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나긴 레이스의 서막(1) >
영훈이 일본에서 막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고 있을 무렵 연희는 청담사거리부터 갤러리아 백화점 사이의 명품로드샵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Nodri Clare가 중국에서 소위 톱스타 마케팅과 공격적인 판매로 대박을 터트리면서 한국에 로드샵 매장이 필요하다는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비록 영국이 본사이긴 하지만 한국기업이 인수한 상황이고 속칭 신상이라 불리는 아이템은 한국에 먼저 풀리면서 중국에 풀려야 희소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월 매출 천억·
미친 듯이 성장하는 Nodri Clare의 현 매출이었고 지금도 분기마다 성장률이 10%를 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명품 브랜드 로드샵이 밀집되어있는 이곳에 Nodri Clare가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땅값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중개법인 사무실에서 설명을 듣고 직접 와서 보니 생각보다 별로였다·
건물도 연식이 좀 되어서 유럽식의 화려한 양식은 되레 촌스럽게 보였는데 아무래도 매입하게 되면 리모델링을 싹 해야 할 것 같았다·
“이게 8백억이요?”
800억이면 어지간한 대로변의 빌딩을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다·
이곳 강남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활동해왔다는 중개법인의 대표는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대지면적이 넓고 이 근방의 땅값은 매년 오르고 있습니다· 이 정도 금액이면 결코 비싼 가격은 아닙니다·”
“네 뭐····”
아무리 전월 매출이 천억을 돌파했다고는 하지만 로드샵 하나에 800억이라는 말에 연희도 내심 헉하는 마음이 들긴 했다·
건물 매입이 아니라 그냥 임대로 들어갈까 고민하는 와중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연희야! 너 여기서 뭐해?”
“어? 은진 언니· 승진했다며? 축하해·”
연희가 가볍게 웃어주었다·
그랜드 백화점에서 명품 브랜드 입점을 담당했던 송은진 실장은 얼마 전 이사로 올라섰다·
그랜드 백화점 소유주의 손녀였기에 능력의 유무를 떠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축하는 뭐····”
그랜드 백화점은 대원그룹 계열사였고 대원그룹은 유통 패션에 강했다·
예전에 송은진 실장의 기준에선 현진물산의 딸인 연희는 자신보다 많이 부족했지만 이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곳까지 올라섰다·
특히 송 실장이 처음에 듣보잡이라고 깔보았던 Nodri Clare가 중국에서 대박이 터지면서 HS물산에서 소유한 Nodri Clare 하나의 가치만 그랜드 백화점의 시가총액을 넘어선 상황이었다·
그래서 승진 축하를 받는 송 실장의 표정은 그리 기뻐 보이지 않았다·
“난 로드샵 좀 보러 왔어·”
“매장 하나 내려고?”
“응·”
“좋은 데 소개해줘?”
“좋은 데라니? 언니가 좋은 데를 어떻게 알아?”
“들었거든· 본사 실적이 안 좋은 브랜드 하나가 한국 로드샵 매장을 뺀다는 소리가 있어서· 임대 들어가기 좋을걸?”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임대를 생각했던 연희는 괜한 자존심에 손사래를 친다·
“임대는 무슨··· 괜찮은 자리 사려고·”
“여길 사겠다고? 너희 진짜 잘 나가긴 하나 보다?”
부러움과 짜증이 동시에 담긴 송은진의 눈빛·
그걸 보며 연희는 짜릿한 쾌감이 전신을 스쳐감을 느꼈다·
Nodri Clare를 처음 런칭하러 그랜드 백화점에 갔을 때 겪은 수모는 아직도 못 잊고 있었다·
그것뿐인가?
백화점 VVIP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은근히 자신을 빼고 진행했던 오래전 일들까지 생각하면 배시시 웃음이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언니도 잘 알면서··· 그냥 운이 좋았지 뭐· 그때 언니네 회사 직원들 반응이 별로였다고 했었잖아·”
“그 그랬나?”
“그거 생각하면 진짜 운이 좋았지· 아 대표님 이거 계약할 테니까 건물주랑 미팅 잡아주세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뚱한 표정으로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던 연희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지만 중개법인의 대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마치 당연한 선택이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연희는 웃으며 고개를 까딱이고는 송은진에게 말했다·
“밥 먹었어요? 오랜만에 같이 밥이나 먹을까요?”
당연히 안 먹을 거라 대답할 줄 알고 물어본 거였는데 송은진의 대답이 그녀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럼 그럴까?”
