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빨을 드러낸 대가(1) >
근 일주일간 하락세를 거듭해 전주 대비 30% 이상 빠진 HS그룹 주가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상한 건 HS그룹은 전혀 주가를 관리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
내부적으로도 부족한 자금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돌 때 시장에 공시 하나가 떴다·
[중국 온라인 최대 플랫폼 하이잔 HS물산이 소유한 패션브랜드 Nodri Clare에 5천억 투자 확정· 30% 지분 취득·]
막혔던 구멍에 숨통을 틔워주는 5천억 수혈·
그리고 무엇보다 충격인 건 중국 온라인 플랫폼이 투자했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공시 이후 주가는 급격한 V자 반등을 시작했고 15% 상승이라는 기염을 토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지금까지 하락폭에 비해 많이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시장은 이번 공시를 굉장히 긍정적으로 본다는 의미였다·
이번 투자유치로 회사 내부에서 기획조정실 최영훈 상무에 대한 신뢰도는 다시 한번 상승했다·
지금 송은채 회장이 이렇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걱정을 쏟아내던 임원들 지금 입 싹 다문 거 알아? 역시 최 상무야·”
“감사합니다·”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은 표정이지만 이제는 그런 영훈에게 적응한 송 회장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준다·
“고생했어· 나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거 있지?”
“주가 떨어지는 거 보고 걱정하셨나 봅니다·”
“하하 아주 식겁했지· 30%나 빠지는데 어떻게 평정을 유지해? 게다가 은근히 최 상무 무시하는 사람들 있는 거 알지?”
“그런가요?”
“그럼· 겉으로는 상무님 상무님 하겠지만 속으로는 온갖 뒷얘기들을 하고 있을 거야· 없는 데서는 임금님 욕도 한다는데 사장 딸내미랑 결혼해서 고속 승진하는 남자 욕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 기쁜 마음으로 욕먹겠습니다·”
“그런 거 보면 참 이상해· 최 상무는 그런 거 정말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아? 원래 사람이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가장 힘들어하는 건 사람 때문이거든·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하나 쟤가 분명 내 욕했을 텐데···· 이런 생각 안 해?”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데?”
“그냥 인정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욕을 한다고 내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하아··· 진짜 스님 같다· 우리 연희 두고 갑자기 출가하는 건 아니지?”
“전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제가 고기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그리고 연희 씨 같은 미인을 두고 산에 들어간다는 게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우리 최 상무는 말도 참 잘해· 그건 그렇고 최 상무 없을 때 조재민 시장 왔다 갔어·”
“조 시장이요? 왜 올라온 겁니까?”
“해주조선해양 크루즈선 건조 때문에 군산 노조가 불안해한다는 거야· 본래대로라면 노조가 불만을 제기해도 본사에 해야 하는데 군산조선소 노조는 조금 특수하게 다시 만들어졌잖아? 시장이 자신들을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
“흐음··· 그렇게 생각할 법하네요·”
“우리가 어떻게 할지 알려주면 같이 손발을 맞춰주겠다고 하더라고· 확실히 간이 조금 작긴 해도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야· 방향만 잡아주면 곧잘 따라오는 사람이야·”
“맞습니다· 무엇보다 추진력이 상당히 좋아서 일에 성과를 내는 사람입니다· 같은 편이라면 믿고 일을 맡겨도 될 사람이에요·”
“그러게· 일단 그래서 크루즈선을 건조하게 될 거라고 말해뒀어· 노조가 불안을 느끼겠지만 알아서 정리할 거야· 그리고····”
“그리고요?”
“나더러 정치인 한 명을 만나달라고 부탁했어·”
“정치인이요?”
“기업 하나 잘 물어서 전국구 스타 됐으니 옆에서 그 꼴을 보고 있던 정치인들이 얼마나 부럽겠어? 아마 나 같아도 부러웠을 거야· 만나달라는 사람은 천보윤 의원이라는데 자기가 사무총장이나 당대표나 다 거절할 수 있는데 이 사람은 거절할 수가 없다고 하네·”
“무슨 사연이 있나 보네요?”
“그런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떤 사연인지는 말을 안 해· 일단 안 된다고 거절하니까 최 상무라도 만나게 해달라는 거야· 그래서 최 상무한테 물어본다고 하고 끝냈지· 어때? 만나볼 거야?”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회장님은 몰라도 전 모른 척할 수가 없으니까요·”
“괜히 만났다가 발목이나 잡으려고 할 것 같아서 불안해서 그래·”
“잡으려고는 할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만나자고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옴짝달싹 못 하게 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건 그만큼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니 그런 사람과 가까이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도 저도 아니게 엉겨 붙으려고 할까 봐 걱정입니다·”
“발목이 잡혀도 능력이 있으면 괜찮다?”
