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와 아들(3) >
그의 서슬 퍼런 경고에 형준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싸움을 해도 적당히 주변사람들 모르게 다른 가족들은 알지 못하게 은밀히 진행될 거라 생각했는데 이 모든 게 다 자신만의 착각이었던 거다·
하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무슨 정이 남아 있을까?
형준은 어렵사리 자리에서 일어나 병원 가까운 곳에 위치한 호텔로 향했다·
5성급 호텔 스위트룸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상복도 입지 않고 널부러져 자고 있는 모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일어나 엄마· 일어나 봐·”
별의 별 생각이 다 드는 와중에도 형준은 애써 분노를 가라앉혔다·
지금에 와서 화를 내면 뭐 할까 싶으니까·
“왜···”
“일어나 봐! 쫌!”
버럭 화를 내는 형준 때문에 어머니인 고명숙과 곁에서 자고 있던 두 여동생도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너 왜 그래?”
형준은 명숙과 두 여동생을 잠시 바라봤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다 결국 입을 떼었다·
“아버지가 알고 있어·”
“뭘?”
“내가 아버지 친아들이 아니라는 거·”
명숙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린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한 동생들·
“오빠 뭐 잘 못 먹었어? 무슨 소리야?”
그런데 명숙은 곧바로 평소 그녀의 표정으로 돌아온다·
“뭐라고 하든? 널 호적에서 판다고 하든?”
“엄마···”
“흥! 이제 회장님 돌아가셨다 그거지? 그래서 내쫓겠다는 거 아니야? 안 그래?”
“알고 있었어? 아버지가 알고 있었다는 거?”
“네 아빠 젊었을 적에는 내 화장 바뀐 거 바뀐 향수 브랜드까지 다 맞추고 다니셨어· 그렇게 예민한 양반이 네가 자기 아들 아닌 걸 몰라봤을까?”
형준은 머리끝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동생들은 더했다·
“엄마!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가 아빠 아들이 아니었다는 거야?”
“시끄러 이것아· 너희들도 아빠 딸 아니야·”
“엄마···”
충격에 빠진 동생들이 자기들끼리 뭐라 중얼거리다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명숙은 시끄럽다며 울려면 나가서 울라고 소리쳤고 동생들은 패닉에 빠져 그녀를 붙잡고 그게 진실이냐고 울부짖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의 난장판이 스위트룸을 휩쓸고 난 뒤 명숙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지금껏 계속 입을 다물고 이 난장판을 지켜보고 있었던 형준이 입을 열었다·
“왜 그랬어?”
“여자가 남자 만나는데 이유 있니?”
“엄마···”
“네 아빠는? 네 아빠는 나랑 결혼하기 전날에도 여배우끼고 호텔에서 놀았었어· 결혼식 당일에 신랑 입장하는데 술이 안 깨서 비틀거리다 넘어지기까지 했다니까? 내가 그런 인간이랑 사는데 멀쩡한 정신으로 살 수 있었을 것 같니?”
“그럼 결혼하지를 말았어야지!”
명숙은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후··· 결혼 안 하면? 우리 아버지 회사 대출 연장이라는 칼을 들고 날 협박하는데 내가 안 할 수 있겠니? 뭐 네 말도 틀린 건 아니야· 어차피 망했으니까· 너 알고 있니? 네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 회사 일부러 망한게 한 거·”
“···”
“내가 널 가지고 낳은 거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였어· 네 아버지도 그걸 알고 있고· 그런데도 나랑 이혼을 안 해· 그저 회장님 앞에서 벌벌··· 행여 호통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벌벌거린 게 네 아빠야· 이러니 내가 미치지 않겠니?”
“도대체 왜들 그러고 사는 거예요?”
“네 아버지가 원래 그래· 가지고 싶은 건 꼭 가져야 하거든· 그래서 날 가지고 날 망가뜨렸어· 실증이 나서 버리고 싶어도 회장님 눈치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고· 그런데 이제 와서 날 원망해? 후후··· 하하하하하! 미친 새끼··· 네 아빠 정말 미친 새끼 아니니? 아니다· 이제는 아빠라고도 하
지 말아야겠네·”
형준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지옥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이 지옥이 아니면 어디가 지옥일까 싶었다·
“후우···”
“그래서 그 인간이 너더러 나가라고 하니?”
