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나긴 레이스의 서막(3) >
“지금 장난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천보윤 의원도 영훈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닌 걸 알았다·
알면서도 물어본 건 자신이 생각할 때 이건 맨정신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어서다·
“의원님한테 이런 주제를 가지고 장난을 칠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내가 왜 아내와 헤어져야 하지? 난 지금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니까 최대한 성심성의껏 대답해주기 바라네·”
“의원님께서 저에게 곁에 서달라고 요청하셨을 때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기다리기만 한 건 아닙니다· 의원님 곁에 섰을 때 과연 회사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인지 그걸 알아봐야 했습니다·”
이번에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작년에 천보윤 의원을 만나고 나서 은밀하게 사람을 시켜 그의 과거를 알아보았다·
어차피 그에 대해서 다른 건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그의 사주에 문제가 되는 건 아내뿐이었으니까·
정확히 한 지점을 찍어 파고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건 그렇겠지·”
“우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과연 의원님이 앞으로도 계속 국회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의원직을 유지하지도 못한다면 그건 최악의 상황인 것이고 자칫 HS그룹의 브랜드 가치까지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의원님이 이상한 추문에 휘말리고 우리가 의
원님을 보좌하는 모양새라면 굉장히 골치 아프겠죠·”
“·······”
“그러니 의원님에 대한 뒷조사를 안 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이해하시죠?”
“이해는 되지만 기분은 나쁘군·”
“기분 나빠하실 것 없습니다· 이것 참 정치인들 하나같이 자신들은 누구 뒷조사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 막상 누가 자신 뒷조사를 한다고 하면 펄쩍 뛰더군요·”
천보윤 의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알겠네· 비난은 그만하고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게·”
“의원님에 대한 뒷조사를 하다 보니 가장 먼저 걸린 게 바로 의원님 사모님이었습니다·”
“내 아내가 어떻길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기 죄송스럽지만 사모님께서 친정에 이것저것 도와주신 게 많더군요·”
“친정에?”
“결혼하셨을 당시에는 친정아버지가 대법원장까지 하셔서 굉장히 대접받았을 텐데 지금은····”
“많이 기울어지긴 했지·”
“가장 큰 건 취업 관련으로 손을 많이 쓰셨던 것 같습니다·”
“확실한 건가?”
“우리가 알아보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면접 점수같이 세부적인 내용은 알아낼 수 없었지요· 그런데 그런 세부적인 내용을 알아보지 않아도 의심스럽긴 했습니다· 조카들이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라는 걸 아시긴 하시죠?”
천 의원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허허··· 이야기를 듣기는 했네· 좋은 회사에 취업했다고 해서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과정에서 내 아내가 움직였을 거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어· 따지고 보면 아예 관심도 없었지·”
“확실한 건 아닙니다· 저야 아주 강하게 의심하는 것뿐이죠· 정확한 건 의원님께서 알아보셔야 하는 부분이고 그 외에도 처가 재산 증식 과정이 아주 의심스럽다는 우리 기조실 직원의 의견도 있었습니다·”
“참 이거··· 부끄럽구만·”
“아직은 의혹일 뿐이죠·”
“문제는 자네가 의혹이라고 생각한다면 야당은 물론이고 국민들도 날 의심하겠지· 잘 알겠네·”
“지금은 도수연 의원에 대한 대응보다 자중하고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점쟁이 같은 말을 하는군·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야· 그렇게 하지·”
“그럼 오신 김에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자네도 같이 들지 그러나? 주인 없는 곳에서 손님만 먹고 가기 영 불편해서 말이야·”
“원래 정치인은 외로운 법 아닙니까? 그리고 여기 식사는 아내와 같이 와서 먹어야지 남자 둘이 먹기는 좀 그렇습니다· 나중에 고기나 한번 같이 드시죠·”
“그러세·”
영훈은 그렇게 방을 빠져나갔다·
천보윤 의원은 룸서비스를 부르곤 그의 보좌관에게 말했다·
“아까 들었지?”
“네·”
그의 보좌관인 최승환은 그가 정치계에 입문할 때부터 따라다닌 수족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최승환 보좌관은 영훈의 이야기를 뒤에서 들은 순간부터 침도 제대로 못 삼키고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최 상무 말이 사실이야?”
“확인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천 의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말 똑바로 해· 너 전혀 모르는 일이야? 아니면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나한테 얘기하지 않은 거야?”
최승환 보좌관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사모님께서 예전에 C&T반도체 사장과 만난 건 알고 있었습니다·”
“왜 그걸 말 안 해!”
