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끼를 노리는 자들(2) >
오지환 부장에게 전화를 받고 정확히 이틀 후 나리타 국제공항에 도착한 영훈과 오지환 부장은 곧장 도쿄의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서울에서 공항을 거쳐 일본에 오기까지 오 부장은 일견 여유롭게 보이면서도 단단히 각오를 다진 모습으로 마치 눈에서 레이저를 발산하는 듯 보였다·
가만히 앉아 있는 여유를 가질 때에도 그는 영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살피며 목이 마른 건 아닌지 어디가 불편하지는 않은지 체크하는 모습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할까?
퉁퉁한 살집 때문인지 그리 덥지 않음에도 한 손에 손수건을 들고 연신 땀을 닦는 모습을 보면 만사 다 귀찮아 할 것 같은 느낌이지만 막상 그와 대화를 나눠보면 잠시도 긴장을 늦추고 있지 않았다·
호텔을 잡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짐을 풀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니폰유센의 동향을 체크했고 심지어 방의 청소상태까지 꼼꼼히 살피기까지 했다·
물론 영훈으로서는 그런 그의 행동이 그렇게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비록 승진을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 맡은 일을 성공시키려는 모습이니 좋게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니폰유센의 재무 건전성에 대한 의구심은 리소나··· 아 제가 전에 다이와 은행이라고 말씀드렸죠? 현재는 리소나 은행입니다· 어쨌든 리소나 은행을 제외하고도 다른 금융권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합니다·”
“AEI라는 펀드에 대해서 말해봐요·”
“노무라 증권에서 운영하는 글로벌 투자 펀드 중 하나인데 우츠가 루미라는 여자가 운용하고 있습니다· 작년 펀드 평가 수익률이 –11%였는데 특히 동남아시아에 투자했던 자금이 상당히 큰 손실을 봤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지환 부장은 숨이 차는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에 상무님께서 그의 여자관계를 주목하라고 말씀하셔서 일본에 있는 주재원에게 사람을 고용해 그의 뒤를 은밀히 파악해보라고 지시했습니다· 타국에서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이 어려워 최근에야 일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결과를 듣고 정말 놀랐습니다· 그가 우츠가 루미라
는 펀드매니저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었거든요· 상무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던 건가요?”
“그냥 그럴 거라고 느꼈습니다· 계속해보세요·”
“우츠가 루미는 니폰유센에서 지속적으로 유입된 자금으로 상당한 보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마이너스 11%의 수익률을 기록하고도 작년에 보너스만 5천만 엔을 넘게 받았다고 하더군요·”
“흐음···”
“그런데 이 상황에 니폰유센이 리소나 은행에 1조 원에 달하는 자금을 요청했습니다· 아무래도 AEI에 들어간 자금이 크게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당장 1조가 들어오지 않으면 발주했던 선박 인도 결제대금을 지불할 수 없게 될 겁니다· 그럼 바로 소송에서 부도로 이어질
겁니다·”
“다른 은행도 아니고 리소나 은행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오지환 부장은 멈칫하다가 말했다·
“현재 니폰유센의 채권 상당수를 리소나 은행··· 아니 노무라 홀딩스에서 보유하고 있습니다· 노무라 홀딩스는 투자 은행과 증권사를 보유한 지주회사이구요·”
“원래부터 밀접한 사이였다는 거네요?”
“맞습니다·”
“그럼 천억 엔 대출은 문제없을 거라는 뜻인가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현지에서도 니폰유센의 상황을 우려하고 있고 기존에 가진 부채도 상당하기 때문에 그 큰 자금을 과연 대출해줄 수 있을지는··· 일단 우츠가 루미와 약속을 잡을까요?”
