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빨을 드러낸 대가(3) >
늦은 밤 강윤기 영민주택 대표는 거실에 앉아 와인을 마셨다·
이제 제법 날씨가 따뜻해져 밤에 창문을 열어놓으면 선선한 바람이 기분을 살랑이게 만들었다·
살포시 오른 취기에 기분 좋은 봄바람을 느끼며 여유를 즐기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전화를 찾은 그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가 화옥선녀인 임복희였기 때문이다·
“네 선녀님·”
[아직 연락 없어?]
여당의 당대표인 민구상에게서 연락이 없느냐고 묻는 것이다·
“아직 없습니다·”
[그래? 이 능구렁이가 머리를 굴리고 있나 본데? 그러게 진즉 잘했으면 이런 쓸데없는 걱정 안 하잖아·]
“죄송합니다· 앞으로 그런 실수는 없을 겁니다·”
[회사는? 사고 처리하느라고 돈 좀 썼을 거 아니야?]
“그렇기는 한데 이번에 여수 택지개발 사업 들어가면 만회될 것 같습니다· 선녀님도 걱정하지 마세요·”
[내 땅 앞으로 메인상가 위치하는 거 맞지?]
“그럼요· 설계 완벽하게 할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십쇼· 시에서 원하는 게 있다고는 해도 일단 땅 파기 시작하면 어느 정도는 융통성 있게 인정해주지 않습니까·”
[그래· 언제 민구상 대표한테 연락 올지 모르니까 항상 긴장해야 해· 야당에 한 번 붙었다가 괜히 사고 친 거 귀에 들어가서 고민하고 있는 게 확실하니까 절대 말실수나 성급하게 들이대는 거 안 돼· 그 사람 신중한 사람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신령님이 강 사장 앞날이 구만리래· 그런데 그놈의 성급한 성격이 꼭 초를 친다고 하니 내 말 꼭 명심하고·]
“예·”
화옥신녀는 강윤기가 대답하자마자 바로 전화를 끊었다·
어찌보면 매정하다 싶을 정도지만 오히려 강윤기는 그런 그녀가 카리스마 있게 느껴졌다·
그런 카리스마가 있기에 지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여당의 당대표를 붙여줄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수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은 더더욱 중요했다·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은 여당에서 주도하는 사업이었고 여수 광양 남해 일대는 민구상 대표 라인이 쫙 깔려있는 곳이었다·
여기서 좋은 성과를 보이면 민구상 대표에게 기분 좋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을 거다·
기분 좋은 미래가 눈앞에 보여서일까?
안 그래도 달콤한 와인이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그렇게 쉬지 않고 와인을 마시다 어느 순간 잠이 들어버린 그는 핸드폰 진동소리에 눈을 떴다·
발신자는 오정규 도시시설사업단장·
어느새 밝은 햇빛이 집안에 가득 들어와 있는 걸 보고 늦잠을 자버렸음을 깨달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9시 반이다·
황급히 일어나며 일단 전화부터 받았다·
“네 단장님·”
[목소리 들으니께 이제 일어났능가?]
“아닙니다· 말씀하세요·”
[그게··· 내가 참 죄송시럽네·]
“뭐가 죄송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이구 참··· 이 일을 우짜스까····]
“사람 답답하게 하지 말고 말을 좀 하세요· 뭔데 그럽니까?”
[아무려도 영민주택은 이번 사업에 선정되기 어려울 것 같으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안하네잉· 나도 어쩔 수가 읎어· 다른 곳도 아니고 우명건설에서 떡 치고 들어오니 이건 뭐 가만히 있는데 호박이 냅다 굴러들어온 상황 아니겠는가?]
강윤기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우명건설이 왜 여수에 손을 댑니까? 여기서 분양해봤자 먹을 게 얼마나 된다고?”
[근디 말이여 혹시 우명건설이랑 뭐 안 좋은 일 있었당가?]
