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와 아들(1) >
강남역 한복판에 위치한 어느 고가 오피스텔·
월세만 5백만 원이 넘는 이곳 오피스텔에서 언젠가부터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는 이형준 상무가 있었다·
그는 와인을 마시며 휘황찬란한 강남역 야경에 눈을 두고 있었는데 그런 그의 맞은편에는 50이 넘은 남자가 이마에서 땀을 흘리며 장고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형준 상무는 느긋하게 말했다·
“제가 스무 살 때 경제학원론을 교수님께 배웠잖아요· 그때 경제학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솔직히 전 중·고등학교 때 수능 공부를 어쩔 수 없이 하기는 했지만 진짜 지루했었거든요· 대학 와서 고등학생 때 못 놀았던 거 다 놀려고 했는데 그때 경제학을 듣고 ‘아··· 경제라는 게 이렇게 재
밌는 거구나’하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다니 고맙군·”
“그래서 교수님이 우리 회사 사외이사시라는 걸 처음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교수님의 한국 경제를 향한 진정성 있는 고민과 깊이 있는 분석력이라면 회사에 큰 보탬이 되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실망이 컸겠군·”
이형준 상무는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그건 아닙니다· 교수님께서 우리 신영금융을 경영하시는 것도 아니신데··· 그런데 실망한 것보다는 조금 안타까웠습니다· 제가 교수님한테 이렇게 불편을 드려야 하니까요·”
“···”
김재준 교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고민이 많으신 건 알겠는데 이제 그만 하세요· 제가 다 마음이 아파서 그럽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해· 참 열심히 살았는데··· 죽을 만큼 공부했는데 고작 부자들 권력 싸움에 힘없이 휩쓸려 갈 수밖에 없다니· 이거 참···”
“그래도 교수님은 모두에게 존경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애초부터 교수님이 우리 회사 사외이사직을 맡지 않으셨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겁니다·”
“후··· 알겠네·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하지·”
“믿어도 되겠습니까?”
“계약서라도 써주길 원하나?”
형준은 입을 씰룩이다가 쿨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닙니다· 교수님을 믿죠·”
“내가 아니라 자네 손에 들린 그걸 믿는 거겠지·”
“아무렴 어떻습니까· 그저 제가 교수님을 정말 좋아한다는 거 하나만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저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저도 살려고 그러는 거니까· 아참 와인 괜찮으니까 가실 때 와인셀러에 있는 거 하나 꺼내 가세요· 전 이만 약속이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천천히 나오세요· 그럼···”
형준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리고는 오피스텔을 나갔다·
형준이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김재준 교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냥 문을 향해 걸어가다 와인셀러 앞에서 걸음을 멈추곤 피식 웃었다·
“인생 좆같네·”
그게 어떻게 이형준 상무에게 넘어갔을까·
단 한 번의 실수였는데···
김재준 교수는 궁지에 몰린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졌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달리 먹기로 했다·
그는 와인셀러를 열어 그 중에서 가장 비싼 와인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뒷자석에 와인 두 병을 고이 모셔두고는 전화를 걸었다·
수신자는 이세준 부회장이었다·
“부회장님 저 김재준입니다·”
[어 이 야밤에 웬일이야?]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 부회장님 손 못 들어드릴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그렇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너 내가···]
“압니다· 저도 제가 부회장님을 이렇게 배신하게 될 줄 몰랐는데··· 이 나이 먹으니까 제겐 가족밖에 안 남았습니다· 가족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죄송합니다· 그래도 부회장님께 전화드린 건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충성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건강하십시오·”
김재준 교수는 그렇게 무거운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끔찍이도 하기 싫은 전화였지만 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짐을 느낀 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 수신자는 와이프였다·
“어 나야· 지금 집으로 들어가· 운 좋게 엄청 좋은 와인 하나 얻었다· 안주 좋은 거 준비해 놔·”
어쩔 수 없었다·
비록 마음은 안 좋았지만 어차피 재벌들 사이에 흔히 벌어지는 일들 중 하나일 뿐·
그저 자신처럼 없는 이들은 적당히 그 가운데서 취할 수 있는 것만 취하거나 살아날 구멍이 보이면 잽싸게 목숨을 연명하는 길뿐이다·
*
이세준 부회장은 전화기를 쥐고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처음부터 아예 목을 쳐버렸어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포위망을 슬금슬금 피해가며 세력을 키운 올빼미 녀석은 어느새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커버렸다·
이대로 다음 주총까지 이어지면 다음 부회장은 자신이 아닌 아들 녀석이 될 게 뻔했다·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죽더라도 혼자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옷을 챙겨입고 아버지가 머물고 있는 강원도 양양의 저택으로 향했다·
바다를 좋아하는 아버지는 작년부터 부쩍 회사 일에 손을 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한번 양양의 저택으로 가면 사흘이고 나흘이고 있다가 돌아오고는 하셨다·
거기서 마지막 혼을 불태우시려는지 젊은 여자들을 불러놓고 논다고 하는데 차마 말릴 수 없어 두고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거저거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수행기사도 부르지 않은 채 무작정 운전대를 잡고 양양으로 출발했다·
오만가지 상념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일까?
