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끼를 노리는 자들(4) >
처음 보는 대기업 재벌 사모님에게 사위랑 바람을 피우냐고 물어본다·
오지환 부장은 통역을 해주면서도 영훈이 제정신인지 심각하게 의심할 정도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해도 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법·
이런 말은 자칫 잘못하면··· 아니 이런 말은 입 밖으로 내뱉는 즉시 X 되는 법이라는 걸 그는 오랜 삶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반응은 생각과 달랐다·
“그 그걸 어떻게 당신이····”
사시나무 떨듯이 손을 파르르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오지환 부장은 그녀만큼이나 놀라고 있었다·
“사 상무님?”
영훈은 귀신 보듯 쳐다보는 오 부장의 눈길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회사가 많이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저희가 도와드리고 싶은데 말이죠·”
그 여자도 바보는 아니었는지 영훈이 도와준다고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는 않았다·
“원하는 게 뭔가요?”
“니폰유센이 리소나 은행에게 천억 엔 대출을 신청했다고 들었습니다· 회사가 많이 어려운 상황이라고요·”
“맞아요· 회사가 했던 투자가 갑자기 안 좋아졌다고 들어서····”
“비슷하기는 한데 제가 사모님이 알고 있는 내용과 조금 다른 걸 알고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우츠가 루미라고 노무라 증권의 AEI펀드를 운용하는 펀드매니저가 있습니다· 그리고 AEI펀드는 니폰유센이 투자한 곳이죠·”
“그런데요?”
“가야 오키노리가 왜 AEI펀드에 회사 자금을 넣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건····”
역시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모르고 계셨군요· 가야 오키노리는 우츠가 루미와 주말마다 애인처럼 만나는 사이였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침만 꿀꺽 삼켰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영훈을 바라보았지만 평온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그를 보며 조금씩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게 정말인가요?”
“거짓일 거라고 믿고 싶다면 그러셔도 상관없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이었군요· 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당신이니까 거짓은 아니겠죠· 웃기네요· 나와 불륜을 저지를 수 있다면 다른 여자와도 불륜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인데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치맛자락을 움켜쥔 그녀의 손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한동안 분을 삼키던 그녀가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원하나요?”
영훈은 대답하지 않고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 가는 건가요?”
“당신은 지금 흥분해서 이성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생각이 정리되면 연락주세요·”
“무슨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라는 거죠?”
“글쎄요· 그거야 당신이 알지 않겠습니까? 우린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야마시타 료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 가정을 얼마나 지키고 싶은지 가야 오키노리에 대한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만약 정리가 된다면요?”
“그럼 원하는 게 생기겠죠·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그건····”
“우리는 도쿄 하얏트 호텔에 머물고 있습니다· 다음에 뵙도록 하죠·”
영훈은 빙그레 웃으며 명함 하나를 놓고는 집을 나왔다·
뒤에서 반쯤 홀린 표정으로 따라 나온 오지환 부장은 영훈이 평소와 똑같은 표정으로 차에 오르는 걸 보고 얼른 운전석에 타며 물었다·
“아까 그 여자가 가야 오키노리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느낌이 그랬습니다·”
당연히 설명할 수 없었다·
도화살로 부족해 홍염살까지 들어 있는 그 여자는 가야 오키노리가 아니었다고 해도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을 게 분명한 여자였다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특히 홍염살이 들어 있는 남자나 여자는 아무리 부귀한 가정에서 자라고 좋은 상대를 만난다고 해도 바람을 피울 가능성이 높으니까·
반면 오 부장은 그냥 느낌이 그랬다고 하니 더는 물어볼 말이 없었다·
“그런데 아까는 왜 그대로 나오셨습니까? 가야 오키노리가 바람을 핀 걸 알고는 뭐든지 다 할 기세던데요?”