“아니요· 우리는 그녀를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오지환 부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녀를 이용해서 스캔들을 일으켜 추가 대출을 못 받게 하려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게 먹힐지는 모르는 일이죠· 확실하지 않은 일로 우리가 가진 패를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리소나 은행의 기업대출 담당자를 만나야겠습니다· 1천억 엔 투자를 결정할 수 있는 담당자요· 그와 약속을 잡으세요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이 상황에서 일단 알아보겠다는 말 따위는 할 수 없었다·
오지환 부장에게 이번 출장에서 ‘안 된다’· ‘불가능하다’라는 단어는 그의 사전에서 있을 수 없었다·
남이 전부 어렵다고 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능력 있는 사람이 된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곳 저곳에 정신없이 전화를 돌리던 그는 저녁 무렵이 돼서야 영훈에게 진행결과를 보고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저녁 시간이 된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이 약속을 잡아내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했는지 따위를 영훈에게 늘어놓지 않았다·
그 스스로가 이미 너저분한 공치사로 자신의 실적을 과장하는 부하를 극히 싫어했기 때문이다·
“좋네요· 움직입시다·”
“알겠습니다·”
오지환 부장은 호텔을 나와 택시를 잡은 후 입을 열었다·
“지금 만나러 가는 이는 리소나 은행 도쿄지부장인 마쓰다 나오키로 나이는 쉰이 넘었고 현재 은행에서만 20년 넘게 근무했다고 합니다· 성향이나 인맥에 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생년월일은요?”
“생년월일이요? 일단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는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대답했다·
“알아내면 카톡으로 보내주세요·”
영훈은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행태였지만 오 부장은 열심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약속장소는 도쿄 중심가의 한 술집·
어두침침한 분위기와 생소한 인테리어가 눈길을 끄는 그곳에 도착하니 놀랍게도 미리 와 있던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건 영훈 일행을 보고 벌떡 일어서서 하는 인사였다·
“안녕하십니까· 일본에서 상무님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절 아시나요?”
“대한민국에서 배 만드는데 종사하는 사람치고 요새 상무님 모르면 간첩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반갑습니다· 저 무진중공업 해외영업팀 채병진입니다·”
그가 꺼내주는 명함을 받으니 무진중공업 해외영업팀 채병진 상무라고 적혀 있었다·
안 그래도 일본에 오기 전 방위사업청에서 주도하는 차기 잠수함 사업에 무진중공업이 엮여 있어 걱정하고 있었는데 일본에서 만날 줄이야···
이건 영훈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전개였다·
“반가워요· 최영훈입니다· 여기는···?”
“저와 아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리소나 은행 마쓰다 나오키 도쿄지부장입니다· 일본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이 친구가 갑자기 통역을 해줄 수 있냐고 부탁하기에 이 늦은 저녁에 뛰어왔는데 여기서 최 상무님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하하하!”
“그러게요·”
오지환 부장과 일본어로 약속을 잡아놓고 통역을 불렀다?
게다가 서로 라이벌이라고도 할 수 있는 두 중공업 회사를 같은 자리에 앉혔다는 건 아무 생각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훈은 묘한 미소를 띠고 옆에 서 있는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쓰다 나오키입니다·”
어설프지만 한국말로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HS그룹 최영훈입니다·”
영훈은 그렇게 문제의 두 명과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오지환 부장은 마쓰다 나오키와 채병진 상무에게 명함을 주고 소개를 주고받은 다음 영훈의 옆에 조심스럽게 자리했다·
“그런데 리소나 은행은 왜···?”
채병진 상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영훈은 채병진 상무 역시 아직 상황을 파악한 게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는 니폰유센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을까?
영훈은 대답 대신 마쓰다 나오키를 향해 물었다·
“우리가 만남을 청한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다른 회사 임직원을 통역으로 데리고 오는 건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마쓰다 나오키는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미안합니다· 하지만 마침 여기 채병진 상무에게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HS그룹에서도 연락이 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같은 이야기를 두 번 할 거라면 같이 들으시는 게 어떤가 해서 모셨습니다·”
역시나 이유가 있었다·
다만 채병진 상무는 전혀 금시초문이라는 듯 놀란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나한테 할 이야기 말인가요?”
“정확히는 무진중공업에게 제안하는 것이지요·”
“무슨 제안 말입니까?”
마쓰다 나오키는 한쪽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그 기분 나쁜 웃음에 영훈이 미간을 찌푸릴 때 그가 양쪽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니폰유센의 재정상황이 상당히 악화됐습니다· 니폰유센은 우리에게 천억 엔 대출을 요청했고 우리는 내부에서 이 대출을 해줄 것인가에 대해 논의중이죠· 그런데 내부회의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니폰유센에게 천억 엔 대출이 진행된 이후 과연 회사가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아닐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채병진 상무가 떨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서요?”
