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가 쓰러지고 하나가 일어나다(2) >
송은채 회장을 포함한 HS그룹 핵심 사장단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이미 몇 번의 큰 프로젝트를 함께하며 가까운 사이가 되었기에 HS그룹 사장단의 방문은 더없이 자연스러웠다·
다만 송 회장은 빈소에서 자신을 맞이하는 이세준 부회장의 표정에서 한겨울 찬바람 같은 냉랭함을 느꼈다·
그 이유를 알기에 송 회장은 사장단과 식사만 간단히 하고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사장단 일행 중에 유난히 격이 떨어졌던 김민희가 장례식장에 남았다·
“올 줄 몰랐는데····”
송 회장이 장례식장에 도착한 이후 내내 입구에서 대기만 했던 그녀가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식장에 남자 형준이 조금 당황한 게 보였다·
“잠 못 잤어요?”
“쪽잠 자서 그래요· 원래 그런 거니까 신경쓰지 말아요·”
형준은 자신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민희를 보고 가슴이 요동침을 느꼈다·
예전에야 신영금융그룹을 물려받을 재벌 3세라는 배경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모르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송 회장도 자신의 얼굴을 보고 미소 한 번만 보여준 채 그냥 나간 것일 테고·
아는 사람들은 전부 이세준 부회장의 눈치를 보는 상황에서 그걸 모를 리 없는 여자가 이 자리에 직접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이었다·
“이야기 들었어요·”
역시나 대놓고 알고 있다고 말한다·
“최 상무 안 그런 척하면서 하여튼 입 싸네·”
“우리 상무님 입 싸지 않아요· 제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말씀하신 거예요· 안에 일손 부족하죠?”
“설마 도와주려고?”
“네 괜찮죠?”
담담한 그녀의 눈빛에 형준은 괜스레 주변을 한번 돌아보고는 물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음식 날라주고 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그러는 거 아니지?”
괜한 자존심 때문인지 형준이 말을 놓는다·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싫다 좋다 그렇게만 말해요·”
형준은 침을 꼴깍 삼키다 빈소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따라와· 그런데 나 빈털터리 될 수도 있다는 거 알고 있는 거지?”
“상무님답지 않게 약한 소리하고 그러세요? 전 능력 없는 남자 싫어요· 배짱 없는 남자도 싫고·”
“·······”
“왜 대답이 없어요?”
“좋아· 나 능력 없지도 않고 배짱 있어· 그럼 우리 이제 사귀는 거지?”
“하는 거 봐서요·”
역시나 쉽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형준은 기쁘면서도 일단 입을 다물었다가 일하는 사람들과 친척들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김민희 씨라고 제 여자친구예요·”
형준의 입에서 여자친구라는 말이 나오자 민희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안녕하세요· 어떤 것부터 도와드리면 될까요?”
민희는 붙임성 있게 웃으며 인사하고는 조문객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식당에 들어서더니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능숙하게 음식을 나르고 뒷정리를 시작했다·
직원들이야 가족 중 한 사람이겠거니 했지만 이세준 부회장 식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이 광경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이형준 상무와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금은 타이트한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고 음식을 나르고 있으니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예쁜 외모에 상주의 아내와 딸들은 어디로 가고 이세준 부회장의 동생 가족들만 와 있는 중이다·
이 상황에 모르는 사람이 척 끼어들었으니 경계와 호기심의 눈빛이 오가는 건 당연했다·
조용하고 묵묵하게 일만 하고 있기를 세 시간이 넘었을 때 신영손해보험 사장의 아내이자 이세준 부회장의 제수인 안명자가 곁으로 다가왔다·
“조금 쉬면서 해· 우리 형준이랑 결혼할 사이?”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형준이 나이도 있고 걔가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자리에 여자를 데리고 올 정도로 생각이 없는 애가 아닌데?”
“글쎄요· 상중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도 조심스러워서요·”
“하긴 그렇지· 으음··· 초면에 이런 거 묻는 게 실례라는 거 나도 아는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까 안 물어볼 수가 없네· 부모님은 뭐 하셔?”
당연히 실례지만 민희는 자신이 안명자라고 할지라도 물어봤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조 단위 금융그룹의 행방을 두고 치열하게 눈치싸움을 벌이는 중이니까·
“평범한 집안이에요· 딱히 내세울 것도 없고·”
그래서 더없이 딱딱하면서도 알맹이만 쏙 골라 내놓았다·
그리고는 실망하는 눈빛의 그녀에게 말을 덧붙였다·
“HS그룹 기획조정실 최영훈 상무님 비서로 일하고 있어요·”
“최영훈 상무? HS그룹?”