연희는 순간 송은진이 ‘자신에게 뭐 부탁할 게 있나?’하는 생각이 들 만큼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웃으며 말했다·
“갈까요?”
연희는 자신의 수행기사에게 근처에서 식사하라며 10만 원짜리 수표를 쥐여주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곳 지리는 그녀가 빠삭하게 알고 있었고 바로 코앞에 무척 맛있는 레스토랑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리를 잡고 앉은 연희는 슬쩍 은진의 눈치를 보았다·
역시나 은진이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착 가라앉은 눈빛과 입술을 잘근 씹고 있는 걸 보면서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음을 눈치챘다·
주문했던 코스 요리가 하나씩 나오면서 계속 고민하던 은진이 결국 입을 열었다·
“너희 하남에 땅 있다고 들었는데 맞아?”
“하남?”
연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HS물산이 가진 부동산 자산이야 어느 정도 알고 있는데 자신이 알기로는 하남에 땅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맞을걸? 예전 혜성기업이 가지고 있던 땅이라던데·”
“아~ 맞아 기억나요· 그거 예전에 담보 잡고 대출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도 정확히 어디에 붙은 땅인지는 모르고 그냥 지역명만 들었었어요· 그런데 하남 땅을 왜요?”
“너 그 땅에 관심 없구나?”
연희도 하남에 3기 신도시가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다만 HS건설이 국내 아파트 건설보다 해외 공사에 더 주력하겠다고 경영방침을 선포한 것도 알고 있기에 더더욱 HS건설이 가지고 있는 땅에는 관심이 없었었다·
물론 그렇다고 공짜로 막 퍼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난 관심 없지만 HS건설은 관심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HS건설 경영에는 내가 손대지 않으니까 몰라요·”
“혹시 그 땅 관심 없으면 우리한테 팔 수 없을까?”
“그럼 HS건설에 문의해보지 그래요?”
“왜 이래? 그렇게 물어보면 의사결정이 얼마나 느린지 몰라서 그래? 실무자에서 부서장 임원 사장까지 올라가려면 몇 달 걸릴 거 아니야? 되든 안 되든 빨리 답을 듣고 싶어서 그러지·”
“으음~ 내가 한번 물어볼게요·”
“그래· 나도 지인 찬스 덕 좀 보자· 로드샵 하나 낸다고 800억을 단번에 지르는 넌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냥 물어만 보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백화점 세우려고? 좋은 자리인지 잘 모르겠네?”
“어쨌든 알아만 봐줘·”
“그럴게요·”
연희는 어깨를 으쓱이며 영훈이 빨리 돌아오기를 바랐다·
오늘 느낀 짜릿한 승리감을 빨리 영훈에게 늘어놓으며 미주알고주알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여느 국회의원이 다 그렇겠지만 천보윤 의원은 아침부터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지역구에 직원을 백인 이상 고용한 사업주들을 모아놓고 조찬모임을 한 걸 시작으로 점심 전 골프 약속 점심 후 최고위원 회의 참석 등등 오늘 스케줄이 빡빡했다·
그런 빡빡한 스케줄 가운데서도 골프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건 그의 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정·재계의 인사들과 골프를 치며 나누는 대화에서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허··· 오늘 컨디션이 영 안 좋은가? 샷이 잘 안 맞네?”
천보윤 의원은 벙커로 빠진 골프공을 멀리서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매일 잘 치면 국회의원 말고 프로골퍼를 하셔야죠· 그게 인간적인 겁니다·”
국방위원회 소속이자 같은 당 후배인 이기찬 의원이 방긋 웃으며 시원하게 골프채를 휘둘렀다·
‘딱’하는 명쾌한 소리와 함께 쭉 뻗어나간 공이 그린에 안착하는 모습을 보며 천 의원은 더욱 심술궂은 표정이 되었다·
골프는 기본적으로 약간의 사행성이 가미된다·
약간이라도 돈이 걸려야 재미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단 몇 만원이라도 손해 보면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자존심 때문에 더 악착같이 치게 된다·
“나 모르게 요즘 개인교습이라도 받나?”
“아이고 그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의원님이 내준 숙제도 다 못하고 있는데 말이에요·”
“진짜 아니지?”
“그럼요·”
“거짓말하지 마· 요즘 김진희 프로랑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 있어·”
김진희 프로는 아직 서른이 안 된 미녀 골퍼로 실력보다는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기찬 의원은 이미 아들이 둘인 유부남이었기에 천보윤 의원은 그에게 강한 경고를 보내는 거였다·
“크흠··· 그냥 골프 좀 배우는 걸로 몇 번 만난 게 답니다·”
“처신 조심히 해· 요즘은 옛날 우리 때랑 달라· 한번 실수하면 영영 배지 달 생각 말아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그건 알아서 하고 그게 그렇게 어려운 숙제였나?”