“투자라고 생각하면 되겠죠· 군산버스터미널처럼·”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그럼 최 상무가 조 시장한테 연락할 거야?”
“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영국은 언제 갈 거야?”
영훈은 핸드폰으로 날짜를 확인한 뒤 말했다·
“다음 주에는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으음··· 솔직히 나도 걱정스럽기는 해· 그래도 잘 할 거라고 믿어· 최 상무도 그렇고 해주조선해양도 그렇고·”
“믿으세요·”
“그래야지· 영국 갔다 오면 결혼 준비하느라 정신없을 거야· 어지간한 건 연희가 알아서 할 테지만 그래도 사진도 찍고 가구랑 전자제품 같은 것도 봐야 하잖아· 너무 연희에게 맡겨놓지 마· 그거 같이 고르는 것도 재미니까·”
“네 알겠습니다·”
송 회장은 영훈의 미소에 적잖이 마음을 놓았다·
*
무령왕릉 근처 사람들이 은밀히 운명을 보러 오는 화옥당 대기석에는 항상 빽빽하게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빽빽하게 앉아 있어야 할 대기줄이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이미 일주일 전부터 오늘 예약자들을 모두 다른 날짜로 미뤄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 방문할 사람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여당의 당대표인 민구상 의원이 손자 이름을 짓겠다고 찾아온다 했기 때문이다·
작명에 관해서는 임복희 스스로도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는다고 자부하는 바였고 그만큼 정치권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물론 그녀가 자부한다고 해서 그만큼 능력이 있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명우도사는 그녀의 사주보는 법과 작명하는 걸 보며 항상 비난을 퍼부었으니까·
아무렴 어떤가?
사람들이 그녀가 능력이 있다고 여기고 있으면 되는 것인데·
“어떤가?”
후덕한 살집을 자랑하는 민구상 대표는 곱게 싸온 종이에 손자의 사주를 적어 내밀고 말했다·
“보자~”
임복희는 사주팔자를 찬찬히 살피며 만세력을 뒤적였다·
그리고 한참을 계산하고 빈 종이에 적어 내리다 말했다·
“금동자네· 복이 많아· 우리 대표님 사주만큼이나 큰~ 사람이 될 거야·”
“그게 정말인가?”
“천덕귀인이야· 성격이 인자하고 복이 있어· 이게 다 대표님이 평소에 덕을 잘 쌓아서 그런 게지·”
“뭐 안 좋은 건 없고?”
“굳이 찾자면 고집이 세고 잘못된 걸 보면 그냥 넘어가지를 못해· 그러다 보니까 주변에서 싫어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지· 전형적인 조선시대 선비 사주야·”
“그래?”
민구상 대표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한다·
“왜? 싫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대쪽 같은 선비치고 권세 오래 누리는 사람 보지를 못했어· 예전이야 대쪽같으면 사람들이 우러러보지만 지금은 SNS다 뭐다 해서 조금만 꼬투리 잡히면 오히려 더 욕하는 세상이거든· 오히려 적당히 흠 있고 적당히 빈틈이 있는 사람이 오래 가는 법이야·”
임복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아니 내가 더 설명 안 해줘도 알겠네· 시기 질투가 심해서 관직을 얻으면 오래 가지 못할 수 있어·”
“그거야 하기 나름이지· 어디 사주대로만 살아가든가?”
“그럼· 그래서 이름을 좋~은 걸 지어야 하지 않겠어? 내가 기운이 사방팔방으로 뻗칠 이름을 지어주지·”
“얼마면 돼?”
“오백·”
민구상 의원이 미간을 꿈틀거린다·
비싸다는 뜻이다·
하지만 임복희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비싸면 다른 데서 해· 평생 한 번 쓸 이름인데 오백이 비싼가?”
“내 말이 그 말이야·”
민구상 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에 있는 보좌관에게 현금 오백을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좌관이 오만 원짜리 백 장이 담긴 하얀 봉투를 들고 왔고 민 의원은 그걸 받아 임복희에게 건넸다·
임복희는 그 자리에서 바로 봉투를 열어 하나하나 꼼꼼하게도 백 장을 세어봤다·
“왜? 내가 틀리게 넣었을까 봐?”
“아니· 그런데 내가 전에 점을 봐주는데 복채를 절반도 안 넣어준 이가 있었다오· 그래서 그래·”
마지막 백 장을 손가락으로 탁 튕긴 임복희는 봉투 안에 현금을 고이 넣어 내려놓고는 말했다·
“대표님·”
“왜? 무섭게 뭘 그렇게 노려보고 있어?”
“내 눈빛이 무서워?”
“눈화장을 그렇게 해놓고 안 무서워하길 바라는 거야? 무서우라고 한 화장 아니야?”
