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가 쓰러지고 하나가 일어나다(3) >
“·······”
생각지도 못한 일격을 얻어맞으면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리곤 한다·
이세준 부회장이 그랬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자신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고 했다·
동생인 세명이까지 같이 있는 자리에서 변호사에게 직접 들은 말이니 문제가 생길 리 없었다·
형준이 지금 상무 자리에 있지만 결국 시간의 문제일뿐 어떤 짓거리를 해도 회사에 발을 붙일 수는 없었다·
아니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오늘 처음 본 어린 여자의 협박은 상상을 초월했다·
고작 1년 사이에 열 명의 사외이사 중 다섯 명을 포섭한 형준이었다·
만약 형준이가 이세명 사장의 아들로 들어간다면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모든 걸 포기한 그가 다른 생각을 할 게 분명했다·
저 맹랑한 계집애 하나가 판을 흔들었다·
“그러니까 우리 형준 씨 자꾸 막다른 곳으로 몰지 마세요·”
반면 민희는 아직 형준이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버티고 있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녀의 말은 결코 최후통첩이나 선전포고의 의미가 아니었다·
하지만 듣는 이세준 부회장은 아니었다·
“막다른 곳에 다다르면 날 물기라도 할 모양이구나?”
“꽤 아플 거예요 물리면····”
재벌그룹 부회장 정도가 되면 말없이 서류만 검토하고 있어도 포스가 흐르기 마련이다·
당연하게도 이세준 부회장의 눈빛은 그 기세등등한 형준도 감히 눈을 마주 보지 못하게 만드는데 민희만이 담담히 견뎌내고 있었다·
둘의 불꽃 튀기는 눈싸움에 보는 사람이 가슴이 떨릴 지경이니 형준이야 오죽할까·
저러다 더 큰 사고를 치지 않을까 싶어 그녀의 소매를 잡고 뒤로 물리는데 난데없이 이세명 사장의 부인인 안명자가 끼어들었다·
“아주버님 형준이를 호적에서 파낼 거라는 게 무슨 말씀이세요? 농담이시죠?”
이미 던져진 주사위다·
오늘 처음 본 새파란 어린 여자의 항변에 자신의 말을 뒤집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세준 부회장의 대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형준이는 내 아들이 아닙니다· 와이프랑 딸 전부 집에서 내쫓았어요· 제수씨도 그런 줄 아세요·”
“어머어머··· 그게 정말이세요 아주버님?”
“형! 그게 정말이야? 장남을 왜 내쫓아? 무슨 큰 잘못을 했기에 장남을 내쫓아?”
이세명 사장도 덩달아 놀랐다·
하지만 이세준 부회장은 호들갑 떠는 동생 부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저 둘과 아무런 교감 없이 이 어린 여자가 그런 이야기를 입밖에 내뱉을 수 있을까?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오히려 언제나 호시탐탐 가문의 재산을 노리는 제수가 이 어린 여자를 조종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알면서 뭘 물어?”
“알긴 뭘 안다고 그러는 거야?”
“넌 모른다 치고 제수씨도 몰라요? 내가 왜 그러는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형준이 여자친구와 눈싸움을 벌이다 갑자기 화살을 돌리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있있을까·
안명자는 황당해 하며 뭐라 입을 열려는데 여기서 민희가 한 발 앞서 나섰다·
“막다른 곳에 몰았다고 생각하신 것 치고 너무 불안해하는 거 아니세요?”
평소 같았으면 감히 자신과 말도 나누지 못했을 여자가 감히 눈을 똑바로 보면서 대들고 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상황인데 형준이 여자친구라는 배경이 그녀를 장례식장에서 끌고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계속 아들로 두겠다면 저딴 건방지고 근본 없는 여자 만나지 말라고라도 하겠지만 방금 전에 아들을 호적에서 파버리겠다고 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저 망할 주둥이를 두고 봐야만 하는 엿 같은 상황이었다·
“내가 불안해 한다고? 내가?”
“이세명 사장님이 우리 형준 씨를 품을까 봐 두려워 하시는 것 같아서요· 형준 씨가 그룹 내에서 가지는 영향력과 이세명 사장님이 가진 지분 그리고····”
민희는 말을 줄였다·
뭐가 있기는 할 것 같은데 그녀로서는 그게 뭔지 모르니 괜히 뭐가 있는 것처럼 말끝을 흐린 것이다·
반면 이세준 부회장은 그녀의 말을 자신의 방식대로 이해했다·
“너 유류분 청구 소송할 거냐?”
