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얽히고설키다(1) >
민희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다·
단단히 사고를 치고 치도곤당할 준비를 하는 모양새인데 혼을 낼 당사자인 영훈은 속으로 감탄을 하고 있었다·
부모를 바꾼다니 상상도 하지 못한 발상 아닌가?
그것도 그 짧은 시간에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이세명 사장 쪽은 뭐라고 하던가요?”
“이세명 사장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지만 부인인 안명자의 의지가 확고합니다·”
“뭐··· 화가 날 만하겠죠· 법적으로 문제 되는 건 없고요?”
“그건 확인해보지 않았습니다만 일단 이세준 부회장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형준 상무를 내칠 모양이었습니다·”
“대형로펌에 일을 맡긴다면야 안 될 일도 되게 하니까 문제는 아니겠지만 양자로 입적하는 게 쉽지만은 않을 텐데요?”
“중요한 건 꼭 아들이 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요·”
영훈은 피식 웃었다·
역시 그녀는 모든 걸 다 아는 것이 아님에도 가장 중요한 핵심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 말이 맞았다·
중요한 건 이형준 상무와 이세명 사장이 손을 잡는 것이고 혈연이 되면 더욱 좋을 뿐이지 반드시 아들이 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아들은 대외적으로 보여줄 명분일 뿐이다·
“좋네요· 잘 했어요·”
“정말요?”
그제야 민희가 고개를 들고 웃음을 짓는다·
“네 잘했어요· 역시 잘 보냈네요· 상황만 살펴보라고 보냈는데 깔끔하게 정리를 해버렸네· 그런데 그렇게 막 끼어들어도 괜찮았던 거예요?”
“그게··· 이형준 상무 여자친구라고 소개한 상태여서····”
“아··· 그럼 앞으로 사귀는 겁니까?”
“네····”
부끄러운지 볼을 빨갛게 물들인다·
“예전부터 말했듯이 둘은 잘 어울릴 거예요· 민희 씨가 이형준 상무 멱살 꽉 잡고 살면· 그럼 앞으로 이형준 상무 쪽은 민희 씨가 컨트롤하고 나한테 보고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민희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희가 들어왔다·
그녀는 잔뜩 궁금한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됐대?”
“이형준 상무 쪽?”
“응·”
그녀도 이경호 회장의 죽음 때문에 신영금융그룹이 후계자 문제로 내부적으로 요동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상이 겉으로 드러나고 있어· 이세준 부회장은 이형준을 비롯해서 자기 자식이나 부인한테 조금의 재산도 가는 걸 허용할 수 없다는 생각 같아· 그래서 무리하는 것 같고·”
“논란을 외부에 드러내면서까지 일을 진행하려고 한다는 말이지?”
“응 저 정도면 어지간해서는 조용히 처리하려고 노력할 텐데 아예 그쪽은 우선순위가 아닌 것 같아·”
“이성을 잃은 거 아니야?”
“온전한 이성을 유지하고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아버지의 죽음도 이형준 상무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을 가능성이 커·”
“하긴··· 생각해보니 이경호 회장이 너무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그 책임을 이형준 상무에게 돌린다고 생각하면 분노가 엄청나겠네·”
“이세준 부회장은 괴강살을 타고 났어· 본래 괴강살을 타고 나면 총명하되 살생을 좋아한다고 할 정도로 성격이 그리 좋지 않아· 그걸 제어한 사람이 아버지였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억눌렸던 그 성정이 다시 폭발할 거야· 거기다 민희 씨가 가서 기름을 부었어·”
“어쨌는데?”
영훈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말했다·
“황당하게도 이형준 상무를 호적에서 파낼 거면 이세명 사장의 아들로 들어가겠다고 협박을 한 거야·”
연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정말?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이세준 부회장은 당연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 결국 이세명 사장이랑 이형준 상무랑 손을 잡을 것 같아· 이세준 부회장이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세명 사장 역시 아무런 힘이 없는 건 아니거든· 게다가 이형준 상무가 지금까지 그룹 내에서 장악한 조직력도 상당해서 해
볼 만한 싸움이 될 것 같아·”
“와··· 난 이형준 상무가 힘도 못 쓰고 쫓겨날 줄 알았는데 이게 또 이렇게 되네? 김민희 씨가 대단하긴 하다·”
“내가 말했잖아· 굉장히 특이한 사주를 타고난 여자야·”
“저런 여자가 나만 한 재력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영훈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둘 중 하나겠지? 세계적인 투자자가 됐거나 가지고 있는 재산 홀랑 말아먹거나·”
“극과 극이네?”
