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3) >
6월의 첫 토요일·
신라호텔 입구에는 여느 때처럼 최고급 세단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송은채 회장은 곱게 한복을 입고 하객들을 반기고 있었다·
HS그룹 회장이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그녀의 말투와 풍기는 분위기는 확실히 작년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그걸 가장 확실히 느낀 사람은 전 현진관광 사장이었던 임지은이었다·
“남편은 다 죽어가는데 어째 올케는 더 젊어진 것 같네?”
마음에 쌓인 울분이 커서인지 결혼식 날에도 그녀의 입에서는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형님 왔어요? 형님은 얼굴이 더 안 좋아 보이네요· 마음고생이 심하신 것 같은데 이제 편히 내려놓고 쉬시는게 어때요?”
송 회장도 이제는 옛날과 달리 참지 않았다·
“말하는거 보니까 옛날에 어떻게 집에서 살림만 했나 몰라? 답답해서 어떻게 견뎠어?”
“젊었을 땐 전업주부가 꿈이었는데 막상 소질은 경영에 있었나 봐요· 안에 연희 아빠 있으니까 가서 인사 나누세요·”
더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다는 투의 송 회장 태도에 임지은 전 사장은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뒤를 이어 줄줄이 송 회장에게 축하를 건네는 사람들 때문에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반면 신부석에 대기하고 있는 연희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자못 긴장한 채 친구들을 반기고 있었다·
한동안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연희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예쁘네·”
창훈이 쑥스러운 듯 인사했다·
우명그룹의 둘째인 김창훈 상무는 언제나처럼 윤희찬 부장을 데리고 결혼식에 참석하러 왔다·
“고마워 와줘서·”
“최영훈 상무 좋은 사람 같더라·”
“웬일이야? 남 칭찬을 다 하고?”
“그렇다고 좋아서 칭찬하는 건 아니야· 분하지만 어쩌겠어?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지· 널 가졌잖아·”
창훈은 의외로 평온해 보였다·
“축의금은 많이 들고 왔어?”
“아무렴· 대신 너한테는 안줄 거다· 남자 쪽에 넣어야지·”
“그 돈은 내 돈 아니고?”
“남자도 때로는 비상금이 필요해· 넌 돈 많잖아·”
그렇게 시덥지 않은 소리를 해대던 창훈은 잠시 멈칫하고는 말했다·
“행복해라·”
“고마워·”
그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신부대기실을 나왔다·
“괜히 인사하다가 눈물 보이고 그런 거 아니지?”
윤 부장이 다가와 놀리듯 말한다·
“미쳤냐? 눈물은 무슨··· 조금 씁쓸한 정도지·”
“새끼··· 그런데 대단하긴 하다· 아무리 HS그룹이 커졌다고는 해도 정·재계에서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은 다 왔어· 조재민 시장이 주례를 서서 그런가?”
“단순히 주례를 봐주기 때문은 아닐 거야· 저기 최 상무 쪽 봐봐·”
윤 부장은 입구 한 쪽에서 한창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있는 최 상무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람 많네·”
“그렇지?”
“들리는 말로는 어느 대학 나왔는지 어디 출신인지도 전부 비밀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또래 사람은 없네·”
“내가 열 살 때였나? 하여튼 초등학교 때일 거야· 작은 고모 결혼식이었는데 당시 결혼식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축하하러 온 하객들이 전부 우리 아버지에게 저런 얼굴로 다가와 인사를 해대곤 했는데 나이도 많은 어르신들이 딱 봐도 어려 보이는 우리 아버지한테 고개를 숙이고
잘 보이려고 하더라고· 그 어린 나이에도 저들이 어떤 마음인지 대략 짐작이 갔었어·”
“오~ 권력 DNA인가? 조기교육이 이래서 중요한 거라니까·”
“맞아· 당시 큰아버지가 떡하니 자리를 하고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기가막히게 우리 아버지에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했었어·”
“아··· 큰아버지··· 그랬겠네· 큰아버지가 우명식품 가지고 독립했었지?”