“사모님께서 극구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그런데도 확인해봐야 알 것 같다는 말이 나와?”
“하지만 그냥 사모님의 부탁만으로 취업이 된 건지 아니면 돈이나 다른 물품이 오간 정황이 있는 건지는 모르는 거라서····”
“이거 이거··· 야 인마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고 조카 새끼 취업 된 거면 아무것도 오간 정황이 없어도 문제가 되는 거 아니야? C&T반도체가 양주에 시설 투자한다고 규제 풀어달라고 나한테 그렇게 만나자고 한 게 이거 때문 아니야?”
“그건 아닐 겁니다·”
“됐고 가서 이 정신없는 마누라 사고 친 거 다 확인해서 나한테 가지고 와· 네가 아는 건 싹 다 적고 네가 모르는 건 알 때까지 잠도 자지 말고 보고서 올려· 썩 꺼져!”
“알겠습니다·”
최승환 보좌관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방을 나가자 천 의원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혼?
말이 좋아 이혼이지 국회의원이 어디 이혼하는 경우가 흔한가?
천 의원은 식사고 나발이고 입맛이 뚝 떨어져 수행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여의도로 향했다·
“어? 벌써 오셨어요?”
의원실에서 천 의원을 향해 이은정 보좌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국회의원은 두 명의 보좌관을 두는데 최승환 보좌관은 아주 오래 일해서 손발과 같은 사람이었고 이은정 보좌관은 천 의원의 사람이 된 지 3년이 채 안 되었다·
이제 서른이 갓 넘은 그녀는 젊었지만 입이 무겁고 상황 판단이 빨라 은근 많은 도움이 되었다·
“너 잠깐 나 좀 보자·”
“네·”
천 의원은 작은 회의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밖의 비서들이 못 듣게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너 지금부터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 혹시 내 와이프가 나 몰래 사고 친 거 있냐?”
“아니요· 무슨 일 있었어요?”
천 의원은 더 채근하려다가 말았다·
오랫동안 손발이 돼준 최승환은 몰라도 이은정의 조금 융통성 없는 FM적인 일 처리를 고려할 때 적어도 알고서 모른 척 넘어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너무 겁 없고 당돌해서 문제일 녀석이니 말이다·
지금도 놀라서 긴장하기보다는 오히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보지 않는가?
천 의원은 한숨을 푹푹 쉬다가 호텔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숨기고 혼자서 처리할 일이 아니었다·
“만약 HS그룹 최영훈 상무의 의견이 어느 정도 맞다면 이혼할 생각이신가요?”
“이혼이 쉬워? 이혼하면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전부 가정도 제대로 못 지키는 사람이 무슨 국정운영을 하겠냐고 말을 할 거 아니야?”
“야당에서 더욱 그렇게 몰아갈 겁니다·”
“정치인이라고 부부 금슬이 좋아서 이혼하지 않는 게 아닌데····”
“그러니까요· 사실 금슬은 어느 직업보다 안 좋죠· 바람 피는 건 기본에··· 제 동기가 그러는데 강무석 의원 있잖아요? 아니 글쎄 점심시간에 비서랑 의원실에서 그 짓 하다가 제 동기한테 딱 걸린 거 있죠?
“크흠··· 그래?”
역시나 이번에도 이은정 보좌관은 조금만 시동이 걸렸다 하면 이렇게 수다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일은 컴퓨터처럼 칼 같은데 입은 모터가 달렸다고 할까?
게다가 겁도 없어서 국회의원인 자신에게도 거침없이 할 말을 다 하는 여자였다·
“솔직히 국회의원처럼 많은 유혹을 받고 사는 직업이 어디 있겠어요? 어디 가기만 하면 뭘 그렇게 주겠다고 난리인데 그거 꾹 참고 할 일만 하는 사람이 대단한 거죠· 205호에 있는 유근혁 의원도 국정감사에서 여배우 뒤 봐주다 걸리고···· 하여튼 전 이래서 국회의원인 남자랑은 결혼 안
할 거예요·”
“인마 국회의원 와이프들은 그거 모르고 있을 것 같아? 다~ 알면서 넘어가는 거야·”
“알죠· 그래서 제가 우리 의원님 존경하잖아요· 제 동기들도 의원님은 여자문제 없다고 얼마나 부러워하는데요?”
“됐고 어떻게 생각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대로 이혼해도 될 것 같아?”