“제가 우명건설이랑 안 좋은 일이 있을 게 뭐가 있습니까? 저 우명건설이랑 사업 선정으로 붙어본 적도 없어요·”
[하··· 참 요상허네· 그짝에서 꼭 영민주택이 안 됐으면 하는··· 여튼 영민주택이 그짝한테 징하게 못이 박힌 것은 틀림없당께· 그니께 가서 빌어보등가 하더라고· 참말로 미안하네잉·]
오정규 단장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이런 것인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방에서는 부산 정도의 대도시에서나 활약하는 우명건설이 광주광역시도 아니고 인구가 30만 명도 안 되는 촌구석에 무슨 지랄이 났다고 내려오냔 말이다·
아무래도 오정규 단장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분명 아무 이유 없이 만흥지구에 손을 대지는 않을 거다·
그 이유가 자신이라면 그깟 무릎 수십 번도 꿇을 자신이 돼 있다·
일단 정신을 차리고 샤워부스로 향했다·
오늘 아무래도 긴 하루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온 영훈은 회사에 들어가다 갑자기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아 네· 안녕하세요·”
몇 번 얼굴을 마주친 적 있는 자원개발팀 오지환 부장이었다·
하도 외국을 들락거리는 상황이라 회사에 있어도 기조실 외의 사람들과 많이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민희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해서 지나갈 때마다 유심히 바라본 적이 있었다·
“커피는 하셨어요?”
마셨다고 하면 왠지 다른 핑계를 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요· 요 앞에서 살 예정이었습니다·”
“그럼 잠시 커피 한잔 어떠십니까?”
“좋아요· 가죠·”
연희는 뒤에서 다가오다가 눈치껏 빠졌고 기조실의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박병호 부장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오지환 부장을 바라보았다·
*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넓은 프랜차이즈 커피숍에 도착한 둘은 조금 외진 자리에 앉았다·
아이스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온 오 부장이 말했다·
“몇 번 인사드린 적은 있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인사드린 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자원개발팀에서 중동 아시아 지역을 맡고 있는 오지환 부장이라고 합니다·”
“기획조정실 최영훈입니다·”
영훈은 그 틈에 손을 내밀었고 자연스럽게 악수를 나눴다·
“결혼 준비에 한창이시라고 들었는데 제가 귀한 시간 뺏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누가 회사 인트라넷에 공지라도 올렸는지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아마 연희가 범인일 거라 생각하지만 굳이 왜 퍼뜨렸냐고는 하지 않았다·
“아니에요· 일하는 시간에 결혼준비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말이 안 되죠· 그런데 저를 따로 만나자고 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실은 상무님께서 니폰유센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요?”
영훈이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오해하지는 말아주십시오· 감히 상무님의 뒤를 캐고 다니거나 한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상무님이 입사하신 지 오래되시지 않았고 굉장히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계시지만 모든 걸 다 아실 수 있는 게 아니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조금 알아본 것뿐입
니다·”
정말 필사적으로 추켜세우는 통에 뭐라 하기도 그랬다·
“아 네····”
“혹시라도 불편하시다면 앞으로는 절대 상무님의 업무를 외부에서 조력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일단 어떤 이야기인지 먼저 들어보고 판단하면 되겠죠·”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앞으로 이렇게 불러내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오지환 부장은 자못 긴장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우리 HS물산이 해주조선해양을 인수하면서 우려 섞인 시선으로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특히 가동이 중단됐던 군산조선소를 다시 움직이면서 엄청난 규모의 고정지출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해주조선해양은 거제조선소만을 돌리기에도 힘겨운 상황입니다· 그렇
기에 니폰유센에서 LNG 자동차운반선을 수주하신 건 굉장한 성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요?”
본론은 지금부터이리라·
“상무님은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여기실 겁니다· 그래서 영국 큐나드 크루즈와 접촉하면서 크루즈선까지 수주를 노려보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상무님은 단순히 몇 척의 수주를 더 받아서 회사의 매출을 올리려는 걸 넘어 앞으로 군산조선소의 안정적인
운영까지 같이 생각하고 있다고요·”
민희에게 어디까지 들어서 하는 말일까?
영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오 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사실 원청과 하청은 갑과 을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조선소는 항상 선주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요· 그런 수직적 불평등 구조에서 벗어나려면 근원적인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해운사를 인수하는 거지요· 상무님은 그중에서도 자동차운반 시장에서 세계 톱 3
안에 드는 니폰유센에 관심을 가지는 것 아닌가요?”
