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전포고(1) >
“알아본 건?”
도수연 의원이 차 뒷자리에 타며 물어본다·
조수석에 앉은 보좌관이 급히 서류 하나를 꺼내 뒤로 내밀며 대답했다·
“놀랍게도 지난 십 년간 쥐죽은 듯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저축은행을 명동의 한 사채업자에게 매각했습니다·”
“사채업자?”
“네· 의원님도 아시죠? 송병창이라고····”
“응?”
기억 못하는 걸 보며 보좌관은 아차하는 심정에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조치연 밑에서 한동안 사채 일을 배운 자입니다· 그 일이 생기기 전에 조치연 밑에서 나왔는데 그렇게 나쁘게 나온 게 아닌지 저축은행을 괜찮은 가격에 인수했습니다·”
“자금 마련하는 데 문제는 없었고?”
“네· 송병창이 가지고 있던 건물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것저것 많이도 팔았습니다·”
“재산 형성 과정은?”
“사채업이긴 하지만 불법적인 추심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민원도 없었고 애초부터 여기는 돈을 빌려주기보다는 부실채권을 싸게 사들여 추심 회수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였기 때문에 이자율을 문제 삼을 곳도 아닙니다·”
“그래도 채권 회수가 안 되면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도 있는 거잖아?”
“강제집행을 주로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해도 회수가 안 되는 악성채권은 그냥 떠안는 위험을 감수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채권을 싸게 사올 수 있었던 거고요·”
도수연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형수야·”
“네 의원님·”
“너 지금 일을 하겠다는 거니? 안 하겠다는 거니? 사채업자가 털어서 먼지도 안 나온다고 설명하면 내가 고개 끄덕이면서 알겠다고 하고 넘어가야 하는 거야?”
보좌관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파고들면 문제 삼을 곳이 몇 군데 있기는 한데····”
“있어?”
“네· 그런데 송병창이 HS그룹 송은채 회장의 친동생입니다·”
“무슨 소리야? 대기업 회장 동생이 왜 사채업을 하고 있어?”
“지금이야 송은채 회장이 그룹 최고 직위에 올라 있지만 10년 전만 해도 주식 조금 가진 주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룹 내에 영향력은 전혀 없었고 경영에도 전혀 손대지 않고 있던 순수한 주부였는데 갑자기 남편이 쓰러지면서 HS그룹의 전신인 현진물산 사장 자리에 오른 지 몇 년
되지 않습니다·”
“아 그랬지· 생각났어·”
도수연은 손가락을 튕겼다·
모르는 걸 굳이 보좌관에게 아는 척하지 않는 그녀임을 알기에 보좌관은 더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곤란하게 만들려고 작정하면 그럴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의원님에게 큰 도움은 안 될 것 같다고 여겨집니다·”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더는 보좌관을 책망하지 않았다·
보좌관의 말이 틀린 게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HS그룹처럼 한창 고속 성장하는 대기업을 상대로 섣불리 싸움을 거는 건 많은 걸 담보로 걸어야 함을 알고 있다·
그래도 못마땅한 건 어쩔 수 없어 한참 엄지를 씹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 늙다리는?”
“외부적으로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기에 은밀히 사람을 동원한 게 아닌가 의심해서 그의 손이 닿는 심부름 업체들을 뒤져 봤습니다·”
“잘했네· 결과는?”
보좌관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대부분 조치연이 다시 움직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전혀 알지 못했다는 분위기라서 꽤 타이트하게 압박해봤는데··· 죄송합니다·”
“알아내지 못했다··· 그냥 허풍이었을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래 허풍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내 경험상 그 늙다리는 허풍 같은 거 잘 안 쳐·”
도수연은 답답한지 창문을 열었다·
초여름의 조금 더운 바람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사람은 막다른 곳에 몰리면 대부분 헛소리를 하며 시간을 끌거나 허풍을 치면서 회유하려고 하거든· 특히 돈 좀 있는 인간들은 내가 여길 나가면 뭘 해주겠다 사돈에 팔촌까지 동원해서 은밀하게 재산을 늘려주겠다 등등···· 그 늙다리도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깔끔하게 포기를 하
더라고· 김 빠지게····”
“그러셨군요·”
“그래서 걸려· 계속 마음에 걸려 왔어·”
“그래봤자 조금 많이 번 사채업자일 뿐입니다·”
“자기가 호랑이인 줄 아는 여우는 무서울 게 없어· 자기가 여우인 줄 아는 여우가 무서운 거지· 뭐 그래도 여우라는 건 변함없겠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도수연은 불안함 마음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그렇게 한참을 더 움직여 도착한 곳은 논현동에 위치한 프라이빗 바였다·
방문자를 확인해야 하는 CCTV를 통과해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와야 했기에 정체불명의 기자들에게 사진을 찍힐 염려가 없고 비밀엄수가 확실한 곳이었다·
정·재계 사람들이 모임을 가지기 안성맞춤인 곳이었고 도수연 또한 이곳의 VIP손님에 해당했다·
당연히 술값은 굉장히 비싸지만 이곳 손님 중 가격을 문제 삼는 몰상식한(?) 이는 없었다·
도수연이 직원의 안내를 받아 단 한 명의 사람과도 마주치지 않고 들어간 룸에는 근 십 년 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조치연과 서른이 조금 넘어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흐흐흐··· 나만 나이를 먹는 게 아닌가 보이·”
도수연은 조치연의 농에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청년을 마주 보았다·
“안녕하십니까· HS그룹 기획조정실 실장으로 근무하는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그녀는 최영훈이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끝만 살짝 내밀어 스치듯 악수를 나누었다·
“도수연이에요· 그런데 조금 흥미롭네요·”
자리에 앉으며 말한 그녀는 조치연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이내 영훈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
“조치연이 가진 저축은행을 HS그룹 회장 동생이 인수했다고 하던데 이번에 나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HS그룹 기조실장이라··· 무슨 꿍꿍이실까?”
