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의 기억(2) >
송병창 사장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말했다·
“아이고 어르신 살 날이 창창한 젊은이한테 점쟁이가 뭡니까? 우리 조카사위 시선이 조금··· 분위기가 있기는 한데 점쟁이는 너무 가셨습니다·”
사실 송 사장 역시 영훈이 여느 점쟁이 이상으로 사람의 속을 뚫어보는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어 그의 말에 일부 동의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이런 말을 듣게할 수는 없었다·
남도 아니고 이제는 그 누구보다 끔찍이 아끼는 조카사위 아닌가?
“아니면 아니지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있나? 왔으니까 앉아· 목 아프다·”
“예·”
조치연 영감은 맞은편 소파에 앉은 송 사장과 영훈을 빤히 바라보았다·
특히 영훈의 얼굴을 호기심 어리게 바라보던 그는 툭 던지듯 말했다·
“너 내 밑에서 함 일해보지 않겠나?”
“저요?”
깜짝 놀라는 영훈을 보고 조치연이 송 사장을 가리키며 반문했다·
“그럼 내가 이놈한테 얘기했겠나?”
“왜 저는 안 됩니까?”
“넌 그만하면 됐어· 이미 네 그릇에 차고 넘친다·”
영훈은 그 말을 듣고 내심 감탄했다·
오래된 생강이 맵다고 했던가?
아니면 천부적으로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난 것인가?
영훈은 애초부터 저축은행 인수를 시작으로 금융권의 큰 손이 되겠다는 송 사장의 포부에 그의 꿈처럼 크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송 사장의 그릇은 그 포부를 담을 만큼 크지 않다고 보았으니까·
그런데 조치연은 단박에 그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러시더니··· 저 어르신 밑에서 고생하고 나서 이제 명동에서 방귀 좀 뀝니다·”
“알아· 나는 무슨 눈 감고 귀 닫고 사는 줄 아나? 너 내보낼 때 내 욕 많이 했지?”
“아유~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욕 엄청시레 했을 게 안 봐도 뻔하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잘 됐지?”
“예 어르신 말씀 듣고 열심히 해서 잘 이뤄냈습니다·”
“배울 만큼 배웠으니 내보낸 거다· 난 너를 쓸 수 있는 만큼 잘 썼고 너도 배울 만큼 배웠으니 서로 아쉬울 게 없었던 게야·”
“그래도 그때 너무 급하게 내보내셨습니다·”
“시끄러워· 계속 있었으면 나쁜 버릇이나 들었겠지· 네가 나보다 딱 하나 나은 게 있다면 돈보다 사람을 먼저 본다는 거다· 그런데 그 장점 하나 마저 날 닮아서 무뎌지면 넌 동네 일수방 운영하기도 힘들었을 게야·”
“···”
조치연은 영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가 내 손에 들린 은행을 뺏을 놈이라는 거지?”
“네? 아닙니다· 전 은행에 관심 없습니다· 게다가 1금융권 은행도 아닌데···”
비하하는 말임에도 그는 오히려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거 봐· 배울 게 많잖아·”
“배울 게 많다구요?”
“잘 들어라 어린놈아· 저축은행이 비록 1금융권보다 덩치는 작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오히려 저축은행이나 3금융을 이용해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
“사람 장사라는 말입니까?”
“병창이보다 이해는 빠르구나· 돈은 숫자처럼 보이지만 결국 사람이다· 사람을 보면 돈이 보이는 거고 사람을 관리하면 돈을 관리하는 게야· 그 이야기는 뭐겠어? 저축은행은 1금융권이 품지 못할 사람을 관리하게 되는 거란 말이다· 이해했나?”
“네 이해했습니다·”
쭈글쭈글한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가리킨 그가 말했다·
“요··· 요 머리는 이해가 되는데 그 원리를 체득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네 녀석은 머리는 모르고 있으면서 본능적으로 이미 알고 있구나·”
“제가요?”
“그럼· 알고 있으니까 그런 눈빛을 하고 있지·”
“제 눈빛이 그렇게 특이한가요?”
그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고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영훈의 전신을 훑었다·
“인간은 동물이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약자와 강자를 구분해내· 그래서 날 만나는 사람들은 전부 움츠러든다· 내가 자기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걸 알거든·”
금방이라도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몸에 비해 그의 눈은 맹수의 눈처럼 번뜩였다·
맹수··· 그의 말처럼 그는 맹수였다·
“확실히 기세가 보통이 아니십니다·”
“흐흐··· 그래· 보통이 아니지? 또?”