“글쎄요·”
“관심이 없었다면 추가 LNG선 계약 때 선박 인도 시 대금을 결제하지 못할 경우 동일한 가치의 주식으로 양도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이건 꽤 놀랐다·
해당 조건은 비공개였고 심지어 해주조선해양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력 많이 하셨네요· 만약 그렇다면요?”
“제가 니폰유센의 지분구조와 회사채 보유 현황을 파악했습니다· 매출 흐름은 견고했고 큰 문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야 오키노리가 그룹 총수의 딸과 결혼해서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한 3년 전부터 회사의 순이익이 계속 감소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작년에는 60억 엔이 넘는
당기 순손실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60억엔이라····”
“아무래도 이상해서 사업 내역을 꼼꼼히 살펴보니 배를 운행해서 번 돈으로 이상한 곳에 투자하고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AEI라는 글로벌 투자 펀드였습니다·”
“번 돈을 주식에다가 붓고 있었다는 말인 거죠?”
“맞습니다· 상당히 큰 규모의 자금을 운용하는데 인도네시아 태국 인도 등에 진출한 일본 기업에 투자하는 형식입니다· 그런데 근 몇 년 동안 이 펀드가 상당한 손실을 보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손실규모가 상당한 데다가 중국에서 건조 중인 자동차운반선에 문제가 생긴 것 때문에 또 한번 타격을 입었습니다· 계속 지켜보면서 회사 자금에 여유가 생길 때마다 조금씩 지분을 매입한다면····”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영훈의 대답에 오 부장이 움찔 놀란다·
“네? 어째서···?”
영훈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중요한 부분에서 필요 없다고 하니 덜컥 겁이 난 거다·
자고로 직장인은 윗사람에게 쓸모없는 사람으로 찍히면 승진하기 힘들다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이어진 영훈의 말은 오 부장으로서는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그것 말고 그 펀드 회사에 대해 좀 알아보시죠?”
“AEI 말입니까?”
“네·”
“어떤 식으로 알아보면 될까요? 펀드를 운용하는 회사를 알아보라는 것인지 아니면 운용하는 주 펀드매니저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가야 오키노리는 펀드 투자 같은 것에는 관심이 별로 없을 사람입니다·”
“네?”
“남는 회사 자금을 펀드로 굴려서 회사를 키워보겠다는 생각보다 그냥 배를 잘 운영해서 수익을 많이 창출하겠다는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에요·”
“그런가요?”
오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이런 얼빠진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가야 오키노리를 도대체 얼마나 자주 봤고 대화를 나눠봤다고 사람을 단번에 저렇게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영훈은 계속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그는 노력파입니다· 굉장히 성실해요· 한 방에 대박을 터뜨리겠다는 건 그의 성향과 맞지 않아요·”
단지 열심히 노력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AEI에 상당한 자금이 들어간 건 확실합니다· 상무님께서 뭔가 착각을 하고 있으신 건 아닌지요?”
“그러니까 알아보라고 하는 거예요· 대박을 노릴 사람이 아닌데 엄청난 자금이 펀드로 빠져나갔다? 그렇다면 대박을 노리는 게 아닌 다른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요?”
결론이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그 결론이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상한 건 확실했다·
어떻게 이 상황을 보고 그런 결론을 내릴 수가 있을까?
“혹시 가야 오키노리에 대해 알아보셨습니까?”
“가야 오키노리요? 사적인 부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아니요·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럼 와이프는 어떤지 모르시겠네요?”
“네? 아 네····”
“보통 재력가의 외동딸과 결혼하는 남자라고 하면 돈을 좇아서 결혼한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겠죠?”
딱 자신의 이야기임에도 영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오 부장은 그게 신기한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합니다·”
“드라마에서 보면 대개 그런 결혼을 한 남자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갑자기 옛사랑을 만난다든지 천사 같은 여자를 만나 바람을 피운다든지 하던데·”
“드라마를 보면 그런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지요·”
“그리고 대개 드라마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드라마보다 현실이 더하더라고요·”
그제야 오지환 부장은 영훈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깨달았다·
“혹시 가야 오키노리가 바람을 피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야 알 수 없지요· 그런데 궁금하네요· 뜬금없이 왜 회삿돈을 거기에 투자했을지····”
< 이빨을 드러낸 대가(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