“말이 독립이지 거의 쫓겨난 거나 다름없었지·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는 큰아버지가 쫓겨나기 전인데도 사람들은 귀신같이 누가 권력을 잡을지 알았던 것 같아· 지금처럼···”
창훈의 말처럼 턱시도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최영훈 상무의 앞으로 축하 인사를 건네기 위한 하객들의 줄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HS그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하청업체 대표는 물론이고 타 기업 핵심 관계자와 정치인들까지 최영훈 상무에게 전부 얼굴도장을 찍고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창훈이 어렵게 발걸음을 떼고 다가갔다·
몇 명의 사람이 최 상무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고 난 뒤 그의 차례가 되자 영훈의 조금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와서 놀랐습니까?”
“조금은요· 일은 일이고 이건 사적인 거라서 안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안 좋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아프지도 않습니다· 내 짝은 또 찾으면 되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축의금은 남자 쪽에 낼 테니까 나중에 그만큼 신경 써주셔야 합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그 이상 보답하도록 하죠·”
“그럼···”
창훈은 그의 말처럼 그리 마음 아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이 꼭 가져야 할 장난감을 뺏긴 기분일 거라는 걸 영훈은 알고 있었다·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손을 덥석 잡았다·
“축하해요·”
“아 오셨습니까· 감사합니다·”
사람 좋은 미소로 손을 흔들어대고 있는 사람은 천보윤 국회의원이었다·
그때 만남 이후 연락이 없었는데 예의상 보좌관에게 보낸 청첩장을 잊지 않고 찾아온 것이다·
“내가 이렇게 와서 보니 최영훈 상무 인기를 알 수 있겠어요· 대단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때 최 상무와 대화를 나누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 말로는 팩트 폭행이라고 하죠? 하하하 아주 팩트 폭행을 제대로 당했습니다· 내 조만간 답을 드리도록 하지요·”
무진중공업이 잠수함 사업에 손을 대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 바로 해주조선해양에 해당 이야기를 전달했다·
송유철 사장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대책회의를 소집하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해당 기술을 보유하기 위해 지내온 세월과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반드시 사업을 뺏기지 않을 거라고 투지를 불태웠다·
3조 원이 넘는 프로젝트고 이후 해외 수출까지 고려한다면 지금 그 가치를 책정하기 어려울 만큼 중요한 사안이다·
천보윤 의원은 이렇듯 해주조선해양에게 민감한 사안을 툭 던져줘 놓고 이제 자신이 해결해보겠다고 자신했다·
아직 해주조선해양에서 알아낸 정보가 없었기에 그가 진실로 무진중공업에서 알아낸 내용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을 떠보기 위해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쨌든 결론은 계속 인연을 이어가 보겠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한 상황이었다·
아마도 조재민 시장의 입김이나 칭찬이 그에게 영향을 끼쳤으리라·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지금 조재민 시장의 성장을 보고 욕심이 생겼을 수도 있겠다·
“조재민 시장님이 저에 대해 너무 좋은 말씀만 하셨나보군요·”
“허허 이거 갑자기 왜 약한 소리를 하십니까?”
“너무 큰 기대를 걸고 있으실까 봐 그렇습니다·”
천보윤 의원은 가만히 미소 짓다가 물었다·
“최 상무는 주식투자 합니까?”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
“아니요· 아직 월급만 꼬박꼬박 모으고 있습니다·”
“주식을 하다 보면 말이에요· 주변에서 수많은 정보가 들려옵니다· 어디는 뭘 연구중이라더라 어디서 뭘 개발했다더라 아주 정신이 없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전부 날 잡아먹으려고 드는 귀신들 같다니까? 하하하! 그런데 말이에요· 결국 투자는 내가 하는 겁니다· 정치인이 되면 옆에서
떡 하나라도 더 먹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는 거 당연한 거예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가려내고 판단해서 선택하는 게 내 일입니다· 내가 사람을 잘 못 봤으면 오롯이 내 책임일 뿐이니 최 상무는 벌써부터 엉덩이 빼고 그러지 말아요· 엉덩이는 나처럼 잃을 게 많은 영감들이나 빼는
겁니다· 하하하!”
그는 그렇게 말하고 영훈의 팔을 툭 치고는 식장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가슴이 무거워짐을 느끼는 순간 저 멀리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잠시 누구였는지 생각하다가 떠오른 얼굴·
영훈은 그 사람이 사라진 방향으로 얼른 발길을 움직였다·
화장실 옆에서 오줌 마려운 강아지 마냥 서성이는 남자·
바로 멀끔하게 차려입은 명우도사였다·
그는 영훈이 쫓아온 걸 보고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놀랐지? 원래는 안 오려고 했는데 그냥 궁금했다·”
“왔으면 인사라도 하지 뭘 도망가요?”