“바람기가 있기는 해도 똑똑한 여자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하면 화가 난 마음에 그대로 따를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가서 자신이 당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오 부장은 최영훈 상무가 그녀를 왜 똑똑한 여자라고 확신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그 부분은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만날 때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좋은 제안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부장님 사채업자들이 보통 채무자에게 돈을 갚으라고 할 때는 얼마를 갚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얼마를 갚을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그야··· 사채업자의 입에서 일정 금액이 나오면 거기서 더 깎으려고 하니 그런 게 아닐까요?”
“맞습니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어요·”
“그게 뭡니까?”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올 것 없다고 생각한 사람도 생각지도 못하게 돈 나올 구멍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채업자들은 받아내야 할 채무자가 많아서 하나하나 속사정까지 파악하기 힘들죠· 그래서 먼저 물어보는 겁니다· 사채업자의 실력은 사전 준비를 얼마나 잘 하는
가 그리고 이런 식의 떠보는 질문으로 상대방의 상황을 짐작해낼 수 있는가로 평가됩니다·”
오 부장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상무님은 어떻게 그렇게 사채업자 세계를 잘 아십니까?”
“현진물산에 입사하기 전에 잠깐 그쪽 일을 했었거든요· 나름 실력도 좋았습니다· 말했던 두 가지 능력 중에 전 후자에 뛰어났거든요· 사전 준비는 사수에게 배운 그대로 하는 것도 벅찼습니다· 법률적 지식이 어찌나 많이 필요하던지····”
다른 사람이라면 숨기고 싶을 과거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최 상무는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오 부장은 어떻게 리액션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빨리 화제를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아까 그 여자가 만약 감쪽같이 연기를 한다면 상무님이 생각한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 겁니다· 내 앞에서 거짓말로 날 속여 넘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거든요·”
“하하 그렇군요·”
세상을 살아오면서 오지환 부장은 많은 허풍을 들어왔었다·
우리 집이 부자라거나 공부를 잘한다거나 하는 건 너무 흔했고 조금 특이하다 싶은 건 밤일을 잘한다거나 3대 500을 친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이런 식의 황당한 허풍은 처음이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소리였지만 조금 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게 있으니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처음 최영훈 상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여자 잘 만나서 운 좋게 승진했겠거니 생각했는데 곁에서 지켜볼수록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 그런데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요· 혹시 이름 알고 있습니까?”
오 부장은 다시 한번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름도 모르는 여자에게 사위와 바람이 났냐고 채근했다니····
*
하루 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영훈과 오 부장은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그녀는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우아한 검은색 모자를 쓰고 창가에 앉아 있었다·
후쿠하라 아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영훈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차를 주문했다·
그녀는 영훈과 오 부장을 힐끗 보고는 쓸쓸한 눈빛으로 고개를 창가로 돌렸다·
“집으로 부를까 이곳으로 올까 고민했어요· 아무래도 여기는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런데 괜한 염려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알게 되겠죠·”
“·······”
“남편은 위독해요· 당뇨 합병증이 심하게 와서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예요· 당신도 내가 돈 때문에 야마시타 료타와 결혼했을 거라 생각하나요?”
“아닙니까?”
빈말이라도 아니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오 부장은 깜짝 놀랐지만 그래도 어제 그 충격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기에 그대로 통역했다·
후쿠하라 아이는 그걸 듣고 가볍게 웃었다·
“후후··· 당신은 참 직설적이군요? 맞아요· 여자의 행복 따위는 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결혼하고 나니 꼭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됐죠· 하아···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처연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영훈은 그녀가 연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극도로 긴장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회사가 많이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전에도 똑같은 말을 하셨어요·”
“펀드에 투자했다가 손해 본 금액· 혹시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더 있습니까?”
후쿠하라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것 말고는 다른 문제가 없어요·”
“없다고요?”
“네·”
“정말입니까?”
