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나긴 레이스의 서막(2) >
일본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온 영훈은 오지환 부장에게 뒷마무리를 지시하고 바로 회장실로 향했다·
어차피 일본 출장 결과 보고 때문에 회장실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오전에 출근하자마자 회장실에서 호출이 있었다·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 아니면 장모님이자 그룹 회장인 송은채 회장이 직접 찾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영훈은 궁금한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다·
“왔어? 중간보고를 받긴 했는데 잘 해결했다며?”
송 회장은 언제나처럼 밝게 웃으며 반겼다·
그녀는 작년 결혼식 이후 영훈을 아들처럼 가깝게 대해주었는데 어머니가 없이 자랐던 영훈으로서는 그런 마음 씀씀이가 고마울 뿐이었다·
“아직 마무리된 건 아닙니다· 무진중공업이 27% 지분을 가져갈 것 같아서요·”
“무진이 아직 니폰유센 상황을 잘 모르는거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만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눈치가 빠르면 손 떼고 물러날 테고 아니면 조금 골치 아플지도 모릅니다·”
“그건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문제니까··· 오지환 부장은 어때? 제법 인사이트도 있고 업무 센스가 있다고 알려져 있던데 눈치도 제법 빠르고 말이야·”
그녀가 말하는 눈치란 아마도 사내정치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네 말씀하신 그대로던데요· 중간에 의아한 게 많았을 텐데 흐름을 끊지 않고 잘 따라와줘서 일하기 수월했습니다·”
“어떤 것 같아? 키워볼 만할 것 같아?”
영훈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대답했다·
“실무 타입입니다· 가진 야심은 크지만 그만큼 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 조금 박하네?”
“박한 건 아닙니다· 실무자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경영자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으니까요· 서로 잘하는 게 다를 뿐입니다·”
“그래도 오 부장이 들으면 실망하겠는데?”
“그건 그렇겠네요·”
“오 부장이 아마 최 상무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할 텐데 잘 조절할 수 있겠어? 나도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 자리에서 오래 있다 보니까 사람 다루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느껴· 내가 보는 그 사람의 능력은 요 만큼인데 그 사람은 이 만큼을 바라거든·”
송 회장은 주먹을 쥐었다가 커다란 대야를 표현했다·
“이해합니다·”
“내가 잘 보는 건가 의심이 들기도 하고 어떨 때는 ‘저러니까 저것밖에 못 하지’하는 못된 생각도 들어· 흐음··· 쓸데없는 이야기지?”
“아닙니다·”
“아니긴··· 나보다 더 나이 든 사람처럼 생각하는 게 우리 최 서방 아니야? 일본 이야기는 거기까지 하고 천보윤 의원이 최 상무를 한번 만나고 싶대·”
영훈은 예전에 천 의원과 만난 이후 보좌관이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걸 받지 않았다·
볼일이 있으면 회사를 통해 연락하라고 단호하게 말한 이후 천 의원은 영훈에게 따로 연락한 적이 없었다·
근 1년 만에 개인적인 만남을 청한 것이다·
당연히 영훈의 표정은 굳어졌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런가요?”
“최 상무가 한국 들어오기 전에 도수연 의원이 현재 행자부 장관에게 아주 큰 엿을 먹였거든· 그것 때문에 지금 청와대가 뒤집혔어· 아마 옷 벗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거야·”
“뭘 했기에 그럽니까?”
“교수 재직 시절에 조교한테 온갖 갑질을 다 했더라고· 대화 내용 보니까 욕은 아주 기본으로 달고 살면서 여자 대학원생한테는 성희롱에 집안일까지 시켰어·”
“어우··· 세네요· 인사검증을 어떻게 통과했을까요?”
“정치 시작하면서 뒷정리를 말끔하게 한다고 했나 봐· 예전에 냈던 책도 워낙 유명했고 야당에서도 재산이나 아들 이중국적으로 물고 늘어지다 보니까 교수 시절에 그런 만행을 하고 다녔을 거라는 생각은 못 했던 거지· 아니면 알고도 넘어갔던가·”
“알고 넘어갔다면 일부러 대선 전에 까려고 그랬다는 말씀이신가요?”
“도수연이 검사 출신이거든· 그것도 아주 유명한 특수부 검사· 뭐 난 관심이 없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싶은데 천보윤 의원은 애가 닳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아· 꼭 자기가 대선 나가는 것 같다니까?”
“아마 노리고 있을 겁니다·”
“노린다고? 그 사람이? 되겠어?”
