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의 기억(1) >
“오빠 일어나· 콩나물국 끓였어·”
연희는 잠든 영훈을 살살 흔들었다·
어제 기조실 직원들과 회식한다고 늦게 들어온 영훈이 7시가 다 됐는데도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얼른~ 오늘 아침에 회의 있잖아· 얼른 일어나서 먹고 출근해· 나 씻고 나올 테니까 식탁에 가 앉아 있기·”
그녀는 영훈을 억지로 흔들어 깨우고 씻으러 들어갔다·
영훈은 겨우 몸을 일으켜 시계를 확인했다·
“아우··· 죽겠다·”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그였지만 어제 회식은 무작정 뺄 수가 없었다·
타 부서에서 선 좀 대보겠다고 없는 일도 만들어서 잘 보이려고 하는데 같은 기획조정실 직원들이 그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안 봐도 뻔했다·
그런 상황에 회식까지 자꾸 빼면 팀원들의 사기가 떨어질 건 불문가지·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이 모습이었다·
영훈은 잠시 앉아서 잠을 깨고 식탁에 가 앉았다·
콩나물국과 각종 반찬에 갈치구이까지·
콩나물국이야 어제 미리 사다 놔서 끓이기만 했을 테지만 아침부터 힘들게 일어나 부산스럽게 생선을 구웠을 생각을 하면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한 숟갈 뜨니 시원한 국물이 속을 달래준다·
연희는 자신이 요리에 재능과 관심이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 굳이 자신 없는 요리에 시간을 들이려고 하지 않고 적당히 반찬가게에서 파는 음식을 이렇게 사다 놓는다·
이 점은 영훈도 아주 만족했다·
정성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맛없는 음식을 먹기는 싫으니까·
그리고 요리는 영훈도 그리 좋아하지 않아 이렇게 사다 먹는 게 좋았다·
“콩나물국 괜찮지?”
연희가 씻고 나와서 물었다·
“응 맛있네·”
“여기 새로 생긴 반찬가게에서 사 왔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연세가 좀 있어서 그런가 음식 솜씨가 괜찮은 것 같아· 내가 결혼했다고 하니까 새댁이라면서 양념깻잎이랑 달래무침 많이 주셨어·”
“으음··· 그래?”
“어제 내가 송은진 실장이랑 만났던 얘기 했었나? 아니 청담동에 로드샵 보러 갔다가····”
연희는 아침이나 저녁이나 항상 쉬지 않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산에서 꼭 필요한 말만 골라서 하는 스님들과만 살다가 이렇게 수다스러운 그녀와 같이 있으니 사람 사는 것 같다고 할까?
그런데 이야기를 듣는 와중 하나가 귀에 꽂혀왔다·
“하남 신도시?”
“어· 거기에 HS건설이 땅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네한테 팔라고 하는 거야· 근데 아무리 봐도 ‘거기가 백화점 들어갈 자리인가?’하는 생각만 들어· 못해도 수천억 들어갈 텐데···· 오빠도 이상하지?”
“신도시 규모가 어느 정돈데?”
“그렇게 안 커· 내가 알아보니까 대략 3만 가구 정도?”
“크지는 않네·”
“그러니까· 우리가 모르는 무슨 정보가 있나?”
“왜? 팔려니까 아까워서?”
“합리적인 가격이라면 모르겠는데 괜히 팔라고 하니까 뭐가 숨겨진 게 아닌가 싶어서 그러지· 내가 옛날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어·”
“뭔데?”
“땅은 가만히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그 땅을 팔라는 사람이 나타난대· 그때 절대 땅을 팔면 안 된다는 거야·”
“그럼 언제 팔아?”
연희는 손가락을 세 개 펴 보였다·
“딱 석 달· 이 석 달 동안 땅을 팔라는 사람이 두 명 이상 나타나지 않으면 땅을 팔아도 된다· 그런데 이 석 달 동안 땅을 팔라는 사람이 세 명이면 고민해보고 네 명 이상일 때는 절대 팔면 안 된다고 했어·”
“오호~ 그거 뭔가 심오해 보이는데?”
“우리 외할아버지가 어디 배만 팔아서 부자가 됐겠어? 부산 말고도 전국에 땅을 엄청나게 사놓으셨다가 그걸로 엄청나게 큰돈을 버셨거든· 어쨌든 그런 할아버지의 말이 딱 떠오르는 거야· ‘아! 그렇구나· 지금부터 카운트 들어가야겠다·’ 이렇게·”
“석 달 안에 몇 명이나 관심을 보이는지 한번 보자· 나도 궁금해지네?”
“그렇지?”
“그런데 왜 하필 석 달이라고 하셨대?”
