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빨을 드러낸 대가(4) >
영민주택 강윤기 사장이 서울로 올라와 가장 먼저 연락한 곳은 당연하게도 우명건설이었다·
처음에는 어디에 연락해야 할지 몰라 일단 다짜고짜 주택영업본부에 연락해서 혹시 여수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에 진출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여자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대답 대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영민주택에서 연락한 거냐고 묻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하니 연락처를 알려주면 조만간 전화가 갈 거라는 대답을 들은 강윤기는 우명건설 본사가 있는 강남역 일대에 잠시 차를 세워 놓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차 안과 주변 커피숍을 오가며 기다리기를 한참····
그러고도 저녁 시간까지 지나고 밤 10시가 넘어가면서 가까운 호텔에 방은 잡은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영민주택 강윤기 대표님 되십니까?]
“맞습니다·”
[어디십니까?]
“강남역입니다·”
[잘 됐군요· 3번 출구에서 300미터 직진하다보면 왼편에 초콜릿이라는 바가 있습니다· 거기서 뵙죠·]
“알겠습니다·”
전화는 끊겼고 강윤기는 바로 호텔을 나와 택시를 잡고 이동했다·
초콜릿이라는 바는 찾기 어렵지 않았다·
무척이나 고급스러운 바에 들어선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 직원이 다가왔다·
“예약하셨습니까?”
“네 강윤기라고 하는데····”
“이쪽으로 오시죠·”
직원은 미리 이야기를 들었는지 바로 가게 가장 안쪽으로 안내했다·
거기에는 두 명의 남자가 서로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중이었다·
“혹시····”
“영민주택 강 사장?”
둘 중에 딱 봐도 조금 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가진 남자가 대뜸 하대를 한다·
이 자리의 주인이 그 자인 것이 확실했다·
“네? 예 맞습니다·”
“앉아요·”
턱짓으로 앞자리를 권한다·
건방지기 그지없지만 행동의 자연스러움을 보면 그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했다·
적어도 우명그룹 회장의 피가 섞인 사람이리라·
아무리 자신이 지방에서 나름 힘 좀 쓰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명그룹은 한국을 넘어서 대형 규모의 해외건설까지 수주하는 수준이다·
감히 넘볼 수도 없는 클래스였다
그 남자는 말 없이 앞의 술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강윤기가 서둘러 잔을 받을 때 그가 말했다·
“놀랐죠?”
주어가 빠져 있었지만 무얼 묻는 건지는 알았다·
“네? 네· 놀랐습니다·”
“우리 윤 부장도 그날 여수에 처음 갔었다고 해요· 그렇게 뽈뽈거리고 돌아다녔으면서 여수는 처음 가봤다니 그건 좀 웃기다니까· 강 사장님·”
“네?”
“여수 그림자도 못 밟아봤던 우리 윤 부장이 굳이 거기까지 간 건 다 당신 때문이야·”
강윤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때문이요?”
“그럼 우리가 뭐 먹을 게 있다고 여수까지 가서 그 지랄을 했겠어요? 기껏 똥 싸며 아파트 올려 봐야 분양가 얼마나 나오겠어? 평당 천? 잘하면 천오백?”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핀잔하듯 말했다·
“천오백 안 나오지·”
“들었죠? 천오백도 안 나온다네· 그럼 우리가 거기까지 가서 왜 그 지랄을 해야 하는 건데?”
“그게 저 때문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그런데 술 안 좋아해요?”
“아닙니다·”
강윤기는 단번에 글라스잔에 가득 담긴 술을 원샷으로 들이켰다·
목구멍에 불이 날 것 같았지만 그는 억지로 그 고통을 삼켰다·
“술 잘하네요· 깡이 있나 봐? 그런데 아무리 깡이 좋아도 그러면 안 되지·”
“제가 누구에게 실수한 건지만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면? 복수라도 하게?”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알아야 실수를 만회라도····”
창훈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끊었다·
“흥! 만회는 무슨··· 당신 이미 찍혔어· 그것도 아주 독하게· 건드려도 하필 왜 그 인간을 건드려 가지고는···· 당신 때문에 우리도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당신 때문에 돈도 안 되는 공사 억지로 맡아서 해야 하잖아·”
처음에는 중간중간 존댓말도 섞던 창훈은 아예 말을 놓고 비난을 퍼부었다·
참담한 상황이었지만 강윤기는 고개를 푹 숙이고 감히 반항하는 티도 내지 못했다·
상대가 될만한 사람이라야 꿈틀이라도 해볼 텐데 대한민국에서 재벌 3세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한다는 게 얼마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인지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재벌 3세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자신이 건드렸다?