“그 센스로 장가는 어떻게 갔대?”
“우리 나이 때 장가가려면 센스가 필요했던가? 흰소리 그만하고 뭔데?”
“총선도 끝났고 이제 대선 준비하겠네?”
“당연한 걸 뭘 물어?”
“직접 나가시려우?”
“날 몰라서 묻는 거야? 난 가늘고 길게 가는 게 목표인 사람이야· 5년 해 먹고 뒷방 늙은이처럼 살아야 하는 건 관심 없어·”
임복희는 눈을 가늘게 뜨며 흘겨보았다·
대권에 관심이 없다는 정치인의 말은 미녀에 관심이 없다는 남자의 말과 같았으니까·
“정말? 그럼 할 수 없고·”
“뭘 할 수 없는데?”
“난 대권에 관심 있으면 도와줄까 했었지·”
“거 이야기를 꺼냈으면 말이라도 해봐· 이대로 집에 가면 궁금해서 잠이라도 자겠어?”
“옥동자 같은 손자 볼 쓰다듬어 주면 다 잊어먹을 텐데?”
“흰소리 그만하고 얼른 속에 있던 거나 꺼내 봐·”
“대권이 뭐야? 최고 권력자 아니야? 예로부터 최고 권력자는 곧 신과 동일하다고 했어· 하늘과 같았다고· 하늘이 곧 뭐야? 태양· 대표님은 양기가 부족해·”
“양기가 부족하다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양기가 가득한 사람을 주변에 둬야지· 배우들 반사판 쓰는 게 왜 쓰는 건데? 빛이 부족하니까 반사판으로 배우를 돋보이게 하는 거잖아· 반사판이 될 사람· 대표님 옆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직행이야·”
괜스레 목이 말라진 민구상 대표는 주변을 둘러보다 결국 보좌관을 찾았다·
“야! 경식아! 밖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 좀 떠와·”
보좌관이 허겁지겁 문을 열고 들어와 종이컵에 담긴 물을 건네주고 나갔다·
민 대표는 한 번에 물을 들이켜고는 물었다·
“그게 누군데?”
“대권 도전도 안 할 사람이 뭐가 궁금해?”
“그냥 알아만 두게· 혹시 알아? 알아두면 쓸 데라도 있을지?”
“됐어· 괜히 옆에 뒀다가 봄바람에 싱숭생숭해진 처녀처럼 가슴이 콩닥거리면 어째?”
“안 그래도 저혈압인데 콩닥거리는 거 나쁘지 않네·”
“어이쿠? 말하는 것 보게?”
“자꾸 시답지 않은 소리 그만하고 털어놔· 복채 줘야 해?”
“그럼? 시커멓게 흐린 하늘에 햇볕 쬐게 해준다는데 공짜로 하려고 하셨어? 우리 민 대표님 이렇게 안 봤는데····”
“얼마가 필요한데?”
“천만 원·”
“아니 여기는 십만 단위는 아예 취급을 안 하는 거야? 최하 단위가 백만 원부터인 거지?”
“서민들한테는 복채 30만 원에 해· 그런데 대한민국의 여당 당 대표한테 30만 원 받으라고? 우리 신령님 놀라 뒤집어지셔·”
“말은····”
“내가 가격을 높게 부른 건 그만큼 지위가 있다는 뜻인 거야· 남들은 천만 원 내고 싶어도 내가 안 불러·”
그렇게 임복희가 큰소리를 떵떵 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 세단이 화옥당을 빠져나갔다·
추가로 5만 원권 200장이 담긴 봉투를 매만지던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나야· 이번에는 당 대표야· 또 실수하면 내가 전라도 내려가서 죽여버릴 테니까 똑바로 해· 알겠어?”
전화를 끝낸 그녀의 눈빛에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
전화기를 내려놓은 영민주택 강윤기 대표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 씨발····”
확실히 용하긴 용한 점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아니고서야 이미 몇몇 기자들로부터 난도질당하듯 당했던 자신이 어떻게 당 대표 측근으로 다시금 추천될 수 있을까·
물론 이번에는 결코 실수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한 번의 기회가 다시 왔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안도하고 있었다·
“좋았어· 좋았어!”
그는 불끈 주먹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그의 옆 벽면에는 여수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계획도가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었다·
3500여 세대 대단지 조성이라 다른 곳이었다면 만만치 않았겠지만 이번 사업은 자신할 수 있었다·
이미 여수 일대에는 전부 자신의 사람들이 쫙 깔려있다고 봐야 하니까·
이번 사업으로 다시 한 몫 당기면 이제 자신의 앞길은 탄탄대로나 다름없었다·
< 이빨을 드러낸 대가(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