이은정 보좌관은 잠시 눈을 껌뻑이며 고민하다가 말했다·
“요즘은 옛날하고 달라서 이혼했다고 가정도 못 지키는 의원이 나라를 어떻게 운영하냐는 식의 말이 국민한테 덜 먹혀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결국 국민들이 바라는 건 잘 먹고 잘 살게만 해주면 되는 거니까요·”
“그건 맞아· 좋아· 일단 너 도수연 의원 동향 빠르게 체크해서 3시간 단위로 보고해·”
“어디 가시려고요? 5시에 최고위원 회의 있는데요?”
“집안 문제부터 처리해야겠다· 그리고 조용하게 우리 비서진들 혹시 어떤 문제 있는 건 아닌지 체크해· 이제부터 살얼음판 걷는다 생각하고 조심 또 조심하는 거야·”
“알겠습니다·”
천보윤 의원은 마음을 강하게 먹었다·
*
명일금융의 송병창 사장은 요새 매일 채권 회수액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경리가 매일 영업사원들의 실적을 보고함에도 그는 대충 보는 척하며 서류를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그때·
똑똑····
“사장님 회장님 오셨습니다·”
“어 그래·”
경리가 나가고 바로 송은채 회장이 들어섰다·
그녀는 변함없이 조금은 우중충하고 조금은 을씨년스러운 인테리어를 둘러보고는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사무실을 좀 옮기는 게 어떠니?”
“사채업 사무실이 너무 밝으면 손님들은 우리가 젠틀한 줄 알거든· 적당히 누리끼리해야 겁을 먹지·”
“아직도 그런 마인드로 일하니?”
“그냥 분위기가 그렇다는 거야· 사무실 옮겨봐야 직원 더 늘릴 것도 아니고···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게 내 건물인 거 잊었어?”
“하긴····”
“그것보다 생각 좀 해봤어?”
송 회장은 그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너 잘할 수 있는 거야?”
“나도 오래 생각한 거야· 많이 준비하기도 했고·”
“후··· 그래 네가 나한테 돈을 빌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하겠다는데 내가 말릴 이유가 없지· 직원들 시켜 알아보니까 강명저축은행이 괜찮은 매물이라고 하더라· 인수자금은 1300억 정도면 될 것 같다고 하네· 괜찮겠니?”
“500억 정도 부족하긴 한데 그건 마련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사채 쓰는 건 아니고?”
“내가 사채업자인데 그런 고금리를 쓰겠어? 내가 가진 HS물산 지분이랑 이 건물 내놓으면 대충 맞기는 할 거야·”
지은 지 40년도 넘은 이 오래된 건물은 명동에 위치했다는 이유만으로 수백억 원이 넘어간다·
그가 가진 HS물산 지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할 때 이 건물의 값어치가 거의 500억 원에 육박한다는 걸 송 회장도 지금에야 알았다·
“와··· 너 이거 150억인가에 경매로 산 거잖아?”
“내가 원래 운이 좋잖아· 생각해봐· 누나가 지금 아끼는 그 사위 내가 처음에 데리고 온 거야· 나 아니었으면 우리 예쁜 조카는 그만한 사위 못 얻었어·”
“그래서 연희가 항상 삼촌 챙기잖아· 이번에 너 저축은행 하나 인수할 거라고 하니까 가장 먼저 연희가 물건 찾고 그랬다·”
“흐흐··· 걔가 겉으로 봐서는 조금 냉정한 면이 있어도 속으로는 가족을 참 잘 챙겨· 최 상무는 언제 시간 된대?”
사실 송병창 사장은 영훈이 현진물산으로 가면서 얼마나 아쉬워했었는지 모른다·
1년만 같이 일했으면 그가 벌어다 줬을 돈이 얼마일지 계산하며 그렇게 아쉬워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귀신 같은 놈이 조카와 결혼한다는 소식에 남모르게 쾌재를 불렀었다·
그 귀신같이 사람 보는 눈을 이제 빌려(?) 쓸 수 있게 됐다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최 상무 꼭 필요하니?”
“당연하지· 강명저축은행이 조치연 영감 것인 줄은 알지?”
“알지·”
“난 그 영감이 신줏단지처럼 끼고 도는 저축은행 내놓을 때 느낌이 싸했어· 좋은 기회인데 내가 먹어도 안 체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최 서방 의견이면 내가 한번 밀어보려고·”
“최 상무 바쁜데····”
“거 참 비싸게 구네· 이럴 거야?”
“알았어· 얘기해놓을게· 그런데 넌 언제 애 가질 거니?”
“쓸데없이 애 타령은····”
송병창 사장은 툴툴거렸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 기나긴 레이스의 서막(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