그는 갑자기 이세명 사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자식이 여러 명이면 한 명의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싶은 경우가 간혹 있다·
그렇게 여러 명의 자식 중 마음에 드는 자식 한 명에게만 재산 상속을 몰아줄 경우 재산을 일절 받지 못한 다른 자식은 소송을 통해 그 재산 일부를 가져올 수 있다·
소송을 안 한다면 모르되 일단 소송이 시작되면 상속재산이 나누어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어?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이세명 사장이 당황해 손을 젓는데 여기서 안명자가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나섰다·
“아주버님 솔직히 저는 그렇네요· 시아버님 그렇게 돌아가시고 어쩜 우리한테 하나도 안 물려주실 수가 있어요? 우리 이이가 공부를 못 했어요? 실적이 안 좋았어요? 그렇게 손해가 막심하다는 신영손보 맡아서 흑자전환 했잖아요· 그럼 적어도 신영손보 정도는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
요?”
“제수씨 그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아니···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발인 끝나면 지금 이 얘기 흐지부지되는 사이에 지분 정리 끝내는 거 아니에요? 그럼 우린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 아니냔 말이에요·”
이세명 사장이 당황해 그녀를 말렸다·
“당신 왜 그래? 아버지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건데···· 그리고 형이 나중에 다 나눠준다고 했어·”
그녀가 빽 소리 질렀다·
“그걸 어떻게 믿어!”
“여 여보····”
“오늘 날이 날이라서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아주버님도 참 너무하시네요· 나중에 주겠다고요? 지금까지 우리 이이 얼마나 챙겨주셨어요? 생일에 전화 한 통이라도 한 적 있어요? 우리가 집에 찾아가지 않으면 언제 우리 집 경조사 물어본 적이라도 있었냐고요· 그런데 나중에 주겠다
는 말로 그렇게 또 바보 만드시게요?”
이세준 부회장은 가슴을 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애초부터 아버지의 재산을 혼자 독식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었다·
오히려 더 줬으면 더 줬지 덜 줄 생각은 전혀 없었고 단지 누구의 자식일지도 모르는 형준만 내쫓을 생각뿐이었던 거다·
자식도 없는데 굳이 그 많은 재산 다 가지면 뭐하나 싶었는데 동생 내외가 저렇게 나오니 속된 말로 환장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난 그럴 생각 없습니다· 아닌 말로 이제 자식도 내쫓고 마누라도 보내버렸는데 내가 그 많은 재산 다 가지고 있어 봐야 뭐 합니까?”
“그럼 지금 나눠주시면 되겠네요· 상속세 내고 또 증여세 낼 거예요? 그럴 바에는 지금 주시는 게 낫죠·”
우리나라 상속·증여 세율은 최대 50%에 달한다·
천억 원을 상속하면 세금만 500억 가까이 된다는 건데 거기서 또 증여를 하게 되면 재산이 반의 반 토막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순수하게 재산을 넘겨줄 생각이라면 안명자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마땅했다·
하지만 민희의 등장으로 상황이 완전히 변해버렸다·
이세준 부회장으로서는 동생내외를 믿을 수 없게 되어버렸고 그렇기 때문에 안명자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일단 그 얘기는 천천히····”
“안 주겠단 말이네요?”
“제수씨!”
“여보!”
“알겠어요· 그만할게요· 거지 동냥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거 달라는 건데 애들처럼 떼쓰는 것 같이 보이겠어요· 빈소 오래 비우시는 것도 예의 아니에요· 아주버님은 그만 조문객 받으러 가세요· 저희는 음식 날라야 해서 이만 갈게요·”
안명자는 오뉴월에 서리 내리듯 서늘한 기운을 뿌리며 쌩하니 몸을 돌렸다·
이세준 부회장은 또 한번 치솟아 오르는 화를 내리눌렀다·
애들처럼 보이는 게 싫다고 했다·
그럼 어른처럼 하겠다는 건데 그게 뭐겠는가?
어른들의 일처리란 곧 법대로 하겠다는 말이다·
멀쩡한 형제간에 송사를 붙인 민희는 이세준 부회장에게 있어 눈엣가시 그 이상이었다·
그는 민희를 쏘아보며 말했다·
“너 뭐 하는 애야?”