“말도 마세요· 이미 무진중공업 측이 야당 의원들이랑 방위사업청에 얼마나 꿀을 발라 놨는데요? 방위사업청 애들이 무진중공업의 잠수함 기술력이 해주조선해양과 맞먹는다고 우선협상할 이유가 없다고 버티고 있습니다· 안 먹혀요·”
“그래?”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포기하시는 게 어떨까요?”
“포기라··· 영 체면이 안 서서 말이야·”
처음에 최영훈 상무에게 이 이야기를 꺼낼 때만 해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여겼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예 이걸 꺼내지도 못했을 터·
문제는 그 1년 사이 방위사업청장이 바뀌면서 사업청 내 여론이 급반전 됐다는데 있었다·
문제가 없었을 걸 문제인 것처럼 말해놨는데 진짜 문제가 됐으니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쪽팔림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HS그룹 때문에 그러시죠?”
“내가 큰소리를 뻥뻥 쳐놓은 게 있어서 말이야·”
“그럼 다른걸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다른 어떤 거?”
“따지고 보면 HS그룹도 건설업자 아닙니까? 3기 신도시에 HS건설 밀어준다고 하면 그래도 좋아하지 않을까요?”
천보윤 의원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방향이 달라· 내가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내 보좌관이 그러더라고· HS건설이 인도 신공항 발주 이후로 국내 아파트 사업에는 아예 명함도 안 내밀고 있다고 말이야·”
“그래요?”
“주면 고마워할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급한 건 아니야· 차기 잠수함 사업 경쟁입찰은 급한 사안이고·”
“흐음··· 어렵네요· 그런데 꼭 HS그룹을 도와줘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도와준다라··· 글쎄· 일종의 보험이라고 해야겠지·”
이기찬 의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급히 전화기를 들고 달려오는 보좌관을 발견했다·
“왜?”
“방금 도수연 의원이 기자들을 모아놓고 현 행자부장관의 비리의혹을 터뜨렸습니다·”
반응은 옆에 있는 천보윤 의원이 더 빨랐다·
“뭘 어떻게 터뜨렸는데? 증거는 제대로 된 거 맞아?”
“이제 기자들 앞에서 이야기를 시작한 중이라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증거 신뢰도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에이··· 골프 다 쳤구만· 게임 취소니까 벌금은 없는 거야·”
“아 예~ 그럼요·”
천 의원은 재빨리 샤워하고 바로 여의도로 출발하며 보좌관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
“도수연 의원이 전용두 행자부장관의 교수시절 논문 표절과 조교 갑질 행위를 폭로한 건데 제대로 걸린 것 같습니다· 당시 논문에 같이 참여했을 때 제자와 나눴던 카톡대화가 그대로 실렸습니다· 언어폭력 수준이 조금··· 심한 편이라 아무래도 쉽게 넘어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허··· 미치겠네·”
“그래도 장관이니 전용두 장관이 물러나면 쉽게 누그러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모르는 소리! 대선이 1년도 안 남았어· 선거는 원래 분위기 싸움이고 프레임 싸움이야· 정권의 도덕성과 인사검증을 제대로 물었어· 그리고 시기가 안 좋아·”
“시기가 안 좋다니요?”
“말 그대로 1년도 안 남았는데 이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야· 만약 손에 패가 하나밖에 없다면 이걸 지금 터뜨리겠어?”
보좌관은 천보윤 의원의 말을 이해했다·
“아닙니다· 대선 가까이 와서 터뜨렸겠죠· 지금 터뜨렸다는 건 이걸 시작으로 대선까지 계속 분위기를 끌고 가겠다는 의도일 수도 있다는 거군요·”
“맞아· 이게 첫 시작이라면 도수연 손에 뭐가 들렸는지 그것부터 알아야 해·”
천보윤 의원은 착참한 마음에 창밖을 바라보며 옆자리에 꽃힌 생수만 연신 들이켰다·
검사 출신에 전 법무부장관을 역임했던 그녀였다·
10년 넘게 특수부에서 검사 일을 하면서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그녀가 알고 있을 비밀이야 한두 개가 아닐 게다·
그중에 어떤 패를 쥐고 있을까?
< 기나긴 레이스의 서막(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