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끼를 노리는 자들(1) >
김태민 현진중공업 회장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래서 얼마나 필요해요?”
태민의 물음에 이대준 전무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석 달 뒤에 4천5백억 그리고 12월에 7천억입니다·”
“얼마나 부족할 것 같아요?”
“9월에 옐로그에서 FPX(반잠수식원유생산설비) 대금 일부가 들어오기는 하는데 많이 부족할 겁니다· 최소 5천억은 더 필요합니다·”
작년 회장으로 취임하며 발생한 경영권 분쟁을 획기적으로 방어하며 좋은 평판을 올렸지만 어쨌거나 그 때문에 주가가 떨어진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후 그룹에 안정적으로 현금을 창출할 수 있는 현진관광이 날아간 상황에서 박살 난 해양 플랜트 경기가 도무지 돌아올 줄 몰랐다·
여기서 문제는 기존에 발주한 업체들이 도산하며 현진중공업에서 생산 중인 설비가 공중에 붕 뜨는 최악의 경우까지 겹치고 말았다·
작년의 좋던 분위기가 올해 접어들며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받아야 할 설비대금만 1조 6천억이 넘었음에도 현진중공업은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할 위기에 몰렸다·
“후····”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
이대준 전무는 그의 눈치를 흘깃 보다 어렵사리 말했다·
“채권단에 추가 지원을 요청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LNG선의 경기가 계속 좋아지는 중이고 거제 조선소에 쌓인 일감만 최소 3년치입니다· 충분히 해볼 만할 겁니다·”
“지금까지 빌린 돈이 얼만데 차입금 규모가 너무 크잖아요· 카드 돌려막기도 아니고 빚 갚겠다고 돈 꾸겠다는데 이자는 또 얼마나 받으려고 하겠어요· 그러지 말고 이번에 계약하는 LNG선을 선금 50%로 밀어보면 어때요?”
이대준 전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금을 50%나요? 힘듭니다· 경쟁력이 없습니다·”
어차피 김태민 회장 역시 정말로 될 수 있다고 확신하며 꺼낸 말은 아니었다·
“그럼 무슨 방법 있습니까?”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계열사 자산을 매각하면 5천억 정도는 처리할 수 있겠지만 그게 태민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는 걸 이대준 전무는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전 직원이 허리띠 졸라서 최대한 비용을 줄여보겠습니다만 주 채권 은행과 대화는 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후··· 해주조선해양 쪽은 어때요?”
“해주조선해양은 작년 HS그룹이 인수하기 전부터 해양사업부 공장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HS그룹이 인수한 이후에도 해양사업부 공장은 돌리지 않고 있습니다· 아예 해양플랜트 사업은 손을 놓은 모양새입니다·”
“미얀마 가스전개발사업에 진출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작년 중순 즈음해서 미얀마 가스전개발사업에 EPCIC(설계와 자재 조달 설비 제작 설치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한 회사가 도맡는 계약)로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 들리긴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쏙 들어갔습니다· 이제는 아예 크루즈선으로 방향을 턴해서 해양사업부 대신 크루즈선을
차기 성장 동력으로 삼으려는 것 같습니다·”
“미친놈들··· 손댈 게 따로 있지····”
작년 해주조선해양이 크루즈선을 수주한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현진중공업 임직원 누구도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워크아웃을 갓 졸업했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회사가 감히 건드릴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크루즈선 수주 기사가 공시로 뜨고 해주조선해양 주가가 폭락할 때 김태민 회장은 그걸 보고 배를 잡고 웃었던 게 고작 1년도 채 되지 않았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는데 이대준 전무는 침중한 얼굴로 다른 의견을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해주조선해양의 상태는 의외로 나쁘지 않은 상황입니다· 해양사업부 공장을 닫고 그 인원을 전부 조선사업부로 돌리면서 생산량을 올렸습니다· 또 텅 빌 거라고 생각했던 군산조선소가 쉬지 않고 돌아가면서 자동차 운반선이나 LNG선 추가 건조로 자금
사정이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큐나드 크루즈에서 선금을 20%나 주면서 초기 프로젝트는 손해를 보면서 기술을 확보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실제 수익이 날 수도 있다는 분위기까지 돌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선박을 언제 인도할지가 관건이고 그걸 언제 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가 없는데?”