“안녕하세요·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김민희라고 하고 나이는 스물여덟입니다· 현재 HS물산 기획조정실에서 비서로 근무하고 있고 형준 씨와 알게 된 지 1년 정도 됐습니다·”
“허··· 맹랑한 계집애구나· 너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삼류 양아치들이 저런 대사를 하면 코웃음 치며 유치하다 할 수 있겠지만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는 금융재벌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면 말의 무게감이 달라진다·
당연히 민희도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껏 민희 뒤에 서 있던 형준이 그녀의 팔을 잡고 자신의 뒤로 끌었다·
“먼저 시작한 건 아버지입니다· 내 여자한테 협박할 생각하지 마세요·”
“아버지? 뻔뻔스럽구나 아직도 아버지라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는 걸 보면?”
“호적에서 제 이름이 지워지면 그때는 호칭을 바꿔 드리겠습니다·”
“싸가지 없는 새끼 같으니라고····”
“그리고 저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대가리 깨지게 덤벼 보라고 하셨죠? 그래 보겠습니다·”
형준은 민희가 자신을 대신해 나서는 걸 보며 무력감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언제나 여자 앞에서 잘난 척만 하고 살아왔던 그였다·
알고 보니 그녀의 순간적인 판단력과 배짱이 자신을 뛰어넘는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영훈 상무가 민희더러 보통 여자가 아니라고 한 말이 그저 쉽게 넘어갈 여자가 아니라는 수준을 넘어선 말이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가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음도 알고 있었다·
“건방진 새끼····”
전에는 하룻강아지 쳐다보듯 비웃던 이세준 부회장은 이제는 불구대천의 원수 바라보듯 둘을 번갈아 노려보더니 몸을 돌려 빈소로 향했다·
형준은 떨리는 가슴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민희의 손목을 잡고 장례식장을 나왔다·
“도대체 어쩌려고 그랬어? 우리 아버지 무서운 사람이야·”
“그래서 그렇게 바보같이 가만히 있었어요?”
“아니 내가····”
형준은 항변하려 했지만 그 ‘바보같이’라는 형용사가 조금 전의 자신을 너무도 잘 표현한 단어였기에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민희는 그 모습에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후···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어요·”
“뭐가 어쩔 수 없어?”
“아까 들었잖아요? 이세명 사장이랑 손잡아요·”
“작은아버지 아들로 들어가란 말이야?”
“난 부회장님하고 형준 씨 사이가 그렇게 최악인지 몰랐어요· 그런데 아까 보니 단순히 오해를 풀어서 넘길 수준이 아닌 것 같던데요? 이 상황에 다른 방법 있어요?”
있을 리가····
아까 민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손뼉을 칠 뻔했을 정도였다·
“혹시 이거 최 상무가 알려준 방법이야?”
“아니요· 상무님은 상황만 지켜보라고 하셨어요·”
“그럼 당신의··· 임기응변이었어? 아까 그게?”
“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상무님한테··· 형준 씨 말고 우리 상무님이요·”
“그래 최 상무·”
“네· 우리 상무님한테 이래도 되는 건지 물어보질 않아서 지금 엄청 불안하거든요? 그런데 아까 그 상황에서는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왜?”
민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뭘 ‘왜’예요? 바보같이 그러고 있으니까····”
“내가 걱정됐다 그 말이지?”
“·······”
민희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형준은 가슴 떨리게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런데 작은아버지가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걸? 작은아버지가 지금까지 우리 아버지랑 가볍게라도 싸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아까도 봤지? 우리 아버지 눈치 보시는 거·”
“정확히는 이세명 사장님이 아니라 사모님과 만나서 협상하라는 말이었어요·”
“작은어머니랑?”
“네·”
“하긴··· 작은아버지는 작은어머니한테 항상 잡혀 사시기는 했는데···· 그래도 이것까지 작은어머니에게 휘둘릴까? 보통 일이 아닌데?”
“보통 일이 아니죠· 신영금융그룹을 눈뜨고 통째로 빼앗기게 생겼는데···· 그리고 아까 들었잖아요? 형준 씨 작은 어머니가 가만 있지 않을 거라는 거·”
형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때 마침 안명자가 상복을 입은 채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형준에게 다가오더니 말했다·
“너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보면 방금 전까지 누군가와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여기서요?”
“조용한 데로 가· 아무도 못 들을 만한 곳으로·”
아무도 모르게 둘이서만 이야기하기 좋은 데가 호텔만한 데가 있을까·
그리고 HS그룹 기조실 비서에게 HS관광이 소유한 호텔 방을 잡는 일 정도는 전화 한 통화로도 가능했다·
“제가 가까운 호텔 잡을게요· 그쪽으로 가실까요?”
민희가 핸드폰을 들고 생긋 웃었다·
< 하나가 쓰러지고 하나가 일어나다(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