송은채 회장이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묻는다·
영훈도 사실 천보윤 의원이 타고난 운이 있다고 생각할 뿐 그가 정치적인 역량을 얼마나 보여주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타고난 그릇이 크다고 한들 능력이 뛰어난 건 아니었다·
유방이 천하의 패권을 쥐었다고 하지만 군을 부리는 건 한신만 못했고 앞날을 내다보는 건 장자방에 미치지 못했다·
“만약 저에게 돈을 걸라고 하면 대선 출마하는 데 걸 겁니다·”
송 회장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허··· 그래? 그 양반 아주 꿈이 대단하시네? 그래서? 최 상무한테 대선 전략이라도 짜달라는 거야?”
“그런 게 아닐 겁니다· 도수연이라는 인물이 야당에서 치고 올라오니 자신도 뭔가 뚜렷한 인상을 주고 싶겠죠· 아마도 조재민 시장의 예를 생각하면서요·”
“지금은 조재민 시장 때랑 상황이 다르잖아· 고작 아파트 사업권 하나 내주면서 사또짓하려고 들지는 않겠지?”
“글쎄요· 정치인들의 계산법은 원래 좀 독특한 데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래서 싫어해·”
송 회장은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
요코하마 시 외곽의 커다란 저택·
안주인인 후쿠하라 아이는 요 며칠 사이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음에도 별일 없었던 것처럼 저택의 나무를 손질하고 있었다·
혼자서는 몸도 일으키지 못하고 그저 주는 밥이나 먹고 자는 남편은 이제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더 정확히는 결혼한 이후 남편이 경영권을 사위에게 넘기고 가지고 있던 지분을 가족에게 나누어준 이후로 그녀의 관심사는 오직 남편이 언제 죽음을 맞는지였다·
이빨도 거의 남지 않고 거동도 제대로 못 하는 남자의 수발이나 들어주며 시간을 보내야 하는 한창 젊은 여자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지 그녀는 알지 못했었다·
그저 그가 가진 부와 미래에 자신이 가질 재산을 꿈꾸며 결혼했지만 실제 삶은 그녀의 상상 이상으로 비참했다·
그런 그녀에게 40대 건장하고 야심만만하며 때로는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가야 오키노리의 접근은 유혹 그 이상이었다·
어쩌면 더 젊고 부자인 야마시타 료타의 딸이 아닌 자신을 향한 그의 관심은 더 짜릿했고 자존감을 올려주었다·
항상 경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야마시타의 딸을 생각하면 자존감이 극대화되는 걸 느꼈었다·
그런데 그 은밀하고 짜릿했던 관계를 다른 사람 그것도 외국의 사람이 알아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망한 건 가야 오키노리지 그녀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아마 그와의 불륜으로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지 않았다면 우울증에 걸려 자살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안합니다·”
얻어터져서 본래의 남자다운 얼굴이 다 사라진 가야 오키노리는 나무를 손질하는 그녀의 뒤에서 고개를 숙였다·
후쿠하라는 그런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나무를 손질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마치 없는 사람 취급하는 그녀의 모습에 가야 오키노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고작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 같던 그녀였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극한의 상황에 몰리자 남보다도 더한 태도로 대하는 모습에 굴욕감과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미안합니다·”
다시 한번 가야 오키노리의 입에서 나온 사과에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이 부어오른 그를 보고서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예요?”
“모든 게··· 그냥 모든 게 미안합니다·”
“내 도움을 바라는 건가요?”
“한 번만 날 도와주세요·”
“어떻게 도와달라는 말이죠?”
“노무라 홀딩스의 에토 세이치는 엄청난 힘을 가진 자입니다· 그에게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넘기지 않으면 난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재산을 넘기면 되잖아요? 아무리 재산이 아깝다고는 하지만 목숨보다 귀하지는 않으니까·”
“아내가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아내를 조금만 설득해주세요·”
후쿠하라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아내를 설득해 달라는 말·
그저 핑계일 뿐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아내가 가진 재산만큼 자신의 재산을 대신 빌려주어 목숨을 구해달라는 말이었다·
어떻게 얻은 야마시타의 재산인데····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을 확 차린 그녀는 지금까지 그에게 느껴졌던 모든 감정이 전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변해버렸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의 말이 거짓이 잔뜩 묻은 사탕발림이라는 것 또한 알아낸 것이리라·
“들었어요· 당신이 지금까지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AEI에 투자한 펀드 자금 전부 그 펀드매니저인 여자 때문이라면서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리고 노무라 홀딩스 사장에게 당신이 왜 끌려 다녀야 하는 건가요? 투자 손실을 본 건 우리인데 왜 당신 재산을 바쳐야 하는 거죠?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예요?”