사람을 못 알아본 자신의 눈깔을 파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다만 제가 무슨 잘못을 어떻게 했는지 알려주신다면 앞으로 이런 실수는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잘 생각해봐· 요새 누구한테 뭘 잘못한 것 같지 않아?”
창훈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강윤기는 천천히 과거를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당연하겠지만 그 생각은 조재민 시장에서 멈춰졌는데 강윤기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조재민 시장님이···?”
군산시장이 되기 전만 해도 광주에서만 놀던 지역 정치인이 바로 그였다·
안 그래도 전라도 지역에서 발이 넓은 강윤기인데 조재민 시장이 어느 정도 되는 인물인지 모를 수 있을까?
군산의 터줏대감인 강주원 의원 밑에서 겨우 얼굴이나 들고 다녔던 조 시장이 우명그룹 핏줄을 움직였다?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건 알 필요 없고··· 그런데 맥락이 비슷하긴 해·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 아니네·”
확인사살이다·
결국 조 시장을 건들면서 자신이 모르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강윤기는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절대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이 아깝기는 하지만 그냥 여수에서 손을 떼고 끝난다면 후일은 도모해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수에서 끝나지 않을 경우였다·
앞으로 공공부문 사업공고가 날 때마다 이렇게 잡아먹겠다고 달려들면 지방의 소규모 건설사는 죽을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해서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 상황인 거다·
“나도 그쪽한테 원한이 있는 건 아니니까 나한테 그렇게 고개 숙일 필요는 없어요· 딱 한 가지만 주의하고 살자고요· 내가 건드려도 될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분간하면서 삽시다·”
“명심하겠습니다·”
“한잔 더 해요·”
창훈이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고 강윤기는 이번에도 단번에 목구멍 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창훈이 빙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여수 깔끔하게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노려보도록 해요·”
한번 호되게 혼내주고 끝내겠다는 말에 강윤기는 저승 구경 한번 하고 돌아온 안도감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여수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에 들어간 비용이 아깝긴 했지만 일단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면 버리는 셈 칠 수 있었다·
“그럼 우리 다음에는 혹시 보더라도 기분 좋게 봅시다· 가보세요·”
강윤기는 90도로 허리를 숙이고는 가게를 나갔다·
멀어져가는 강윤기의 뒷모습을 보며 여유롭던 창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 이제 하나 처리했네·”
“회장님은 뭐라고 해?”
“뭐라고 하긴· 나한테 여수에 자신 모르게 땅 사놨냐고 물어보시더라·”
“크크큭····”
“아니라고 해도 잘 안 믿으시던데? 하긴 씨발 나라도 못 믿지· 갑자기 돈도 안 되는 여수에 아파트 올린다는 데 꿍꿍이가 있지 않으면 말이 안 되는 거잖아?”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내가 아버지 설득하려고 어젯밤에 여수시 관계자한테 자료 얻어서 앞으로 10년 치 개발 계획 공부했다· 그런데 신기한 게 그거 계속 읽다 보니까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공부를 하는 건지 세뇌가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아버지한테 땅 안 산 거 증명하려고 무려 30분을 브
리핑했다·”
“오오··· 회장님이 수긍하셔?”
“아니 그냥 ‘땅 산 거 숨기느라고 열심히 노력하는구나’하는 딱 그 표정?”
“그래서 결론은 승낙해줬다는 거지?”
“응 아들이 만흥지구 주변에 땅 산 거 같은 느낌이 들 텐데 어떻게 말려? 미심쩍어하면서도 잘 해보라고 하시더라고· 게다가 우리가 이번 인도 건에서 확실히 점수 벌었잖냐·”
인도까지 가서 라마누잔 차관을 만난 것까지 회장의 귀에 전부 들어갔다·
단지 김태현 회장은 창훈이 인도에 가서 일을 잘 마무리해 신공항 건설에 차질이 없도록 능력을 발휘했다고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니 여수에서 아들이 조금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해도 넘어가는 것이리라·
“하긴····”
윤희찬 부장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창훈이 갑자기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 형이 나 선 안 보는 거 가지고 아직도 지원이 못 잊었냐고 하더라· 씨발 이름은 기억도 못하대?”
