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얽히고설키다(2) >
이경호 회장의 발인이 끝났다·
그가 살던 집은 이경호 회장의 빈자리만이 아니라 이세준 부회장을 제외한 모든 가족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상태였다·
황급히 짐을 챙긴 흔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누가 보면 전쟁통에 피난이라도 간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발인을 끝내고 홀로 쓸쓸하게 집에 들어온 이세준 부회장은 난장판으로 어질러진 집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일하는 사람들도 당분간 오지 말라고 했다·
혼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넥타이를 풀고 소파에 기댔다·
샤워하고 며칠간 못 잔 잠을 실컷 자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아무도 없는 집을 온전히 누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 더러운 종자들이 자신의 돈을 축내며 공간을 더럽히는 걸 더 이상 안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때 그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수행비서이자 10년 넘게 자신의 손발이 되어 준 사람이다·
“어· 왜?”
[이세명 사장이 이형준 상무와 손을 잡는 게 기정사실로 될 것 같습니다· 안명자가 법무법인 태광을 선임해 유류분 청구 소송을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이형준 상무를 양자 입적이 가능한지까지 물어봤다고 합니다·]
“진짜 할 것 같다고?”
[단순히 떠보는 게 아니라 가능하다면 법적 싸움까지 불사하려는 태도였다고 합니다·]
“세명이 이 새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만큼이나 자신을 무서워하던 동생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칼을 들었다·
유류분 청구 소송을 한다는 건 형제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동생이 모를 리 없다·
마누라가 흔들어댔다는 건 핑계가 되지 않는다·
본인 욕심이 없다면 감히 자신을 향해 칼을 들이밀 수 있을까?
이세준 부회장은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돌아가신 회장님이 남기신 재산 일부는 이세명 사장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대책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봤자 우리 지분이 더 많아·”
[하지만 상대 쪽에서 우호지분을 많이 확보한다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넌 형준이 그 새끼 동태나 잘 파악해· 누구를 만나고 다니는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알겠어?”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그년 있잖아? 형준이 옆에서 건방지게 주둥이 놀리던 년·”
[김민희 말씀이십니까?]
“그년에 대해 알아 와· 부모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싹 다 파악해· 약점이 될 만한 게 있으면 더 좋고·”
[HS그룹 기조실 비서인 데다가 그룹 실세와 무척 가까워 자칫 잘못하면 HS그룹과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세준 부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내가 지금 그딴 거 고려하게 생겼어! 이 병신새끼가 똥 오줌 구분도 못 해!”
[죄송합니다· 전부 파악해서 보고하도록 하겠····]
그는 비서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병신 같은 새끼····”
이세준 부회장은 한동안 씩씩대다가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뜨거운 물에 몸이라도 담가야 이 화가 조금이라도 누그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조치연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석촌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를 끼고 영업하는 커피숍은 아름다운 경치를 보기 위해 사람도 많았지만 그는 이런 북적거림을 싫어하지 않았다·
송병창 사장을 옆에 두고 계속 호수를 바라보던 조치연이 맞은편에 앉은 영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얼굴도 모르는 어린 놈을 도와줘야 할 이유가 있는 거야?”
영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싫으면 안 도와주셔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지분도 많이 갖고 계시지 않다면서요·”
“내가 가진 게 지분뿐일까· 알면서 떠보지 말거라· 이놈이 그새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을 거 아니야·”
송병창 사장은 황급히 두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요· 조카사위한테 그런 말 한 번도 한 적 없습니다· 애초에 저한테 묻지도 않았어요·”
조치연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물었다·
“정말 몰라?”
“힘깨나 쓰시나 보네요?”
“왜? 생각이 바뀌었어?”
“그건 아닙니다· 이경호 회장과 친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에 듣고 ‘이것도 인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영감님이 도움을 주면 어떨까 했는데 제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일이 틀어졌고 이세명 사장이 이형준 상무의 그늘이 되어줄 것 같습니다· 영감님이 여기서 한 손
보태주시면 감사하기는 한데 그렇게 못 해주신다고 해도 섭섭해하거나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죽음을 앞둔 노인네가 단 하나의 목표 때문에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도움을 주면 감사한 것이고 아니라고 해도 섭섭해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네놈 걱정을 왜 해?”
“그럼 다행이고요·”
그가 멀뚱히 앉아 있는 송 사장에게 말했다·
“이 녀석이랑 얘기 좀 할 테니까 산책이나 하고 와·”
“저 빼놓고 무슨 비밀 얘기를 하시려고요?”