“그게 내부적으로는 상당히 확신에 차 있다는 말이 돌아서····”
“전무님도 참··· 순진한 거예요? 아니면 답답한 거예요?”
“죄송합니다·”
“일단 알겠어요· 가보세요·”
이대준 전무가 고개를 숙이고 회장실을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인 임지은이 들어왔다·
“이 전무가 뭐라고 하든?”
“어렵다고 하네요·”
“아휴~ 정말··· 현진관광이 있었으면 이런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
현진관광이 가진 호텔과 현금동원력을 생각하면 그녀는 지금도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고는 했다·
“지나간 버스 손 흔들어봐야 뭐해요?”
“그러게 내가 주연이 걔랑 잘 해보라고 진즉 말했잖아· 이제 걔랑 아예 끊어진 거지?”
작년 이맘때쯤이었을 거다·
한주연과 어느 순간부터 거리가 생긴 이후 태민은 그녀의 마음을 붙잡고자 애써 노력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그런 태민에게 다가서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거리가 멀어진 둘은 이제는 거의 연락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다른 남자를 만나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태민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뿌리친 그녀에게 배신감만을 느낄 뿐이었다·
“걔 이야기는 더 꺼내지 말아요· 언제적 한주연이야?”
“안타까워서 그러지· 너 우명패션 걔··· 솔직히 엄마는 마음에 안 든다· 우명패션이 뭐 가지고 있니? 지금은 다 망한 아웃도어 브랜드 보니까 내가 가슴이 다 철렁하더라·”
“우명패션이 아웃도어만 있어요? 다른 것들 많아·”
“많아 봤자지· 아휴··· 내가 현진관광 뺏기고 가슴에 화병이 생겼는데 그 망할 것이 노드린가 뭔가 가지고 와서 대박 낸 거 보고 난 오래 살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든다· 나 죽기 전에 네가 엄마 소원 풀어줘야 해· 내 소원 알지?”
“HS그룹 밟아주는 거?”
“그래· HS물산이랑 HS관광 다시 찾아와야 한다· 그게 내 소원이야·”
“후··· 알겠어요·”
지금 회사가 죽느냐 마느냐 하는 판이었지만 어디 어머니의 눈에 그런 게 보일까 싶었다·
“말로만 그러지 말고 너 요즘 회사 사정 안 좋잖아· 그럼 얼른 우명 걔라도 잡아서 결혼해· 솔직히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지금 걔보다 나은 애를 언제 찾겠니?”
“결혼해서? 우명패션 가져와서 매각이라도 하려고요?”
“그러면 좋고 아니라도 회사 재무건전성 좋다니까 거기서 자금이라도 끌어올 수 있지 않겠어? 게다가 우명건설 요즘 좋다며? 아마 패션은 쉽게 넘겨줄 거야·”
“하여튼 엄마 변덕은····”
태민은 고개를 흔들었지만 어머니의 말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녀가 가질 기업이라면 남편이 일찍 가져서 그룹에 도움이 되는 게 나을 테니까·
태민은 조만간 만남을 가져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브라이튼 챔피언십 우승으로 승격 확정]
국내에서 외국 2부리그 구단의 승격 소식이 톱기사로 다루어질 리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HS그룹 만큼은 브라이튼의 챔피언십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특히 해주조선해양은 브라이튼의 챔피언십 우승을 회사 SNS 계정으로 축하하며 신경을 썼을 정도다·
이유야 간단했다·
하청업체가 원청업체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브라이튼의 챔피언십 우승으로 작년 연말부터 군산조선소에서 시작된 크루즈선 건조에 투입된 근로자들은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괜히 구단주가 돈이 없다는 핑계로 프로젝트를 파투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현장에 한가득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브라이튼의 승격 소식을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이 송유철 사장이라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하하 아무래도 HS그룹은 운을 타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2부리그에서 승격되는 게 그렇게 어렵다면서요?”
송 사장은 영훈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웃었다·
“그렇다고 하더군요· 크루즈선 건조는 어떻게 돼갑니까?”