“개새끼····”
“내가 진짜 나중에····”
그때 그들이 앉은 자리로 누군가가 스윽 다가왔다·
“앉아도 되죠?”
“아 그럼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 앞에 나타난 사람은 최영훈 상무였다·
영훈은 바를 주욱 둘러보고는 말했다·
“가게 분위기 좋네요· 강윤기 사장과는 말씀 잘 나누셨습니까?”
창훈은 자세를 바로 하고 대답했다·
“네· 단단히 일러뒀습니다· 그래도 머리가 안 돌아가는 놈은 아닌지 상황 파악 못 하고 날뛰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앞으로 상무님 앞에서 건방지게 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 대신 교육시켜 주느라고 고생했습니다·”
“고생은요· 제가 뭘 했다고 하하하!”
윤 부장은 여수까지 다녀온 건 자신인데 말 몇 마디 한 걸 가지고 자화자찬하는 창훈을 보며 눈을 흘겼지만 뭐라 하지는 않았다·
“그럼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합시다· 말씀드렸듯이 이번 계약은 우명건설이 주도하는 것으로 하되 설계 부분에서 우리 기술자가 합동으로 참여하는 겁니다· 두 회사의 이익이 어긋나는 부분이 생긴다면 HS건설의 제안을 우선으로 합니다· 그에 관한 계약서는 상무님과 저만 가지고 있는
거고요· 아시겠죠?”
창훈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인도 신공항 건설에 필요한 중장비 계약 업체는··· 우명건설기계로 하기를 원하시죠?”
창훈은 긴장감을 토하듯 큰 소리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이익이 문제가 아니라 중장비 계약을 우명건설기계로 하지 않으면 그룹에서 저를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좋아요· 그럼 우명건설기계를 선정하기로 합시다·”
어차피 중장비 생산업체 현진기계는 HS그룹 계열사도 아니었고 현진기계 김대영 사장은 임지은 사장의 남편이었다·
사실 창훈도 그 부분을 알고 있을 것이기에 내심 중장비업체 계약은 우명건설기계로 할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다만 갑이 자신이 아니었기에 가슴 졸이며 긴장하고 있었던 거였다·
“감사합니다·”
“대신 그····”
영훈은 살며시 두 사람의 눈길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대신 어떤 걸···?”
윤 부장이 물어보자 영훈은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전에 말씀하셨던 인도네시아 신도시 건설 있지요?”
“아~ 네·”
“그걸 좀 같이 하고 싶은데····”
전에 필요 없다는 식으로 대차게 까놓고선 다시 말하려니 민망했던 거다·
신공항 건설만 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막상 HS건설 관계자들에게 들으니 만약 참여만 할 수 있다면 어떤 공사든 다 참여하는 게 좋다는 말에 슬그머니 다시 카드를 내밀어본 거였다·
어차피 중장비 업체를 우명그룹 계열사로 할 테니 뭐라도 하나 건져야 할 것 같았다·
“네·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확실히 밀어붙여서 협력업체로 선정 마무리 짓겠습니다·”
창훈이 전혀 문제없다는 표정으로 큰소리를 쳤다·
그래도 저렇게 말해주니 영훈으로서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하하 그럼 다행이고요·”
“우리가 처음에는 만남이 조금 이상했지만 원래 남자들은 어렸을 때 치고받고 싸우면서 크는 거 아니겠습니까· 원래 저랑 여기 윤 부장도 고등학교 때부터 1 2 3학년 전부 같은 반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싸웠는지 몰라요· 그러다 이렇게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됐습니다· 그런 의
미로 오늘 거하게 마셔보는 거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좋은 친구가 생긴다면 저 역시 나쁘지 않죠· 그런데 두 분은 어렸을 때 왜 그렇게 싸웠습니까?”
창훈이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둘 다 좋아하는 여자가 같았거든요· 서로 차지하겠다고 무지하게 싸웠습니다·”
“아··· 그렇군요·”
영훈은 더 말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안쓰러운 것도 미안한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맞은 편의 둘은 영훈의 표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 이빨을 드러낸 대가(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