“너 몰래 내 재산 비싸게 팔아먹으려고 그런다·”
“거짓말이시겠지만 혹시라도 진짜라면 저도 흥정에 끼워주셔야 합니다· 제가 어르신 밑에서 고생한 시간이 20년 아닙니까·”
실실 웃는 게 장난으로 하는 말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송 사장이 사라지고 나서 조치연이 호수에 시선을 두었다·
“뭐가 진행이 되고는 있어?”
“엮을 만한 게 있는지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엮어? 누구를? 어떻게?”
“여의도 쪽이랑 엮어보려고 합니다·”
“이유가 있어?”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몇몇 인연이 있던 사람들이 있어서요·”
“그래서 일거양득을 노려보겠다? 쉽지 않을걸? 오히려 선을 두면 모를까 그쪽하고 엮으면 사생결단처럼 나올 텐데?”
“잘 해봐야죠·”
그런 건 걱정할 거리도 안 된다는 듯한 태도에 조 영감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이경호 회장과의 인연은 어떤 겁니까?”
잠시 회한에 잠긴 눈으로 호수를 바라보던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지독한 가난이었다· 유년기의 기억이 떠오른 순간부터 오로지 삶의 목표는 생존이었어· 넷째와 다섯째 여동생을 굶주림으로 보내고 막냇동생마저 잃을 수 없다는 생각에 그 어린 나이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참 희한했지· 아버지는 그렇게 힘들게 겨우 벌어오는 돈을 난 그 어
린 나이에도 벌어오곤 했다·”
“영감님의 재운은 특별하니까요·”
“흐흐··· 맞아· 구두를 닦으러 돌아다니면 희한하게 다들 나한테 구두를 맡겼고 쌀을 팔면 가게에 사람이 가득 들어찼어· 그러다 도박장에서 담배 심부름꾼으로 일하게 됐는데 거기서 일주일을 벌면 아버지가 한 달 동안 벌어오는 돈보다 많았다· 이러니 내가 공부를 할 수 있었겠어?”
“이해합니다·”
“겨우 가족들 입에 풀칠하기 시작할 때 큰아버지의 아는 분이 양조장을 하다가 쓰러지셨다고 하더구나· 그걸 누구한테 팔아야 하는데 믿고 맡길 사람이 없다기에 내가 나섰다· 세상에 술만큼 꾸준하게 잘 팔릴 게 없다는 생각이었지· 어린 난 내 판단에 이건 안 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
래서 그 양조장에서 술 빚는 것부터 배웠지· 내 생에 그처럼 희망에 가득 찼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았어· 나라에서 대흉작을 이유로 금주령을 내렸거든· 어떻게 됐겠어?”
“망했겠군요·”
“쫄딱 망했다· 그냥 망했으면 모르겠는데 양조장을 사기 위해 빌린 돈이 문제였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나에게 누가 그 큰돈을 빌려줬겠어? 사채였기에 가능했던 게지· 그나마 당시 사채는 완전히 악독한 놈들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죽기 직전까지 돈을 벌게 만들었을 뿐이었으니
까·”
“그게 악독한 게 아니었군요?”
“그럼· 가족은 안 건드렸으니 양반이었지·”
“허····”
“그때 돈을 빌려준 사람이 바로 이경호 회장 아버지였다·”
영훈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때부터 인연이 시작된 거였군요·”
“이 회장에게 나중에 듣기론 어렸을 땐 나만큼이나 어려웠다고 하더구나· 안 해본 게 없었다나? 그래봤자 그 고생 얼마 가지도 않았으니 번데기 앞에서 주름이나 잡는 셈이지· 흥! 지깟 놈이 가난을 겪어봤으면 얼마나 겪어봤다고···· 어쨌든 내가 독한 놈인 걸 알아본 건지 이경호 회장의
아버지가 나에게 일을 가르쳤다· 3년 만에 빚을 다 갚고 그의 밑을 벗어났지·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사채를 배웠으니 뭘 해먹고 살겠어? 동네 구멍가게에 일수부터 돌리기 시작했다·”
“돈도 없었을 텐데 그게 됐습니까?”