연희는 오랜만에 영훈에게 가르쳐 줄 것이 생기자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에헴! 잘 들어봐· 보통 땅은 정보 싸움이라고 하셨어· 그 정보는 대개 정부 주도 하의 개발 정보거든· 그런 정보는 은밀하기는 해도 완전한 비밀일 수가 없어서 누구 하나만 알기가 힘들대· 알면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그 몇 명의 사람들이 움직인다는 거지· 그럼 개발의 핵심 지역에 들어
가 있는 땅은 결코 한 사람만 노릴 수가 없다는 거야·”
“그렇겠네·”
“땅값이 왜 오를 때는 많이 올랐다가 떨어질 때는 많이 안 떨어질까? 그건 땅이 가진 고유의 특성 바로 세상에서 그 땅이 유일한 땅이라서 그래· 두 개도 없고 세 개도 없는 유일한 그 땅을 가진 사람이 개인 혼자라서 안 팔면 안 팔았지 올라간 가격을 결코 내리지 않기 때문이야·”
영훈은 그녀의 강의에 고개를 끄덕였다·
“으흠··· 아파트는 땅하고 달라서 내릴 때는 조금이라도 내리는 거네?”
“그렇지· 같은 부동산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파트는 땅하고 비교할 수가 없는 거거든· 어쨌든 만약 정말 중요한 땅이라면 못해도 석 달 안에 땅을 팔라는 사람이 셋 이상은 나타날 거라고 하셨어· 그럼 그 땅은 무조건 열 배 이상이고·”
“열 배?”
“응· 그것도 그냥 열 배가 아니라 못해도 열 배· 원래 돈 없는 서민들이나 아파트에 목매는 거야· 진짜 부동산을 아는 사람들은 아파트가 아니라 땅을 사지·”
“그 아파트 가격 때문에 사람들이 웃고 우는 거야·”
영훈의 핀잔에 연희가 눈을 흘긴다·
“치···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야·”
“알아· 그래도 항상 말조심해야 해·”
“알겠어· 아! 그런데 내가 준 이 오피스텔 얼마인지 알아봤어?”
“어? 안 알아봤는데?”
“치··· 내가 준 건데 얼마 하는지도 안 알아봤어? 오빠도 확실히 재벌 다 되셨네·”
결혼할 때 연희는 이 커다란 오피스텔 하나를 그냥 명의이전 해주는 통 큰 결정을 했다·
나름 결혼 선물이라는데 재벌들은 다들 그런가 보다 하며 넘겼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오피스텔이 얼마나 하는지 지금까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러게 왜 안 알아봤을까· 내 연봉보다 훨씬 비쌀 텐데·”
“우리 엄마도 그래· 엄마가 사는 집이 얼마인지 얼마나 올랐는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아· 그런데 HS건설이 가진 땅 값은 궁금해하실걸?”
“오호라 그게 재벌 마인드다 이거지?”
“말하자면 그렇지· 어쨌든 석 달 기다려보고 진짜 은진 언니 말고 찾는 사람이 없으면 파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오빠는 신도시에 아파트 건설하는 거 관심 없지?”
“그냥 그런 생각 자체가 없었지· 인도 신공항 때문에 다들 정신없으니까·”
신공항 공사 첫 삽을 뜬 지는 이제 3개월도 채 안 됐다·
그동안 설계와 토지매입 등 사전 작업으로 보낸 시간이 한세월이었고 이제 본격적으로 공사가 들어간 상황이었다·
특히 토지매입을 주도했던 NJS사가 매입비용 가지고 장난을 조금 치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더 지체되기도 했었다·
어쨌든 이번 인도 신공항 공사를 시작으로 HS건설이 PM을 처음 시도하는 만큼 배울 게 많기도 했다·
HS건설의 핵심역량을 모두 그곳에 쏟아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그러니 국내 건설은 조금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이나 그 말이나···· 아 그리고 외삼촌이 오빠 좀 만나고 싶다고 한 거 알지?”
“어 들었어· 나한테 직접 이야기하시지· 안 그래도 오늘 출근할 때 뵙기로 했어·”
“오빠한테 직접 부탁하기 미안하셨나 봐· 그래서 우리 엄마한테 빌린다고 허락받은 거지· 안 그래도 오빠 바쁘잖아·”
“난 바빠도 괜찮은데·”
한평생 한가하게 살아온 삶이었기에 현진물산에 입사한 이후의 바쁜 삶은 나름 만족스러웠다·
오히려 이러다 갑자기 회사가 망해서 백수가 되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고민을 했었던 적도 있을 정도였다·
“잘 좀 도와줘· 삼촌이 우리 신혼여행도 보내주시고 그러셨잖아·”
“알지· 걱정하지 마·”
결혼 당시 신혼여행은 꼭 자기가 보내주겠다고 하면서 경비 일체를 다 대준 게 연희 외삼촌인 송병창 사장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은근히 영훈을 어려워하고 있었다·
조카사위에다가 전에 직원으로 부리던 사람이었지만 어쩌면 영훈의 기이한 능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기에 더 어려워하는 것이리라·
영훈은 식사를 마저 하며 화장기 없이 활짝 웃고 있는 연희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
“어! 조카사위!”
송병창 사장은 명동역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영훈이 타고 온 차에 올라탔다·
“안녕하셨어요?”
“너무 안녕해서 탈이지· HS그룹은 조카사위 없으면 안 돌아간다며?”
