐다고 이제 모든 세상이 자신을 주목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회사가 혼란한 틈을 타 회사 지분을 매입해 흔들려는 외부 세력에게 빅베스를 행하면서 통쾌한 역공을 날렸다·
그 결과 해외 투기세력은 상당한 손실을 떠안은 채 떠나야 했고 그 과정에서 현진중공업 새 경영자인 자신의 이름이 뉴스에 한동안 오르내렸다·
하지만 그때뿐 작년부터 올해 내내 경제면을 장식한 회사는 HS그룹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벽한 패배·
“왜 몰라? 너 주연이 놓치면 어쩌려고 그래?”
답답한 엄마의 호통에 태민이 한숨을 푹 쉬었다·
“후··· 엄마 연애라는 게 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왜? 걔가 너 싫다고 하니?”
급기야 엄마의 눈이 뒤집힌다·
“아직 모르는 거예요· 흥분 좀 하지 마·”
“내가 흥분을 안 하게 됐어? 어제 기사보니까 인천공항 면세점 매출이 사상 최대를 달성했단다· 그거 다 네 거야· 네 거 될 수 있다고·”
“내가 그거 모를 것 같아요? 그런데 주연이도 알아· 내가 지네 회사 보고 만나는 거· 그게 무슨 말인지 알죠? 나보다 더 조건 좋은 남자 생기면 얼마든지 갈아탈 수 있는 애예요·”
“걔 남자 생겼니?”
“모르지·”
태민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얼마 전부터였다·
갑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려졌다고 느낀 게 말이다·
항상 믿고 있다고 말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잡아야 할까?
하지만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비싼 여자이긴 하지만 자신을 떠난 여자는 결코 붙잡고 싶지 않았다·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
“나 다른 여자 만나고 싶어요·”
“누구?”
“우명그룹에 패션 공부하는 여자 있잖아요? 지금 부장급이라던가? 하여튼 꽤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던데·”
“우명?”
임지은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다른 곳도 아니고 우명그룹 애랑 만나겠다고? 너 진심이니?”
고작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 이런 개새끼가 없다며 욕했던 곳이 바로 우명그룹이다·
회사가 흔들릴 때 치고 들어와 날로 삼켜 먹으려고 했던 곳이 바로 우명그룹이었으니까·
하지만 태민은 뭐 어떠냐는 듯 말했다·
“오히려 잘 됐죠· 지금 우리한테 물린 자금도 있고 우리한테 미안한 것도 있을 테니 말해보기 나쁘지 않잖아요?”
“네가 가진 거 훔치려던 작자들이다·”
“그런 생각 가지고 있으면 더 좋지 않아요? 적어도 패션 부문은 딸한테 넘겨줄 테니까·”
“너 진짜 진심으로 말하는 거니?”
“난 떠난 여자 잡지 않아요·”
태민은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 이게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주연에게 가끔 이런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그녀도 긴장감이 생길 테니까·
*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한 고급 일식집·
음식을 앞에 두고도 한 젓가락도 들지 않는 윤 부장과 벌써부터 잔에 술을 채운 창훈은 초조한 표정이 역력했다·
창훈은 한입에 술잔을 털어 넣으며 말했다·
“내가 숙이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단 말이야· 그런데 자존심 다 버려가면서 숙였는데도 얻지 못하면 나 오늘 쪽팔려서 죽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그래도 최소한 안 됐을 때의 경우를 가정해서 대비는 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게 참모의 역할이잖아·”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것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어· 최영훈 상무를 협박해볼까 하면서 뒤를 캐보려고 했는데 하··· 뭐 나오는 게 없네· 회사 연희 씨랑 데이트 집 이게 다야· 지금 사는 집도 최 상무 것이 아니고 회사에 입사하기 전에 뭘 했는지도 파악이 안 돼· 정확한 신상정보가 있
으면 뭘 더 파보기라도 할 텐데 그게 없잖아·”
“그러고 보면 옛날이 좋긴 했었어· 우리 어릴 땐 주민번호 귀한 줄 몰랐는데····”
“우리 초딩 때나 그랬지· 하여간에 인도는 잘못 건드렸다가 뒷감당이 안 될 것 같고 저쪽 핵심 브레인인 최 상무를 흔들 수 없으니 빌 수밖에· 원래 급할 땐 비는 게 최선이야·”
“진짜?”