양양까지 오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고 어느새 저택 앞에 도착해 있었다·
칠흑 같은 밤바다를 마주하며 서 있는 저택은 그 자태만으로도 그림이었다·
“부회장님···”
입구를 확인한 직원 하나가 황급히 달려 나온다·
“아버지는?”
“혼자서 쉬고 계십니다·”
눈치 빠른 직원은 굳이 ‘혼자서’라는 단어를 추가해 이세준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준다·
“전부 퇴근해·”
“알겠습니다·”
여기서 의문을 표해 부회장의 심기를 거스른다는 건 곧 퇴직을 의미함을 알기에 직원은 질문 하나 없이 고개를 숙였다·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저택에 들어선 이세준 부회장은 흔들의자에 반쯤 몸을 누인 채 견과류를 먹고 있는 이경호 회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네가 여기 웬일이야?”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시간도 늦었는데 여기까지 왔으면 가벼운 일은 아니겠구나· 또 형준이 일이냐?”
“네·”
“네가 작년에 형준이를 그렇게 생각하는 걸 알고 좀 알아봤다· 난 또 너희 두 부자 사이에 여자라도 생긴 줄 알았다· 그거라면 너의 행동이 말이 되지·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일은 없더구나· 형준이는 HS그룹 비서인가 하는 그 여자 쫓아다니느라 요즘에는 가게 여자도 안 찾는다
고 하니 여자 문제는 아닌 게 확실한데··· 도대체 뭐냐? 피해망상이라도 생긴 게야? 아들한테?”
“피해망상이 아닙니다·”
“아니면?”
“형준이가 김재준 교수를 포섭했습니다·”
“뭐?”
“열 명의 사외이사 중 최소 다섯 명이 형준이에게 붙었습니다· 어쩌면 몇 명이 더 붙었을지도 모릅니다·”
“김재준 교수가 형준이에게 붙었다고? 왜? 그게 확실한 거야?”
“방금 김 교수와 통화했습니다·”
계속해서 대수롭지 않던 표정을 하던 이경호 회장은 그제야 얼굴이 굳어졌다·
“진짜 형준이가 널 노리고 있다고? 왜? 어차피 시간만 지나면 다 자기 건데 왜 그런 짓을 해?”
“···”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충혈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는 그를 보며 이경호 회장은 정말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서 말하지 못해!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일이 벌어져! 빨리 말해라· 도대체 왜 형준이가 저러는 거야?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이 모든 게 전부 자기 거 아니냐?”
“그게 아니니까요·”
“뭐가?”
“가만히 있으면 신영그룹은 형준이 것이 안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 저러는 겁니다·”
이경호 회장은 흔들의자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들어 아들에게 겨눴다·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들은 거무죽죽한 얼굴로 대답했다·
“형준이를 내보내겠습니다· 그러니 승낙해주세요·”
“이놈아!”
“내보낼 겁니다· 만약 내보내지 않으면 다음 주주총회에서 부자간에 진흙탕 싸움이 나는 걸 보시게 될 겁니다· 전 국민이 우리 가족을 향해 손가락질을 할 겁니다·”
“그러니까 말을 해! 무슨 이유로 이러는 게야!”