“네· 그룹 재무부 이나모토에게 직접 들었어요· 그는 야마시타의 충신이라 나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요·”
아무래도 이상했다·
펀드 투자로 손실을 아무리 많이 봤다고 한들 주 채권은행에서 회사 지분을 팔아치우려고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그녀는 아주 순수하게 이번 사태가 끝나고 자신이 가져갈 돈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에겐 전문적이고 똑똑한 임원들을 움직일 정치력이 부족했으니까·
“리소나 은행에서 무진중공업에 가지고 있는 지분을 팔려고 합니다· 난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내가 어떻게 하면 되죠?”
“정말 회사에 문제가 없다면 리소나 은행에 신청한 대출을 중지하세요· 그리고 펀드 투자에서 손실을 봤다고 공시하세요·”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일본 정치 상황을 잘 몰라서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회사 주가는 폭락할 거고 가야 오키노리는 퇴출당할 게 분명합니다·”
“가야 오키노리를 법적으로 옭아맬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그건 당신이 경영권을 가지고 고소를 하느냐에 달렸겠죠· 난 그런 것까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일단 회사가 망하기를 바라는군요?”
“니폰유센은 좋은 회사입니다· 펀드 투자 손실 말고 더한 피해가 없다면 아주 좋은 물건이죠· 당신은 어떻습니까?”
“나요?”
“우리에게 좋은 가격에 넘길 의향이 있습니까?”
“내가 당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면 더 좋은 가격에 넘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그런데 야마시타 료타의 딸이 당신이 자기 남편과 불륜을 벌였다는 걸 알게 되면 순순히 당신을 아버지의 아내로 인정할까요? 아마 아주 시끄러운 법정 분쟁이 일어날 것 같은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알게 될 거라는 그녀의 말·
그건 순 거짓말일 게 분명했다·
역시나 후쿠하라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시끄러워지는 건 원하지 않아요·”
“좋습니다· 그럼 우선 가야 오키노리부터 회사에서 쫓아내고 대출 신청을 중지하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영훈은 후쿠하라를 돌려보냈다·
그녀와 할 이야기는 이제 끝났다·
대주주가 가진 지분은 이제 완전히 HS그룹의 우호지분이 되었고 이제 남은 건 노무라 홀딩스 뿐이었다·
영훈과 오 부장은 곧장 노무라 홀딩스 본사로 향했다·
오 부장의 전화를 받은 마쓰다 나오키는 깜짝 놀라 해당 사실을 보고했고 최 상무 일행이 도착했을 땐 이미 몇몇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노무라 홀딩스의 에토 세이치 사장은 마흔도 안 돼 보일 정도로 젊었는데 그는 자신의 사무실로 아주 정중하게 안내했다·
그는 사무실로 가는 내내 별다른 인사치레 없이 굳은 표정으로 앞장섰는데 그의 사무실에는 놀랍게도 눈에 익은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바로 가야 오키노리였다·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땅에 박고 있는 모습은 간혹 영화에서나 봤었는데 실제로 보니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반갑습니다· HS물산 최영훈입니다·”
“못 볼 꼴을 보여드려 송구스럽습니다· 에토 세이치입니다·”
“여기 이 사람은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그는 나에게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용서를 구하고 있지만 글쎄요··· 니폰유센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맞습니다·”
“우리가 가진 지분을 무진중공업에게 넘기기로 했습니다· 3백억 엔에 말이죠· 그 이상이라면 당신들에게 넘길 의향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계속 가야 오키노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영훈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가야 오키노리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후··· 당신은 정말 정도를 모르는군요· 펀드매니저와 불륜을 저질렀던 것도 모자라 노무라 홀딩스 사장님의 사모님까지 건드렸던 겁니까?”
오지환 부장이 전한 영훈의 말에 깜짝 놀란 가야 오키노리가 고개를 쳐들 때 영훈은 역시나 놀라는 에토 세이치를 향해 말했다·
“니폰유센을 팔아치우려는 이유를 이제 알았습니다· 이 자 때문이었군요·”
< 토끼를 노리는 자들(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