“그래 그랬어·”
“하아··· 그래· 나가자· 잘 됐네 정말 잘 됐어·”
담배를 꼬나 문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돈은 있고?”
“언제고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은재 은지 앞으로 작은 건물 몇 개 해놨어·”
“큰 거면 뺏으려고 달려들 거야·”
“그건 못 뺏어· 그거 뺏으려고 들면 그 인간 가만두지 않아· 우리 은재랑 은지 건드리면 그 인간 곱게 못 죽어·”
불길을 토해낼 듯한 독기 어린 그녀의 눈빛·
“그럼 다행이네· 여기서 쉬면서 내일 나가서 살 집 구해· 짐 빼서 바로 들어갈 만한 곳으로· 마음같아서는 서울 떠나라고 하고 싶은데 엄마 그러기 싫지?”
“내가 죄인이면 그 인간도 죄인이야· 내가 죽을 죄를 졌으면 그 인간도 죽을 죄를 지었어· 내가 왜 피하니?”
“그래· 모레 발인 끝나면 카드 끊길 거야· 그 전에 집에 들어갈 가전이라도 사놔·”
“네 걱정이나 해·”
“후··· 갈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형준에게 명숙이 물었다·
“이 시간에 어딜 가려고? 설마 빈소에 가려는 건 아니지?”
“가야지·”
“간다고? 하··· 너 미쳤니? 이경호 회장이 아직도 네 할아버지인 줄 알아?”
“친할아버지가 아니면 어때? 피가 다르다고 지난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가서 빈소 지킬래·”
“멍청하긴··· 너 그런다고 그 인간이 너한테 뭐 하나라도 챙겨줄 것 같니?”
“챙겨줄 거라고 기대해서 간다고 생각해? 그리고 나 아직 이경호 회장 손자야· 아직까지는··· 그리고 난 아직 포기 안 했어·”
“뭘?”
“신영그룹 아직 포기 안 했어·”
명숙은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너 지분도 얼마 없잖아?”
“지분은 없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그냥 놀고만 있지는 않았어· 잊었어? 나 상무야· 그것도 아직 꽤 힘이 있고·”
형준은 그렇게 말하고 호텔방을 나왔다·
초여름의 시원한 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곁을 내주고 있지 않은 민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신영그룹 후계자일 때도 넘어오지 않았던 그녀가 이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자신을 받아줄까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참고 다시 빈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
신영금융그룹 이경호 회장의 죽음으로 HS그룹 송은채 회장의 빈소 방문 스케줄이 잡혔다·
전날 영훈이 자정 무렵에 방문한 건 회사 차원이 아닌 개인적인 친분으로 간 것이었다·
당연히 송 회장이 같이 갈 것이냐고 물었는데 영훈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이제 어떻게 될 것 같니?”
송 회장은 영훈에게 이형준 상무와 이세준 부회장 간의 그 엄청난 비사를 전해듣고도 그다지 걱정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제 HS그룹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회사가 아니니까·
이제는 그저 드라마 속 인물관계를 물어보듯 가볍게 물어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많이 힘들 겁니다· 소송이 시작될 수도 있고···”
“처음에는? 처음부터 힘들면 끝난 거 아니야?”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럼? 다른 준비된 수가 있는 거야?”
“이세준 회장은 아버지인 이경호 회장 때문에 많이 억눌리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랬으니 자기 자식이 아닌데도 아무 말 없이 키워왔겠지·”
“본래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억지로 품고 있다 한 번에 해방이 됐을 때는 그 억눌린 감정의 분출이 과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실수할 수도 있다는 거구나?”
“네·”
“실수하지 않으면?”
“가진 게 다릅니다· 싸워보기도 전에 포기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칭찬해줘야 하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실수해야만 이길 수가 있다는 거네? 그런데 과연 이세준 부회장이 가진 걸 잃을 만큼 큰 실수를 할까? 난 회의적인데?”
“저도 확신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오호··· 우리 최 서방이 확신하지 않고 있다니까 진짜 애매한 모양이야? 지켜보는 재미가 있겠어· 아 병창이한테 이야기 들었어· 조치연하고 둘이 긴 이야기를 나눴다며? 무슨 이야기를 했어?”
영훈은 쑥스럽게 머리를 긁적이다 대답했다·
“아직 말씀드리기는 어렵고 나중에 때가 되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한테도 비밀인 거야?”