“종잣돈은 많이 필요도 없었다· 일수는 매일 조금씩의 돈이 들어오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거든· 1년이 지나니까 돈이 돈을 벌어다 주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새로운 세상이 열린 거지· 부자가 눈앞에 와 있었거든·”
“그래서 인생이 알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어떤 직업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경계가 나뉘니까요·”
“맞다· 대한민국에 나만큼이나 노력 안 한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어? 그런데 나만큼 부자가 못 된 건 그들의 선택이었던 게지· 돈놀이가 돈이 되는 걸 몰랐던 게 아니라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차이· 그 차이가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눈 게지·”
조 영감은 다시 차를 마시고 목을 축이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쨌든 그렇게 사채업을 해오다 운 좋게 대한유성은행이라는 은행의 은행장과 안면을 트게 됐다· 딸만 있었던 그 양반은 내 사업수완을 좋게 봤는데 어쩌다 보니 나도 그 양반의 딸과 연분이 생기게 됐다· 배운 건 없었지만 당시 돈이 많다 보니 그 흠도 그리 크게 보이지 않았던 게지·
어찌 됐을 것 같으냐?”
“당시 나이가 어떻게 됐습니까?”
“스물일곱이었다·”
스물일곱에 은행장의 딸과 결혼할 수 있다는 건 그 어린 나이에 벌써 그만한 재산을 모았다는 뜻이 됐다·
혀를 내두를 만한 능력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스물일곱이면 결혼운이 들어와 있지 않을 때입니다· 결혼하지 못하셨을 텐데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조치연이 감탄한다·
“허··· 귀신이로고···· 맞다· 당시 대한유성은행장이 무슨 이유인지도 모를 이유로 위에 끌려갔다·”
“위에요?”
“그래· 누가 밀고를 했다는데 아직도 무슨 내용이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리고서 대한유성은행이 명동의 사채업자에게 넘어갔고 나와 결혼을 약속했던 그 여자는 사채업자의 아들에게 시집가고 말았다·”
영훈이 아니라고 해도 그 사채업자가 누구인지 못 알아들을 사람은 없으리라·
“이경호 회장이군요· 대한유성은행은 신영은행의 전신일 테고요·”
“맞아· 결혼하고 나서 1년쯤 뒤에 그 여자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아직도 그때가 잊혀지지를 않아· 내 앞에서 한참을 울던 그 여자가 그러더구나· 나더러 자기 손 한 번··· 손목 한 번만 잡아줬다면 죽어도 시집가지 않았을 거라 울었었지· 어떠냐? 내 인생이 잘못된 게 그때부터였던
게냐? 그때 그 여자를 데리고 왔다면 내 인생이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 같으냐?”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그 여자를 사랑해서 후회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조 영감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어· 도와달라고 했지? 도와주마· 이제 와 신영금융에 억하심정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경호 회장도 죽어 흙이 됐지만 죽을 때가 돼서도 이 고약한 심보는 고쳐지지를 않는구나· 신영금융이 한바탕 뒤집어지면 그 오래전 억울했던 마음 한구석이 조금 씻겨 내
려갈 듯하니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감사합니다·”
“네 녀석에게 감사받으려고 하는 짓이 아니다·”
“아니면 어떻습니까· 저에게 도움이 될 텐데요·”
“정 그렇게 고맙다고 생각하면 돈으로 성의를 표시해라· 자고로 진실한 마음의 표현은 돈으로 하는 거거든·”
“그러죠· 아 그리고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봐·”
“도수연 의원에 대해 조금 아십니까?”
“도수연이?”
“네·”
“알기야 알지· 왜? 장부에 있는 여자인지 궁금해?”
조 영감은 잔뜩 기대했지만 영훈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장부를 원치 않는 영훈을 보며 조금 실망한 말투로 물었다·
“그럼 어떤 게 궁금한데?”
“좀 아시면 다리를 놓아주실 수 있는지 해서요·”
“너랑?”
“네·”
“굳이 내가 아니라고 해도 너 정도면 도수연 정도는 만날 수 있잖아?”
“그건 의미가 없습니다·”
“너··· 내가 다시 나섰다는 걸 광고하고 싶은 게로구나·”
“이왕 몸을 일으키셨으면 기침이라도 하셔야 물도 올리고 아침상도 준비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젊은 놈이 말하는 게 운치 있구나· 좋다· 내 다리 한번 놔주마·”
“왜 다리를 놔달라는지 안 궁금하십니까?”
“내가 비록 젊은 세대는 아니지만 영화를 보기 전에 미리 내용을 들으면 재미가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가장 좋은 자리에서 실시간으로 보게 될 텐데 미리 알아둬서 뭐하누?”
조치연은 빙그레 웃음을 짓고는 영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 얽히고설키다(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