“염치가 없어서 그러지···”
“그만 둔 거예요?”
머리도 자르고 깔끔한 정장에 한껏 멋을 낸 그는 누가 보면 오늘 선이라도 보러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너 가고 싹 정리했다· 제자들 내보내고 논현동에 아파트도 하나 얻었다·”
“뭐 하고 살려구요?”
“모아놓은 돈 많아· 그거 다 쓰고 죽으려고 해도 힘들어·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집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처가가 저리 대단하니···”
“처가 상황을 떠나서 내가 받지도 않아요·”
“뭐 그렇겠지· 알고 있다·”
“식 보고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
“됐어· 난 스테이크보단 갈비탕이 더 좋아·”
“그래도 기왕 왔으니까 고기 한 점이라도 드시고 가요·”
다른 날이라면 그냥 보냈겠지만 인생 한 번뿐인 결혼식에서 매정하게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렸다·
명우도사는 그게 고마운지 못이기는 척 수긍한다·
“그럼 그럴까?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어디 가서 티 내고 다닐 일 없을 거다· 앞자리에 앉을 욕심 안 부리니까 저 뒤에서 구경이나 하다 가마·”
“그러세요·”
영훈은 그렇게까지만 말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오늘 그가 올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아들 결혼식 구경이라도 하고 싶다고 연희에게 연락했었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안 된다고 할까 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었다·
연희도 영훈의 마음을 듣고 식장에 들어올 수 있도록 청첩장을 보내 조용히 보다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여~ 축하해!”
신영금융지주의 이형준 상무도 오늘 자리에 빠질 수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HS그룹의 가장 가까운 파트너인 그가 아닌가·
“감사합니다·”
“결혼하면 인생 선배가 된다던데 최 상무도 이제 내 선배되겠네?”
“선배 노릇 해 드려요?”
“됐다· 안 그래도 가르침 많이 받고 있는데 선배 노릇까지 하면 귀에서 피나· 연희 아버님은?”
“서서 인사하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셔서 식장 안에 앉아 계세요·”
“그래도 딸 결혼식은 보시겠네· 다행이야· 그건 그렇고 최 상무 비서는?”
“아··· 민희 씨요?”
“안 오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그는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축의금 안 냈습니까? 거기에 있을 텐데?”
일가친척이나 친구 하나 없는 영훈이기에 축의금을 받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혀 놓을 사람이 민희밖에 없었다·
“아 그래? 난 먼저 인사하고 축의금 내려고 그랬지· 그래 어쨌든 축하하고· 잘 살아·”
그는 희희낙락하며 품에서 봉투를 꺼내 흔들어 보이고는 잽싸게 발걸음을 놀렸다·
축의금 받는 자리에 가서 사인을 하고 한동안 민희에게 말을 거는 걸 보니 결혼식 끝나고 또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 게 틀림없었다·
왠지 그 모습이 더없이 좋아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더 하객을 받고 나서 시작된 결혼식·
터질 듯 쿵쾅대는 심장은 신랑 입장 때 수위를 모르고 오르다 신부 입장 때 그 고점을 찍었다·
너무 긴장된 나머지 그 오래 걸린다는 주례도 순식간에 흘러갔다·
신랑 측 부모님 좌석이 썰렁하게 빈 모습 때문에 곳곳에서 수근댔지만 감히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결혼 축하하고··· 미안했다· 애비를 용서해다오·”
몸이 불편한 임지훈 사장은 울먹이는 딸을 보며 용서를 구했고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항으로 떠나는 차에 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성대하게 결혼식을 끝내고 약 열흘 정도의 신혼여행을 다녀온 영훈 커플이 한국 도착 후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임창호 회장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부산 백병원이었다·
겨우 숨을 이어가는 임창호 회장의 손을 연희가 꼬옥 쥐어주고 나서 서울로 돌아왔을 때 임창호 회장의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안 좋은 일은 연이어 겹친다고 했던가?
3개월 뒤 연희의 아버지인 임지훈 전 사장 역시 세상을 떠났다·
HS그룹은 연이은 악재에 더이상 회사를 확장하기보단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했고 그렇게 시간을 흘렀다·
영훈과 연희의 결혼 1주년의 시간은 그렇게 훌쩍 다가왔다·
< 결혼(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