아들은 원망의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다 말했다·
“형준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형준이는 생물학적으로 내 아들이 아닙니다· 누군지 모를 놈의 자식입니다· 그걸 나도 알고 형준이도 압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러니 형준이를 내보내야 합니다· 허락해주세요·”
“확실한 게야? 확실한 거냐고!”
“확실합니다·”
“언제 알았어?”
“···”
“언제 알았냐고!”
버럭 소리 지르는 아버지를 보며 아들의 충혈된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준이가 5살이 됐을 때 저와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었는데 이상하게 형준이의 행동이 예쁘지 않았습니다· 밥을 달라는 투정도 예쁘지 않았고 아빠한테 놀아달라는 투정도 예쁘지 않았습니다· 잠버릇도 저와 달랐고 식성도
달랐습니다·”
“그래서 친자검사를 해봤니?”
“네·”
결과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아버지는 지팡이를 쥔 손을 바들바들 떨다가 급기야 지팡이를 들어 아들의 어깨를 후려쳤다·
“이 멍청한 놈아!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해!”
“···”
“멍청한 놈! 이 병신같은 놈!”
아들은 울면서 팔을 들어 막기만 할 뿐 아버지의 매질에 대항하지 않았다·
평소 냉정하고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는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이처럼 울면서 맞고만 있는 모습을 본다면 아마도 제 눈을 의심했으리라·
급기야 지팡이가 아들의 머리를 때려 피가 튈 때에 아버지의 매질이 멈추었다·
“이런 등신 같은 놈아··· 왜 그렇게 멍청하게 살았어?”
“이게 다 아버지 탓이에요·”
아들은 흘러내리는 피를 닦고는 울먹이며 말했다·
“그게 왜 내 탓이냐?”
“지금도 등신 그때 말했어도 등신이잖아요· 언제 아버지가 절 진심으로 응원하고 편 들어줬던 적이 있었어요? 아버지는 항상 조건을 걸었어요· 전교 1등을 하지 않으면 친구를 이기지 못하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면··· 항상 절 이렇게 대하셨죠· 언제나 비교하고 절 긴장시켰잖
아요·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제 자리가 위태롭다고 항상 경고하셨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말해요! 형준이가 내 아들이 아니고 병신같이 아내가 다른 남자들과 바람을 피워서 애를 임신하고 다녔다고 어떻게 말하냐구요!”
아버지는 충격을 받아 그대로 주저앉았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
하지만 절규하는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거짓일 수가 없었다·
놀란 아들이 급히 아버지를 부축했다·
“아버지! 아버지 괜찮으세요?”
“등신 같은 놈아··· 아무리 그렇다고 다른 놈의 자식을 왜 두고만 보고 있어? 언제까지 속이려고 했어? 언제까지 속이려고 그랬어? 내가 죽을 때까지 속이려고 그랬어? 그런 거야?”
“네 그랬어요· 아버지가 자랑스러운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돌아가시면 그때 정리하려고 했어요·”
“너무 오래 살았구나· 미안하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어·”
아버지는 회한이 가득찬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아들의 얼굴을 보자 지난 옛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아버지는 아들의 품에 안긴 상태에서 찢어진 아들의 이마를 꾸욱 누르며 말했다·
“사람을 불러라·”
“그럴게요·”
“내가··· 내가 미안하구나· 다 내 잘못이다· 널··· 널 위해서 그런 건데 이게 다 내 잘못이다·”
“그러니까 이제 제가 말한 대로 해주세요·”
“그러마· 그렇게 해주마·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마·”
아들은 그제야 안도한 얼굴이 되었고 그 안도한 표정에 아버지의 마음은 더욱 무너져내렸다·
아들은 퇴근한 직원을 호출했고 잠시 후 도착한 구급대원과 함께 저택을 떠났다·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병원에 가길 바랐지만 아버지는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아들을 홀로 보냈다·
홀로 남은 아버지는 변호사를 불렀고 마지막 남은 기력을 다해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변호사가 떠나고 난 뒤 그는 아들 손자와 같이 찍은 가족사진을 꺼내 한동안 웃으며 바라보았다·
“미안하구나···”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손자였는데···
첫 걸음을 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친손자가 아니었다니···
아들 손자와 함께했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행복했던 기억···
그리고 그는 처연히 웃으며 눈을 감았다·
< 아버지와 아들(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