“순조롭습니다· 원체 선박 설계 이전부터 큐나드 크루즈에서 많은 도움을 줬기 때문에 작업속도는 상당히 빠릅니다· 문제는 기본 골격이나 소음저감 등의 기술이 아니라 내장 인테리어죠· 잘 가르쳐줬다고는 하지만 완전히 똑같은 선박을 만드는 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군산에서 만드
는 건 우리만의 차별화된 컨셉과 철학이 있어야 하는데··· 아마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것 같습니다·”
“HS관광 쪽에서 도움을 받아도 힘들까요?”
“그 부분까지 고려했지만 호텔 임직원들이라고 해도 모든 걸 알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 도움이 되는 건 맞습니다· 특히 유럽과 미국 현지 직원들의 안목과 경험이 적지 않게 투입될 예정이긴 한데 그래도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을 겁니다·”
“그래도 잘 해낼 겁니다· 그렇게 믿고 있어요·”
“잘 해내긴 할 겁니다· 우리 직원들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모자란 부분을 흡수하려는 집념만큼은 대단한 친구들이거든요· 다만 그 과정에서 회사가 감내해야 하는 자금 규모가 수천억 단위라는 게 문제일 겁니다·”
“최선을 다한다면 그건 경영진이 해결해야 할 문제일 겁니다·”
담담히 대답하는 영훈을 보며 송유철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잘하면 내 탓 안 되면 남 탓으로 회사를 망하게 하는 부류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데에서 오는 안도감이다·
반면 영훈으로서는 Nodri Clare가 중국에서 대박을 터뜨리면서 자금적으로 상당한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7천억에 산 Nodri Clare가 현재 5조를 불러도 팔지 않는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다시 송유철 사장은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방위사업청에서 차기 잠수함 사업을 공개경쟁입찰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영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한 겁니까?”
“야당 국방위원회 의원이 해주조선해양은 재무적으로 건실하지 않고 가격적으로 메리트가 없다면서 공개경쟁입찰을 진행해야 한다고 밀어붙이고 있다 합니다· 여당에서는 굳이 그걸 거부하면서 우리로 진행해야 할 부담을 질 필요가 없을 테지요·”
이전 잠수함 사업을 따내면서 이후 차기 잠수함 사업에도 해주조선해양을 우선협상진행자로 선정해 진행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전 사업을 진행하던 시기는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고 그때 해주조선해양과 계약을 조율했던 관계자들은 다들 어딘가로 가고 없었다·
서류로 남은 약속이 아니었기에 송 사장은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무진중공업이 뛰어들겠네요?”
“그럴 겁니다· 1차 잠수함 사업은 그쪽에서 했으니까요· 작년 이맘때 상무님이 우려했던 게 정확히 그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흐음··· 일단 지켜보시죠·”
천보윤 의원이 그렇게 자신했던 사안이 이렇게 쉽게 어그러진다?
적어도 안 될 일이라면 사인 정도는 줘야 했다·
만나서 물어봐야 정확한 사정을 알 수 있으리라·
“조재민 시장을 통해서 여당 쪽에 압박을 넣으시려는 겁니까?”
“아직 정해진 건 없습니다·”
입을 열지 않는 영훈을 보며 송 사장은 답답한 마음을 애써 누그러뜨렸다·
이제 여러 번 겪어 본 바로 최영훈 상무는 한번 어떤 사안에 입을 다물면 좀체 열리지 않음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알겠습니다·”
“자동차 운반선은 언제 인도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석달 안에 인도 가능합니다· 니폰유센에 인도될 LNG선은 올해 말은 넘기지 않을 겁니다· 자동차 운반선이 인도되면서 확보되는 자금을 생각하면····”
송유철 사장이 말하고 있을 때 영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발신자는 오지환 자원사업팀 부장이었다·
“여보세요?”
[상무님 저 오지환 부장입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네 괜찮아요·”
[니폰유센이 다이와 은행에 천억 엔 규모 차입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천억 엔이요?”
무려 1조 원 규모다·
[네· 아무래도 AEI에 투자한 금액이 상당 부분 손실을 본 것으로 예상됩니다·]
“다이와 은행에서 대출 진행할 것 같나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가야 오키노리의 올해 운은 토끼가 늑대를 만난 격으로 조만간 크게 낭패를 당할 수 있어 극히 조심해야 하는 시기였다·
영훈은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일본으로 가겠습니다· 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오지환 부장의 음성은 어딘가 모르게 들떠있는 것 같았다·
< 토끼를 노리는 자들(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