“하하 아니에요·”
“아니긴··· 내가 누님한테 조카사위 빌린다고 얼마나 눈총을 받았는데· 사위 유세가 장난이 아니야· 어디 나 아니었으면 이런 사위 얻을 수나 있었겠어? 안 그래?”
“하하하! 맞습니다·”
“연희하고는 싸우고 그러지 않지?”
“네 안 싸워요·”
“그래 결혼하면 금슬 좋은 게 최고야· 집안에 분란이 있으면 밖에서 일이 손에 안 잡히거든·”
“네····”
간접적으로 본인 결혼생활이 힘들다고 토로한 거지만 차마 맞장구를 칠 수 없어서 영훈은 멋쩍게 웃었을 뿐이다·
그렇게 송 사장이 사소한 개인 일상을 이야기하다 본론을 꺼냈다·
“조치연이라고 한때 명동 사채시장에서 알아주는 걸물이 있었어· 그 영감이 가진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였는데 옛날에는 건달들 데리고 나쁜 짓도 많이 해서 같은 사채업자들한테도 그리 평판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
“그렇군요·”
“그러다가 IMF 때 다 쓰러져가는 저축은행을 하나 인수했는데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거야· 마가 꼈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 영감탱이 입장에선 아주 분통 터뜨릴 일이지·”
“어떤 일이었습니까?”
“말도 마· 다양해· PF(Project Financing)로 올린 건물이 대규모 공실이 나와서 건물주가 자살하고 공매로 헐값에 팔린 일도 있었고 회사채에 손댔다가 수백억인가? 하여튼 엄청 손해 봤다고도 들었고· 우리 조카사위는 손을 대면 다 성공이었는데 그 저축은행은 손만 대면 다 망하는 거
야· 그것도 참 신기해·”
“허··· 그렇네요· 신기하네요·”
“그 물건이 지금 나왔는데 요즘 저축은행이 매물로 잘 안 나와· 난 이제 사채업자 접고 금융권으로 진출하고 싶은데 딱 적당한 가격에 나온 매물이 그거라서 우리 조카사위 의견을 좀 들으려고· 괜찮지?”
“그럼요· 그런데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거 없어· 우리 조카사위 예전에 채무자들 만나고 다닐 때 돈 나올 구멍이 있는지 기가 막히게 알아냈잖아? 조치연 영감탱이 만나서 진짜 소문대로 거의 망한 상태인지 아니면 저축은행만 털어내려고 하는 건지 눈치만 좀 봐줘·”
“진짜 망한 거라면요?”
“흐흐··· 말했지? 그 영감이 가진 재산이 대단했다고· 아마 저축은행 말고도 헐값으로 내놓으려고 마음먹은 게 몇 개 될지도 몰라·”
“그렇군요·”
영훈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운전에 집중했다·
도착한 곳은 성북동의 한 저택·
높은 담과 곳곳에 자리한 CCTV로 마치 낯선 사람들을 거부하는 성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삐!
“누구세요?”
“예! 명일금융 송병창입니다!”
우렁찬 고함소리에 문이 열리고 들어선 집은 부잣집임에도 조금 어두운 느낌을 주었다·
넓은 마당과 고풍스러운 문을 거쳐 눈이 휘둥그레질 가구들을 지나쳐감에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적막한 집은 어딘가 모르게 을씨년스러웠다·
“아이고 어르신· 몸은 괜찮으십니까?”
송 사장이 황급히 발을 놀려 비쩍 마른 나이 지긋한 영감에게 다가갔다·
“죽을 때 된 노인이 몸이 괜찮겠어? 아침마다 살아있으면 감사하고 사는 게지· 너도 늙었다·”
“저도 이제 한창때는 다 갔습니다· 어르신 옆에서 돈 버는 거 배울 때가 어제 같은데·”
“쟤는 누구냐?”
조치연이 손가락으로 영훈을 가리켰다·
“조카사위 와서 인사드려·”
“조카사위? 조카가 결혼했는데 인사도 안 했냐?”
“아이고 어르신 제 결혼도 아니고 조카 결혼을 어떻게 알립니까·”
“알리면 내가 축의금 좀 안 줬을까·”
영훈이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HS그룹 기획조정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HS? 아··· 네 누나가 거기 주인이라고 했지?”
“네· 맞습니다·”
“내 은행도 네 누나 돈으로 사는 거냐?”
“아닙니다· 예전에 누님 도움받은 게 씨앗이 돼서 좋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전부 제 돈으로 사는 겁니다·”
“잘했다· 은행을 남의 돈으로 사면 결국 내 꼴 나는 법이거든· 그런데 이 아이는 왜 데리고 온 거야?”
“아··· 실은 제 조카사위가 손대는 것마다 항상 좋은 결과를 얻어서 좋은 기운 좀 받으려고 데리고 왔습니다·”
조치연은 송 사장의 말을 거의 듣지도 않은 채 영훈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어찌 얼굴이 꼭 점쟁이 같누? 야 봐라· 저 눈이 어째 회사원이라고 할 수 있겠나·”
< 돈의 기억(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