즐거운 듯이 물어보는 그를 보며 영훈도 장단을 맞춰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점쟁이로 낙인찍힐 것 같아 한발 물러섰다·
“잘 모르겠습니다·”
“흥! 그런 얕은 거짓말에 내가 속을 것 같으냐? 얼른 속에 있는 걸 꺼내 봐· 안 그러면 여기 이놈하고 같이 내쫓아 버릴 테다!”
버럭 소리 지르자 송 사장이 움찔 놀라며 영훈을 돌아보았다·
난감한 영훈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막 소리 지르고 그러시면 건강에 안 좋습니다·”
“시끄럽고 대답이나 해라·”
“집안의 가구를 보니 영감님의 성격이 어느 정도 보이긴 합니다· 중국 황실에서 쓸 것 같은 가구는 다른 건 몰라도 돈으로 상대방을 윽박지르기 위함인 것 같은데··· 사람들은 영감님을 보기 전에 집의 인테리어에서 위압감을 느껴 고개를 숙일 것 같네요·”
조치연은 영감이라는 단어에도 기분이 좋은지 갑자기 실실 웃으며 말했다·
“흐흐··· 봐라· 내 말이 맞지? 감히 내 앞에서 날 평가하는 저딴 소리를 지껄이는 사람은 딱 두 부류였다· 하나는 검사 그리고 하나는 점쟁이·”
영훈은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올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정말 대단한 노인네다·
이 노인네가 관상을 배웠으면 자신 못지않았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그런가요?”
“검사는 아니고 그럼 점쟁이인데 점쟁이가 아니라는 게 더 놀랍네· 이래서 세상 오래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었나? 하여튼 내 밑에서 딱 10년만 일해· 그럼 대한민국을 네 손으로 주무를 수 있을 게다·”
송병창 사장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저는 그릇이 안 되고 제 조카사위는 딱 봐도 그릇이 커 보입니까?”
“이놈아 그릇이 큰 게 아니라 그릇이 안 보인다· 저 어린놈이 나랑 맞먹으려고 드는데 내가 가진 지식만 넘겨주면 이 조그마한 대한민국 하나 휘어잡지 못할까?”
큰소리를 뻥뻥 치는 조치연을 보며 송 사장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 영감이 정말 조카사위를 마음에 들어한다는 건데 지금까지 그가 저렇게 사람을 욕심내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 욕심이 뭔가?
눈에 걸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벌레 취급하던 그였다·
죽을 때가 돼서 사람이 변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조카사위에게 반한 것일까?
“어르신 이미 조카사위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가 HS그룹이에요· 그것도 그룹 기획조정실· 저야 누님에게 받을 게 없다지만 사실상 HS그룹을 이어받을 사람입니다·”
“그럼 더 나한테 배워야지!”
영훈은 흥분하는 조치연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영감님에게 배우는 건 저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뭐? 어째서?”
“방금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돈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제가 점쟁이는 아니지만 이상하게 사람은 좀 볼 줄 압니다· 그러니 조금 부족한 거야 회사 일을 하며 차근차근 배워가면 될 듯합니다·”
“내가 고작 사채나 굴려서 돈 벌었다고 무시하는 게냐? 대한민국 어떤 재벌도 내 앞에서 아쉬운 소리 하지 않는 놈이 없었다·”
“전 돈으로 군림하는 재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삶의 공식을 미리 알고 있는 것 그게 꼭 좋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실패도 해보고 좌절도 겪어 보고 깨달으며 살 때 인생이 재미가 있다고 생각해서요· 미리 다 알고 있으면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리 재미있지는 않거든요·”
조치연은 생각지 못했던 대답이었는지 순간적으로 멍하게 영훈을 바라보았다·
“재미없다고? 공식을 알면 인생에 재미가 없어?”
“어르신은 공식을 알고 나니 재미있으십니까?”
“재미라··· 그래 재미는 병창이 점마 오기도 전에 명동 바닥을 박박 긁고 다닐 때가 재밌었지· 그때는 오감이 열려 있었다· 몸의 솜털 하나하나가 안테나처럼 세상을 온전히 느꼈지· 비참하고 또 환희에 가득 차 있기도 했었어·”
그렇게 말하던 조치연은 영훈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넌 이미 알고 있구나· 아흔을 바라보는 나보다 인생을 알고 있어· 넌 점쟁이가 아니라 승려구나·”
“···”
“됐다· 내가 승려 데리고 돈 버는 법 가르친다고 용쓰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겠나? 병창아·”
“네·”
“강명저축은행을 내가 왜 파는 줄 아나?”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알아보니 특별한 문제도 없는 것 같고···”
“너 줄라고 파는 게야·”
“저요?”