“네· 상무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이경호 회장님 가족분들은 참 화목하다고요· 이세준 부회장님이 모든 재산을 물려받는데도 전혀 반대하지 않으신다고 하던데 맞나요?”
종도 안 쳤는데 펀치부터 날린 격이라고 할까?
적어도 이야기에 맥락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이 어쩌면 무식하다 생각할 정도로 과격한 말이었다·
이런 건방진 소리를 새파랗게 어린 여자에게 들을 거라고는 그녀는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너무 놀라 입을 떡 벌리다가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지금 너··· 선 많이 넘은 거라는 거 아니?”
“우리 상무님 생각이 틀린 거 맞나요?”
“너····”
“그럼 도와드릴 수 있어요·”
“·······”
안명자는 더는 화내지 못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민희는 주변을 다시 한번 살피고는 말했다·
“이세준 부회장님이 전부 갖는 거 찬성하지 않으시는 거 맞나요? 형준 씨와 손잡을 생각 있는 거 맞으세요?”
“잡으면 뭐라도 생긴다고 생각하니? 아주버님이 호락호락하게 보여?”
“호락호락했으면 손도 안 잡으려고 했겠죠· 형준 씨가 다 가지지 뭐하러 손을 잡겠어요?”
안명자는 입이 마름을 느꼈다·
조용히 둘만 있는 밀실도 아니고 주변에 사람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한창 손님이 들락거리는 곳에서 이런 이야기를 태연스럽게 하는 상황이라니····
“내가 생각을····”
“맞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뭐? 허··· 우리가 널 믿을 거라고 생각하니?”
“다 포기하실 거 아니시잖아요?”
민희는 안명자의 눈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안명자의 남편은 계속 술만 마시며 어딘가 모르게 맥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 사람과는 손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안명자는 달랐다·
시종일관 눈을 빛내며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살갑게 대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민희는 다급함을 느꼈다·
“방법이 있기는 한 거야?”
민희에 대해 알고 있는 건 형준이 이곳까지 데려올 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것과 HS그룹의 핵심 인물의 비서라는 것 두 가지뿐·
그럼에도 안명자가 그녀에게 속을 보여주는 건 그만큼 그녀가 다급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부터 생각해봐야죠·”
민희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서빙을 이어 나갔다·
*
이세준 부회장은 손목 뼈대가 그대로 드러날 만큼 말라서 곧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은 늙은이의 등장에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서 봤다 싶어 한참을 보다가 그 늙은이가 그의 앞까지 왔을 때에야 화들짝 놀랐다·
“어?”
“귀신이라도 봤어? 뭘 그렇게 놀라?”
“조치연 회장님 아니십니까?”
“너도 이제 흰머리가 그득하구나· 세월이 흐르긴 흘렀어·”
“몸도 편치 않으실 텐데 이곳까지····”
“됐다· 일단 네 애비하고 인사부터 먼저 하자·”
조치연은 송 사장의 부축을 받으며 절하고 난 뒤 곧바로 식당으로 향했고 이세준 부회장도 뒤를 따랐다·
이세준 부회장이 공손히 뒤따라오는 걸 보며 식당에 앉은 사람 모두 조치연을 주목했다·
그가 자리를 잡고 앉자 곧바로 음식을 내오는데 이세준 부회장은 전혀 모르는 여자가 음식을 내오는 걸 보자 고개를 갸웃했다·
직원도 아닌데 젊은 여자가 긴장도 안 하고 음식을 내오고서는 조치연에게 물었다·
“참이슬이랑 처음처럼 있는데 어떤 거 드릴까요?”
“참이슬 내온나·”
“네·”
어디서 들었는지 이세명 신영손해보험 사장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너도 늙었구나· 앉아라·”
“네·”
조치연은 두 형제를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긴장할 것 없다· 그냥 옛 친구가 갔다고 하니 안 올 수가 없어서 나왔다·”
이세준 부회장은 민희가 가져다준 술을 따르며 답했다·
“정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그 말 진심이라고 믿어도 되나?”
“물론입니다·”
조치연은 술을 한입에 마시고는 의미심장은 웃음을 지었다·
“옛날부터 넌 네 애비보다 탈이 좋았다· 난 그 점을 높이 샀지· 네 애비는 너도 알다시피 감정을 숨길 줄 몰랐거든·”
“그러셨죠·”
“그래도 이왕 나왔으니 궁금한 거 하나 물어보련다·”
“네· 말씀하십시오·”
“가지기 버거운 게 있으면 혹시 넘길 마음이 있어?”