“응 너도 알잖아· 우리 아빠도 그래서 죽다 살아난 적 있는 거·”
“씨발 옛날 얘기는····”
다시 창훈이 술을 털어 넣을 때 문이 열리고 영훈이 들어왔다·
창훈은 급히 술을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술이 달아서 먼저 마셨는데 괜찮으시죠?”
“물론입니다·”
“앉으세요·”
영훈이 앉으니 창훈이 그의 앞에 엎어놓았던 잔을 바로 하고 영훈에게 따라주었다·
“전에 안주가 별로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하셨던 게 기억나서 이 집으로 모셨습니다· 여기가 술은 몰라도 안주는 괜찮거든요·”
“비싸 보이는 집이니 당연히 맛있겠죠·”
여유로운 안색의 영훈을 보며 창훈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왜 뵙자고 한지 아십니까?”
“대략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궁금하군요· 어떤 일로 불렀다고 생각하는지·”
영훈은 술을 마시고 안주로 나와 있는 메로구이를 한 점 집어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다는 제스처였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인도에서 소식을 들으신 거겠죠?”
창훈은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욕을 간신히 참으며 대답했다·
“역시 제대로 알고 계셨군요·”
“한국에 오기 전에 마호디 총리가 신공항 건설 사업을 주관할 거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우명건설 쪽에서 미팅을 가지자고 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연락을 주셨네요· 출장 갔다 복귀한 첫날에 연락 올 줄은 몰랐습니다·”
“자리에 없다고 한 게 출장을 다녀오셨던 거였네요? 혹시 인도에?”
“아닙니다· 전혀 다른 일로 중국에 다녀왔습니다·”
“으음····”
창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윤희찬 부장이 끼어들었다·
“중국에요? 혹시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패션 브랜드 때문에요·”
“얼마 전에 인수하셨다던 Nodri Clare라는 패션 브랜드 말인가요?”
“네 맞습니다·”
“중국에 진출하려고 계획 중이신가 봅니다?”
“네·”
“지분을 백 프로 인수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럼 중국으로부터 지분을 내주고 투자를 받는 형태인가요?”
영훈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우리 회사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요즘 하도 HS그룹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서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투자가 들어오면 시장에 퍼져있는 재무적 리스크 공포가 상당히 가라앉겠네요?”
“그럴 수도 있겠죠·”
“주식이 그렇게 많이 떨어졌는데 부담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건 제 전문분야가 아니니까요· 전 일이 되는지 아닌지만 신경 씁니다·”
“일이 되느냐··· 의미심장하네요·”
윤 부장이 궁금한 걸 해결하고 한 발 빠지자 창훈이 나섰다·
“총리에게 선을 댄 겁니까?”
“비슷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태도·
“그럼 컨소시엄이 사업을 따낼 확률은 무척 높다는 거겠네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후후··· 재밌네요·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리끼리 김칫국을 얼마나 마셨는지··· PM을 하실 생각입니까?”
“네·”
“양보해달라고 하면 양보하실 의향이 있습니까?”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에 창훈은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물었던 것인데 대답이 의외였다·
“조건에 따라 다르겠죠?”
“조건이요?”
“그럼 설마 그냥 달라고 하는 겁니까? 초등학생도 친구한테 아이스크림 한 입만 달라고 할 땐 자기 손에 들고 있는 과자 하나 정도는 건네는 법입니다· 그냥 달라고 해서 주는 건 가족뿐 아닙니까·”
창훈이나 윤 부장의 눈이 반짝였다·
마음이 급해진 창훈이 말했다·
“혹시 원하는 게 있습니까? 그렇다면····”
다급해진 그를 보고 영훈이 찬찬히 타이르듯 말했다·
“상무님?”
“네?”
“제가 봉선동 사업을 어떻게 따냈는지 기억하십니까?”