송 사장이 깜짝 놀란다·
“그래· 내 밑에서 똥싼 거 치운다고 그 고생하다가 홀로 나와서 멋지게 일어섰으니 하나쯤 챙겨주려고 그런다· 그래도 헐값에는 못 넘긴다· 얼마나 생각하고 왔어?”
“1300억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50억 더 얹어라· 애초에 팔 이유가 없는 물건 가져갈 수 있는 옵션값이라고 생각해·”
50억·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클 수 있는 금액이다·
하지만 송 사장은 여기서 조치연의 계산법을 걸고넘어질 생각이 없었다·
그 정도면 받아들일 수 있는 금액이니까·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만 나가봐·”
“네?”
“네 볼일 끝났잖아· 난 이 어린놈하고 이야기 좀 해야겠으니까 나가 있으라고· 왜? 더 욕심나는 게 있어?”
“하하··· 오랜만에 와서 이렇게 나가는 게···”
“넌 그만 됐다· 더 가지면 탈 난다·”
“알겠습니다·”
송병창 사장은 아쉬움이 역력했지만 더는 자리에서 뭉개지 못하고 영훈에게 살짝 윙크하고는 물러났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이야기하다 나오라는 뜻이다·
송 사장이 나가고 나서 조치연이 은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왜 저 놈에게 저축은행을 넘겼는지 알겠나?”
“···”
고민하는 영훈을 보고 그가 웃었다·
“모르는 척 의뭉 떨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봐· 내가 이 나이 먹고 다른 곳에 떠벌리겠나?”
“자식같이 생각하셨던 게 아닙니까?”
조치연의 눈동자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그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저놈한테 몹쓸 짓을 했다· 저놈이 우리 희주 데려간다고 하길래 흠씬 패서 치도곤을 내줬다· 다시는 그런 생각 안 한다 하길래 그래도 곁에 두고 일을 가르쳤는데 그게 마음에 한이 됐는지 얼마 못 버티고 나갔다·”
“송 사장님 집안이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그래· 집안이 마음에 안 들었다· 온갖 재벌들이 내 돈 탐낸다고 달려드는데 다 쓰러져서 일어설 기미도 없는 정치인 가문에 뭐하러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을 넘겨준단 말이야? 그런데 남들 다 선망해 마지않던 재벌가에 보낸 딸이 죽어서 돌아왔다· 그것도 맞아서 죽었단다·”
회한이 가득한 그의 눈에는 눈물도 메마른 것 같았다·
“그래서 후회하고 계시는군요·”
“후회한다고? 아니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시간을 과거로 돌린다고 해도 난 똑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거짓말 같은데요?”
“아니 거짓이 아니다· 애초부터 잘못된 인생이었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잘못된 길을 갔었던 거야· 그래도 난 후회하지 않아· 그 지독한 쓴맛만큼 단맛도 맛보았으니까·”
“그런데요?”
“오래전에 점쟁이 하나를 만난 적이 있었다· 다른 점쟁이들은 하나같이 내 삶에 이런저런 참견을 하려고 들었어· 뭘 해야 하고 뭘 하면 안 되고··· 난 부처도 하나님도 믿지 않았지만 지랄 맞게도 점쟁이 말을 들었다· 그 놈들이 꼭 안 믿으면 큰일 날 것처럼 협박을 해대니 부적도 꼬박꼬
박 사고 그랬지· 그런데 그 점쟁이는 나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럼 무슨 말을 했습니까?”
“내가 잘못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미 되돌릴 수 없다고 했어· 그 자비 없는 점쟁이는 내가 돈을 버는 만큼 업이 쌓여 자식들에게 간다고 했지· 그리고 그렇게 됐다· 맞아 죽어 돌아온 딸의 시신이 잊히지 않아· 아픔이 사그라들지 않고 한이 쌓였다· 이제 난 죽기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겼다· 그리고 하늘은 날 버리지 않았음이야· 병창이 녀석에게 죽기 전에 하나 주고 가려고 했는데 그 녀석이 널 데리고 와줬으니 희주가 하늘에서 날 보고 있음이다·”
“제가요? 아직도 절 점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눈빛이 점쟁이 눈빛이라고 그랬지? 네 눈빛이 딱 그때 그 점쟁이를 닮았거든· 내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점쟁이였다· 이름은 모르고 다들 그녀를 연화신녀라고 불렀지·”
순간 영훈은 격동을 참을 수 없었다·
조치연은 눈빛이 흔들리는 영훈을 보고 말했다·
“하나 남은 아들 녀석이 이제 손주를 얻었다· 하지만 난 복수를 하고 싶다· 내 업이 손주에게 갈 건지 그게 궁금하다· 넌 대답을 알고 있지?”
< 돈의 기억(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