“우리는 니폰유센의 이번 위기가 해운 환경의 변화로 인한 하락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현재 니폰유센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가야 오키노리의 경영능력 때문에 위기를 자처한 것이라고 보고 있어요· 우리는 니폰유센이 충분히 저력 있는 회사라고 평가하고 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고 보고 있습니다· 능력 있는 경영자와 충분한 자본이 투입된다면 말이에요·”
“그게 무진중공업이 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는 겁니까?”
“맞습니다·
이번에는 영훈이 물었다·
“그래서 일본 기업도 아닌 한국 기업에 넘기려고 한다는 말인가요?”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정치에 관심 없습니다· 오로지 빌려준 돈에 충분한 이자를 더해 돌려받는데 주력할 뿐이에요· 하지만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번 제안을 몇 곳의 해운사에 전달했으니까요· 적정한 가격이 아니라면 욕심을 낸다고 해도 얻기 어려울 겁니다·”
“방법은요?”
“노무라 홀딩스가 보유한 니폰유센의 주식 27%를 매각할 예정입니다· 또한 추가 대출은 니폰유센 주식을 타사에서 매입한 이후 이루어질 것이고요·”
“27%만으로 충분할까요?”
“충분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분구조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해드릴 수 있어요· 중요한 건 그대 회사들이 관심이 있는가 하는 것이죠·”
세계 자동차 운반선 시장의 최고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니폰유센은 확실히 매력적이긴 했다·
특히 전기차 시장이 더욱 커지게 된다면 미국을 중심으로 유럽과 아시아 시장의 자동차 운반이 지금보다 더 많아졌으면 많아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되고 있었다·
뻘짓만 안 한다면 안정적인 매출을 보장할 수 있는 회사임은 확실해 보였다·
군산조선소를 팔고 작년에 확보한 현금만 8천억·
착실하게 LNG선 수주를 이어오며 현금을 쌓은 무진중공업으로써는 탐나는 먹잇감을 놓칠 이유가 없었다·
채병진 상무 역시 그걸 알고 있기에 저렇게 눈을 빛내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해보겠습니다·”
영훈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마쓰다 나오키가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며 말했다·
“많은 시간을 드릴 수 없다는 점 미리 사죄하겠습니다·”
“그거야 니폰유센에 관심이 있을 경우겠죠·”
“관심이 없다는 말씀처럼 들리는군요· 분명···”
“관심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개나 소나 다 달려드는 먹잇감이라면 그다지 흥미가 가진 않네요· 그럼···”
영훈은 그대로 가게를 빠져나왔고 오지환 부장은 허겁지겁 영훈을 따라 나왔다·
오 부장은 바짝 따라붙으며 말했다·
“이대로 포기하실 겁니까? 아직 가격도 듣지 못한 상황이라···”
“저들이 부르는 가격대로 안 살 건데 가격을 들으면 뭐 합니까?”
“네?”
“노무라 홀딩스는 이미 니폰유센이 망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좋은 물건처럼 포장하고 있지만 정말 좋은 물건이라면 저런 식으로 은밀하게 꼬시지 않습니다· 대놓고 광고로 때리겠죠· 우리가 모르는 악재를 저들은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사더라도 공짜로 주워 먹지 않는 수준
이라면 우리도 건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영훈은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질문했다·
“가야 오키노리는 요즘 뭐 합니까?”
“겉으로는 회사와 집을 오가는 성실한 직장인처럼 보이지만 주말마다 골프와 등산을 통해 다른 여자와 만나고 있습니다·”
“현재 니폰유센의 실질적인 대주주는 누구죠?”
“야마시타 료타라는 사람으로 나이가 여든이 넘었는데 이제는 일에서 손을 뗀 상태입니다· 전권을 가야 오키노리에게 넘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납시다·”
“만나서 어쩌시려구요?”
“사위가 바람나서 회사를 말아먹으려고 하니까 정신 차리라고 알려주려구요· 그럼 사위를 조지든 회사를 정상화시키든 뭐라도 하려고 할 거 아닙니까? 숨겨진 악재는 그때 드러날 겁니다·”
마쓰다 나오키는 외나무 다리에 홀로 서 있는 위태로운 형국의 운에 들어서 있었다·
강한 바람이 들이치면 그는 끝을 모르게 떨어질 것이다·
< 토끼를 노리는 자들(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