“·······”
모를 리가 있을까·
하지만 질문의 의도를 생각하느라 머리를 굴릴 때 윤희찬 부장이 나섰다·
“조재민 당시 국회의원을 구워삶았었죠·”
“하하 맞습니다· 구워삶았었습니다· 그런데 전 그에게 뭘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재민 의원도 뭘 받고자 해서 나왔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난 그저 주겠다고 했었습니다· 그냥 준 것도 아닙니다· 상대방이 필요한 걸 준 거죠·”
종합하자면 난 당장 생각나는 게 없으니 뭘 줄 수 있냐는 말이었다·
윤 부장이나 창훈 모두 순간 입을 열지 못했다·
당연했다·
뒤를 캤었음에도 별다르게 나온 게 없으니 도대체 저 인간이 뭘 갖고 싶어 하는지 전혀 알고 있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영훈은 그런 둘을 보고 그저 미소만 짓고는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혼자서만 젓가락을 움직이고 다른 둘은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는 묘한 상황·
대략 5분여가 흘렀을 때 창훈이 입을 열었다·
“마음 같아서는 반포지구 재건축 사업에라도 껴드리고 싶지만 주민들 반대 때문에····”
“정답이 아닙니다·”
영훈은 칼같이 자르며 식사를 이어갔다·
창훈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어갔다·
“이라크 바스라 정유공장 건설에는 참여시켜줄 수····”
“정답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창훈이 참지 못했다·
“어째서죠? 사업 규모만 해도 8억 달러가 넘는 큰 사업입니다·”
“저는 거래를 할 때 주로 저울을 이용하고는 합니다· 상무님은 제게 신항공 사업 PM주관사를 올려놓으라고 하셨죠? 그럼 그에 맞는 무게를 올려놓아야 거래가 성립되는 겁니다·”
“PM주관사로 얻는 이익만큼 다 달라는 겁니까? 그건 아니죠· HS건설은 경험도 없고 인력도 부족할 겁니다· 설계 기간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벅찰 겁니다· 그럼 당연히 하청을 많이 줘야 할 테고 그럼 PM이라고는 해도 가져가는 이익이 줄어들 거예요· 아무리 많이 쳐줘봐야 2천억 내외
일 겁니다· 바스라 정유공장만 해도····”
“계산을 잘못하고 계시네요·”
“뭐라구요?”
“PM을 하고자 하는 이유가 뭡니까? 당연히 이번 사업에서 얻는 이익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경험과 이력 때문 아닙니까? 왜 이번 사업에서 얻는 순이익만 보십니까? 계산을 다시 해보셔야겠네요·”
“좋습니다· 더 양보하죠· 인도네시아 신도시 건설 사업과····”
영훈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자꾸 힌트를 드리는데도 방향을 못 잡고 계시네요·”
열 받은 창훈이 움찔하는 순간 윤 부장이 그의 허벅지를 잡고는 대신 나섰다·
“도대체 어떤 계산을 원하는 겁니까? 욕심이 너무 과하신 거 아닙니까?”
“우리는 PM을 하려는 목적이 있어요· 좁디좁은 한국에서 아파트 건설이라는 한정된 사업으로 아웅다웅하지 않고 해외사업으로 진출해서 더 큰 회사로 발돋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명건설은 어떻습니까?”
“당연히 우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윤 부장이 무슨 그런 뻔한 소리를 하느냐는 얼굴로 말하자 영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한 가지가 더 있잖아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우명이 원하는 것 말고 상무님이 원하는 것· 저는 우명과 거래를 하는 게 아니라 상무님과 거래하는 게 아니었나요? 그런 걸로 알고 있었는데····”
윤희찬 부장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하지만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물었다·
“상무님이 곧 우명을 대표해서 나온 겁니다·”
“아닐 텐데요? 상무님이 PM을 하고자 하는 이유 우명그룹 회장님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거 아닙니까? 그럼 우리가 제안할 수 있는 PM 주관사 이전은 단순히 사업 이익이 아니라 우명그룹 후계자만큼의 값어치로 올려놓는 것일 테고요· 내가 계산을 잘못하고 있는 거였나요?”
< 태풍의 눈(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