“아직 꺼낼 시기가 아닙니다·”
“진짜 비밀이야기인가 보네?”
“네· 조치연이라는 사람 사적인 문제이기도 하구요· 그것도 아주 예민한 이야기라 지금 당장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흐음··· 그래 그렇게 해· 최 서방이 알아서 잘 하겠지?”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해·”
그렇게 회장실을 나온 영훈은 바로 민희를 불렀다·
“이야기 들었죠?”
“네·”
살짝 굳은 그녀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녀와 이형준 상무 사이에 아직도 진척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영훈은 남의 연애사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않아 묻지 않았지만 그동안 이형준 상무와 그녀가 조금이라도 만남을 이어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따가 회장님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갈 거예요· 같이 다녀와요·”
“저두요?”
“네·”
“왜 제가···? 이형준 상무 때문인가요?”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 잘 들어요·”
“네·”
“앞으로 신영금융은 아주 큰 분란을 겪을 거예요· 이세준 부회장은 이형준 상무를 내쫓으려고 할 테고 이형준 상무는 반전의 기회를 노릴 겁니다· 이유는 이형준 상무가 이세준 부회장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아마 그것에 관해서는 나중에 언론에서 나오기는 할 겁니다·”
“아··· 네·”
그녀는 그게 정말이냐는 식으로 되묻지 않았다·
지금껏 영훈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 허튼 소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 보도가 안 나오고 조용히 마무리될 수도 있겠지만 싸움이 치열해지면 언제 나와도 이상하지 않아요· 하여간 상황이 이런데 난 이형준 상무가 그냥 밀려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형준 상무를 지원하는 이유가 있나요?”
“그게 HS그룹에 이득이니까요· 그는 우리의 이익을 대변해주고 지원해줄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제가 가서 할 일은요?”
“이형준 상무와 가까운 사이라는 거 아는 사람은 알 겁니다· 그러니 최대한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면서 누가 이세준 부회장의 수족이고 누가 이형준 상무를 따르는 사람인지 살피세요· 그리고 중립인 사람이 누구인지도·”
“최선을 다해보겠지만 제 짐작이 틀릴 수도 있고 아예 짐작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민희 씨가 분간을 못한다면 이세준 부회장도 확신을 못하는 사람일 테니까·”
“그래도 시간이 너무 부족할 것 같습니다· 발인 때까지 곁에 있지 않고서는···”
“억지로 자리를 오래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만 머리에 새기면 됩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세요·”
“네·”
“그리고 박병호 부장님좀 불러줘요·”
“알겠습니다·”
민희가 방을 나가고 바로 박병호 부장이 들어섰다·
그는 이미 회사에서 신영금융그룹의 이경호 회장 죽음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기에 아침부터 준비했던 자료들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점검하고 들어왔는데 영훈이 대뜸 꺼내는 이야기는 그의 예상을 벗어난 거였다·
“부장님 혹시 세영그룹에 대해 잘 아세요?”
“세영그룹이요?”
“네·”
일단 박 부장은 의아해하면서도 아는 대로 말했다·
“세영그룹이라면 신문 방송 부동산 개발을 주로 하는 기업입니다· 워낙 오래된 신문과 방송사를 가지고 있어서 축적된 재산이 상당합니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골프장 호텔 리조트 같은 걸 개발해서 몸집을 키웠구요· 재계순위로는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그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특
히 정치인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구요·”
“천보윤 의원과는 혹시 무슨 관계가 있나요?”
“천보윤 의원이요? 글쎄요·”
“지금부터 기조실은 세영그룹하고 정치인들이 어떻게 엮여 있는지 조사 좀 해주세요· 최대한 아는 만큼 조사하되 절대로 이 내용이 외부에 유출되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극비를 요하라는 말씀이신데··· 그러면 아무래도 원하시는 만큼 정보를 얻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세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니까· 그리고 정치인들 말이에요· 천보윤 의원이랑 도수연 의원 적어도 이렇게 둘은 확실히 파악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박 부장이 나가고 영훈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형준 상무에 관한 일은 어느새 머리에서 지워져 있었다·
그의 싸움은 결국 그가 해결해야 할 일이니까·
중요한 건 조치연 영감과의 약속이다·
그 약속을 지켰을 때 조치연 영감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다른 이야기를 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아버지와 아들(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