이세명 사장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형은 담담하게 다시 술을 따르며 물었다·
“혹시 버거워 보이십니까?”
“내가 보기엔 그렇지만 네가 버겁지 않으면 됐다·”
조치연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곤 다시 술을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옛날에 한 도적이 있었다· 그 도적놈이 아주 큰 부잣집에서 재물을 훔쳐 달아나는데 커다란 강이 떡하니 길을 막고 있는 게 아니겠어? 뒤에서 수많은 장정이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는데 잡히면 치도곤이 나는 게지· 그래서 어찌하면 좋나 발을 동동 구르는데 저 멀리 배 한 척이 보이는 게
야· 그래서 허겁지겁 달려갔더니 두 사람이 타면 딱 맞는 코딱지만 한 배여서 크게 낙담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잡힐 수는 없는 것을· 수레에 끌고 온 재물을 배에 싣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지·”
“제 그릇이 그 배만큼 작다는 말씀이신가요?”
“흐흐···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야 하는 게다· 그 도적놈이 노를 저어 강을 건너가는데 재물의 무게가 있으니 배가 푹 잠겨 조금씩 물이 들어오는 거야· 안 되겠다 싶었지· 그래서 훔쳐 온 재물 중에 하나씩 강에 버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까웠거든· 이제 조금만 가면
이 모든 재물이 다 내 것인데 싶었던 게지·”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어떻게 했냐고? 흐흐··· 어떻게 됐을 것 같으냐?”
그는 그렇게 말하고 상체를 앞으로 쭉 내밀어 이세준 부회장에게 속삭였다·
“너도 이게 다 네 것 같으냐? 그 도적놈처럼?”
이세준 부회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욕심을 버리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신영금융그룹이 훔친 것으로 이룬 재산임을 비난하는 거였다·
“대답은 됐다· 답은 들은 것 같으니··· 아가야! 여기 편육 좀 더 내와라·”
민희가 재빨리 편육을 가져다주자 조치연이 말했다·
“니는 누구고?”
“이형준 상무 여자친구입니다·”
그녀의 대답에 이세준 부회장도 놀랐다·
설마 이 자리에 자신의 여자친구를 데려다 놓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장 발인이 끝나면 회사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데 어제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뻔뻔하게 여자친구를 데려다 놓다니····
“오호··· 여자친구? 참하니 좋네· 가 봐라·”
“네·”
조치연은 당황하는 이세준 부회장을 보고 말했다·
“니도 몰랐나 보지?”
“네? 아··· 네·”
“요새 애들이 다 저렇지· 그것보다 언제고 버거우면 연락해라· 옛 친구가 친구 아들 위해 그 정도 못 해주겠나? 응? 흐흐흐····”
그는 술을 털어 넣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뒤따라 나오는 부회장 일행에게 손을 흔들며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이세준 부회장은 조치연을 배웅하고 난 뒤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와 형준에게 다가갔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다가오는 그를 보고 형준이 긴장하는 건 당연했다·
그때 민희가 슬며시 다가와 곁에 섰다·
“형준이 여자친구라고?”
“네·”
“형준이한테 아무 말 못 들었니?”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발인이 끝나고 회사로 복귀하면 형준이는 곧바로 회사에서 잘릴 거라는 거 말이야· 지금 이 녀석 개털이야·”
주변에 듣는 사람이 있는데도 그의 언행은 거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한 태도였다·
형준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고 그 모습에 민희는 마음이 아파졌다·
언제나 자신만만했던 그였으니까·
처음에는 그저 영훈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일부러 머리를 비우고 왔는데 주눅 들어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그의 모습에 민희는 조금씩 마음 한구석에서 반발심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만약 영훈이었다면 그녀의 이런 마음을 승부욕이라고 했으리라·
영훈의 곁에서 이기는 법을 배워 온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패를 엎으면 판을 뒤집기 힘들다는 걸·
“그러지 마세요 아버님·”
“아버님?”
그녀의 말에 놀란 건 이세준 부회장뿐만이 아니었다·
형준도 놀라고 이세명 사장 가족들도 놀랐다·
“네 우리 형준 씨 자꾸 몰아붙이지 마세요· 그러다 정말 떠나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어쩌긴? 호적에서 파내면 그뿐이다·”
마침내 호적에서 파낸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을 때 민희는 몇 번 숨을 내쉬었다·
터질듯한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킨 그녀는 이세준 부회장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부회장님의 아들이 아니면··· 이세명 사장님의 아들이 되면 될까요? 어차피 부회장님의 친아들이 아닌데 누구의 아들이면 어때요?”
< 하나가 쓰러지고 하나가 일어나다(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