“완벽한 사람은 없는 거야· 게다가 그녀는 일종의 승부사 같은 운명을 타고 났거든· 그리고 승부사는 언제나 이길 수만은 없는 거고· 가벼운 실수로 큰 교훈을 얻게 된다면 세계적인 투자가가 될 거고 큰 실수를 저지른다면 큰 교훈을 얻고 망하겠지·”
“하하 명쾌하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말했다·
“2시간 남았어· 보러 갈 거지?”
“어 그 정도 시간은 있어·”
“얼마나 예쁠까? 나 엄청 기대되는 거 알아?”
브라이튼의 구단주인 맥스 크롤리는 영훈과 연희의 결혼기념일 선물을 보낸다고 전해왔었다·
2부리그로 강등됐었던 브라이튼이 다시 1부로 승격했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될지 상상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국의 재벌이나 다름없던 그라서 연희는 어떤 보석을 보내올까 은근 기대했었는데 선물은 보석이 아니라 놀랍게도 요트였다·
크루즈선주라서 그런지 선물도 고급 요트라 과연 영국 거부답다는 생각을 했다·
요트야 국내 재벌들도 가지고 있으니 별다를 건 없지만 영국 최고급 크루즈선사에서 보내온 선물이니만큼 연희의 기대는 천장을 뚫고 있었다·
맥스 크롤리 쪽에서도 크기나 선종에 관해 따로 알려주지 않았다·
연희가 재벌이니 그래도 이 정도밖에 반응을 안 하는 거지 만약 영훈이 이 회사에 입사하지 않은 상태에서 누가 요트를 선물로 준다고 했으면 설레서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웃긴 것이 누가 요트를 선물로 준다고 했는데도 엄청 설레지는 않는 걸 보면 자신도 이제 재벌 다 됐다고 생각했다·
“지금 출발하면 시간 맞겠지?”
“응· 우리 선상에서 파티해야 하는거 아니야? 가면서 와인이나 샴페인도 사자· 아 케이크도· 이걸로 우리 결혼기념일 파티하는 거야·”
“좋지·”
“히히··· 나 일하는 시간에 땡땡이치는 것 같아서 더 좋아·”
마침 날짜도 딱 좋게 결혼기념일에 맞춰 가져다주니 더없이 고마웠다·
영훈과 연희는 그렇게 반차를 내고 회사를 일찍 나왔다·
가면서 백화점에 들러 샴페인과 케이크를 사서 대부도에 있는 탄도항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회사 직원이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인사하고는 얼른 서류를 들고 다가왔다·
“30분 전에 입항했고 지금 업체 전문가 불러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저기 끝에 보이는 브라운색의 쌍동선입니다· 보이시죠?”
“네 보이네요·”
“정확한 제원은 여기 적혀있고 보험료와 세금은 여기로 송금하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직원이 가리킨 곳으로 걸어가니 2층짜리 멋들어진 요트가 정박해 있었다·
브라운과 화이트가 조화된 고급스러운 요트는 크기도 크기지만 그 럭셔리함이 혀를 내두르게 했다·
“와··· 장난 아니네····”
연희도 흡족한지 연신 배시시 웃으며 배를 둘러보았다·
은은한 조명과 고급가구들 그리고 어떻게 조작하는지 짐작도 가지 않아 당장 자격증부터 따야 할 것 같은 조종기가 눈을 사로잡았다·
아래층에는 오븐과 양문형 냉장고에 고급 침실까지····
영훈은 지금까지 연희가 하는 보석이나 좋은 자동차를 보고도 그저 돈이 좋다고 생각한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가슴이 떨릴 만큼 감동을 받았다·
갑판에 깔린 원목을 밟으며 한 걸음씩 내딛는데 자신도 모르게 계속 웃음이 나오고 있었다·
연희가 다다다하며 부산스럽게 갑판에 올라와 팔짱을 낀다·
“장난 아니다· 오빠 이거 진짜 마음에 들어· 맥스 씨가 어떻게 내 취향에 딱 맞게 골라 줬을까? 오빠도 마음에 들지?”
“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영훈을 보며 그녀가 물었다·
“어째 웃는 표정이 이상하네?”
“좋으면서도 무서워서 그래·”
“왜 무서워?”
“그냥··· 너무 좋으니까 이렇게 좋아해도 되나 싶어서·”
“그건 또 무슨 말이래?”