“그건··· 아주 악랄한 계략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우리 회사를 파괴하려고 하고 있었어요·”
“노무라 홀딩스 말인가요?”
“맞습니다· 당신과 나의 재산을 탐내고 우리 회사를 쪼개 팔아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합니다· 우리 회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당신이 날 도와주어야 합니다·”
후쿠하라는 이를 꽉 물고 그의 뺨을 후려쳤다·
짝!
어리둥절해하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또 한 번 그의 뺨을 후려쳤다·
또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계속 가야 오키노리의 뺨을 후려갈긴 그녀는 벌겋게 부어오른 손으로 주먹을 쥐고 말했다·
“어리석은··· 당신 정말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지금까지 나에게 속삭인 달콤한 말들은 하나같이 전부 거짓이었던 거예요? 당신은 행동도 말도 전부 거짓밖에 없는 사람인가요?”
“후쿠하라····”
“여기서 나가요· 당장! 그리고 앞으로 내 눈앞에 얼씬거리지도 말아요·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를 거예요!”
그녀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걸어 나가는 그를 보고도 전혀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스스로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오히려 더는 보채거나 애원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 준 그가 고맙기까지 했다·
이제 그 누구도 자신의 재산을 탐내지 못하리라·
한국의 HS그룹이 상당한 규모의 유통업체를 준다고 약속한 만큼 이제 그녀는 진정한 사랑을 찾아 자유를 누리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
정치인과의 만남은 항상 주의를 요하는 법이었기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회사에서 보유한 호텔에서 천보윤 의원과 마주했다·
야당의 도수연 의원이 꽤 강펀치를 날려 곤란하다던 그의 표정은 오히려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오랜만이야· 그동안 자네와 자네 회사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 듣고 있었네· 아주 잘 나간다지?”
“그냥 그렇습니다·”
“그냥 그런 것 치고는 꽤 화제가 되던데? 듣다 보니 부럽더군· 나도 정치판에 뛰어들지 말고 기업이나 운영할 걸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아 자네 그거 아나? 나도 예전에 자네처럼 데릴사위로 기업을 물려받을 뻔한 적이 있어· 태성그룹이라고 지금은 TS미디어로 이름이 바뀌었지·”
“아··· 그렇군요·”
TS미디어는 케이블 채널과 영화 드라마 등 각종 미디어 그룹을 소유하고 있는 재벌이었다·
“낯부끄럽지만 내가 젊었을 적에 좀 날렸거든· 흐흐··· 그래서 당시 태성그룹 딸래미랑 대법원장 딸래미 둘 사이에서 엄청 고민했었지· 그러다 정치인이 되기로 마음먹었고 대법원장 딸과 결혼했네· 사랑이 없는 결혼이었지만 나름 만족하고 있어· 만약 내가 그 당시에 태성그룹 딸래미
와 결혼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자네 못지않은 사람이 됐을까?”
“그럴지도 모르죠·”
“흐흐··· 농담이네· 자 흰소리를 됐고 내가 요즘 좀 곤란하게 됐네· 자네가 내준 숙제도 못하고 염치없이 부탁 하나만 하려고 해·”
“말씀하세요·”
“원래 상대방이 치졸한 약점 들출 때 변명을 하거나 나도 똑같이 마타도어를 하는 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
“그래서 상대방과 싸우기보단 능력으로 어필하겠다 뭐 이런 말씀이신가요?”
“맞네·”
영훈은 머리를 긁적이다 말했다·
“의원님·”
“그래 말하게·”
“바둑에 아생연후살타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십니까?”
“알지· 일단 생존을 도모하고 난 뒤 상대방의 집을 깨야 한다는 말 아닌가?”
“아생(我生)부터 하시죠·”
“나? 나부터 살라 그 말인가?”
“네· 혹시 집안에 문제는 없습니까?”
천보윤 의원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봐 최 상무· 자네 말이 백번 맞지만 난 전혀 문제가 없네·”
“그런가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그제야 천 의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네 뭘 알고 있는 건가?”
“의원님께서 만약 진짜로 대선을 꿈꾸신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아내분과 헤어지십시오·”
< 기나긴 레이스의 서막(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