“나는 단 한 번도 나를 완전히 믿은 적이 없었거든· 너와 결혼했을 때도 그랬어· 이렇게 좋아하다가 어느 순간 욕심이 생겨서 자제력을 잃으면 어쩌나 싶었거든· 지금도 그러네· 자꾸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타다 보니까 괜히 불안한 거지·”
연희는 영훈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내가 옆에서 지켜줄게· 오빠가 자제력을 잃을 것 같으면 내가 뺨이라도 때려줄게· 걱정하지 마·”
“그래 알겠어·”
“우리 샴페인 터뜨릴까?”
“그래·”
어차피 오늘은 바다에 나갈 생각이 없어 배를 운전할 사람도 부르지 않았다·
그저 항구에 정박한 배에 앉아 지는 석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결혼기념일이 될 것 같으니까·
배에 비치된 잔 두 개를 가져와 샴페인을 따르고 선상에 다리를 쭉 펴 앉으니 세상 모두를 가진 기분이었다·
바닥에 깔린 원목의 따스함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결혼기념일을 맞아 우리의 행복을 위해 짠 하자·”
“사랑해·”
“나도 사랑해·”
둘은 잔을 부딪치고 샴페인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보다 완벽한 하루는 없을 것만 같았다·
*
임복희는 크게 펼쳐진 지도의 한 점을 강하게 찍었다·
“무조건 무조건 여기로 끌고 와야 해·”
도수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내 마음처럼 가지고 올 수 있다 없다 할 수 있지가 않아요·”
“동쪽으로 가야 해· 동쪽이 바로 대통령으로 가는 길이야·”
“사업체 하나 끌고 온다고 대통령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임복희는 망설이는 도수연을 보고 탁상을 쾅! 내리쳤다·
“멍청한····”
“깜짝이야! 지금 뭐하는 거예요!”
“대통령 하기 싫어?”
“허··· 지금 나 협박하는 거예요?”
여느 가정집 주부도 아니고 무려 법무부장관까지 했던 국회의원이다·
고작 점쟁이 말 하나에 마구잡이로 휘둘리지 않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데 임복희는 코웃음을 치더니 들고 있던 부채를 파르르 흔들었다·
그리고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잡아먹을 듯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동쪽은 물이고 생명이야· 그런데 넌 물이 부족해· 물이 부족하니까 주변이 자꾸 아파·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파· 그런데 네가 물이 부족해서 다 챙겨주지를 못해· 돈을 벌면 뭐하고 권력을 가지면 뭐해? 물이 말라서 전부 꺼져가는데?”
도수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과거의 아픈 기억이 그녀를 엄습했던 것이다·
임복희는 그런 그녀를 보며 비웃고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운 좋게 영양이 가득한 땅에 뿌리를 내려서 지금까지 잘 자라왔지만 이제 그 양분이 다 떨어졌어· 부모 죽이고 남편에 자식까지 다 죽일 거야?”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금 무슨 소리를····”
“그럼 아니야? 내가 말한 게 틀려? 틀리면 내 뺨 때리고 나가· 얼른! 나도 바빠· 다른 손님 봐야 해·”
도수연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녀의 손톱이 바지 안 허벅지까지 상처를 입힐 만큼 깊게 파고들었지만 그녀는 차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어머니의 자살과 아버지의 연이은 자살·
그 기억이 지금까지 얼마나 그녀를 괴롭혔던가·
지금 임복희는 도수연 부모의 자살이 모두 그녀의 탓이라고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부모의 죽음이 자신의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사춘기와 청년시절을 그렇게 지배했었는데 이제 누군가로부터 직접 손가락질을 받으니 그녀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잘못이란 말이에요?”
“아니면? 멀쩡한 부모가 왜 죽어? 사고 날 팔자가 아니고 둘이서 백년해로할 팔자인데 왜 갑자기 죽어?”
“·······”
도수연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타고난 팔자를 어떡해? 인정하고 살아야지·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고치려고 해야지· 그래야 남편과 자식새끼 지킬 거 아니야? 내 말이 틀려?”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
“정말 이게 내 가족을 지킬 거라는 말이에요?”
“내가 허튼 말 하는 거 봤어? 가족이 단단히 뒷받침돼야 큰일을 하는 거야· 가족을 지키면 대권은 자연스럽게 따라와 자연스럽게·”
어쩔 수 없었다·
도수연 입장에서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이오산업 벨트 선정지는 하남이 아닌 춘천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그녀가 살 수 있었다·
< 얽히고설키다(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