“먼저 한 잔 하시죠·”
영훈이 술병을 들었지만 그녀는 가만히 손을 들었다·
“술은 됐어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이니까·”
순간 조치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고역이라고? 흐흐··· 그것 참 희한한 일이구만· 누가 들으면 나 때문에 그대가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줄 알겠소?”
“감히 사채나 만지는 쓰레기 주제에····”
“나 같은 쓰레기도 없으면 세상 천지에 없는 놈이 돈 빌릴 데가 어디 있단 말이오? 당장 돈 없으면 부모가 죽게 생겼는데 은행은 신용등급이 어떻다 연봉이 어떻다 해대는데 나 같은 쓰레기라도 있어야 하루를 넘기지 않겠소?”
“흥! 그렇게 해서 사람을 더욱 나락으로 빠트리는 게 당신 같은 족속들이지·”
“여전히 날 동네 양아치 취급하고 있군· 난 법정 이자를 넘긴 적이 없소이다· 그걸 알면서 계속 이러는 건 알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요?”
영훈이 분위기가 더 악화될까 봐 나섰다·
“그만하시죠· 그리고 여기 영감님은 제 부탁으로 여기 자리를 마련해주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의원님께서도 불필요한 의심은 거두셔도 됩니다·”
도수연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물었다·
“이 인간하고 어떤 사이에요?”
“제가 그룹 기조실 실장이기도 하지만 제 아내 되는 사람이 송은채 회장님의 외동딸입니다· 송 회장님이 제 장모 되시죠·”
“허··· 재벌 데릴사위셨네?”
“정확히 데릴사위는 아니지만 굳이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얼마 전에 우연히 아내의 삼촌 되시는 송병창 사장의 저축은행 인수를 도와드리게 됐는데 마침 저축은행 소유주분께서 도 의원님과 안면이 있으시다고 하시기에 자리를 마련했습
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는 악연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그건 당신이 알 필요 없어요· 본론을 꺼내 봐요· 원하는 게 뭔지·”
영훈은 조금 굳은 표정으로 잠시 턱을 매만졌다·
누가 봐도 기분이 나쁜 표정이라 도 의원의 눈썹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감히 누구 앞에서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이가 없어 화를 내려는 찰나 영훈이 입을 열었다·
“절 싸구려 잡상인 취급을 하시니 괜한 자리를 마련한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자리를 파하도록 하지요·”
“하··· 당신····”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에는 조치연까지 대동해서 자리를 만든 저 젊은 기조실장의 의도가 너무도 궁금했다·
그 궁금증이 그녀의 엉덩이를 억지로 붙들어 앉혔다·
“전 의원님과 싸우자고 만든 자리가 아닌데 말도 하기 전에 이런 취급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국회의원은 국민을 대신하는 사람이고 저 역시 국민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다·
저 젊은 기조실장은 자신에게 그저 아부만 하려는 얼뜨기가 아니니 일단 안색을 바로 했다·
“미안해요· 내 실수였어요·”
“알겠습니다· 저 역시 의원님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일을 추진했던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럼 한 잔 받으시겠습니까?”
도수연은 슬쩍 조치연을 바라보다가 술잔을 내밀었다·
“그러죠·”
영훈은 그녀의 잔에 술을 따르고는 조치연과 자신의 잔에 차례로 따랐다·
셋은 잔을 부딪치지 않고 가볍게 입술을 축였다·
다만 조치연은 단번에 술을 들이키며 그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영훈은 술잔을 잠시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잔뜩 걱정하시는 것 같은데 오늘은 정말 의원님께 얼굴 도장만 한번 찍으려고 했습니다· 야당에서 지금 의원님만큼 존재감을 내보이는 사람이 없고 저희는 한창 커가는 회사인데 당연히 인사드려야 하니까요·”
어차피 만나서 악수 한번 하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목적은 달성했다·
다만 조치연과 같이 자리했던 건 그녀의 반응이 궁금해서였을 뿐이다·
역시나 그녀의 뾰족한 반응에 오늘 만남의 수확이 상당하기에 지금 이대로 자리를 파한다고 해도 아무런 손해가 없다 생각했다·
“정말 다른 의도가 없었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오히려 조금 당황했습니다· 두 분이 악연이 있는 줄 알았다면 저 혼자 의원님을 모셨을 텐데요·”
“HS그룹 일처리가 그리 밝지 못하네요· 다른 곳과는 다르게····”
“이거 죄송합니다· 부족한 모습을 보였네요·”
“좋아요· 언제 자리를 따로 마련해요· 그때는 서로 오해 없이 대화를 해보도록 하죠·”
도수연으로서는 일단 HS그룹이 선의로 접근하는 걸 알았으니 더는 궁금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너무 별것 아닌 일이라 허탈할 정도였지만 어쨌든 나쁜 일은 아니었기에 자리를 파하고 이대로 일어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조치연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거 두 사람이 서로 할 이야기들 하셨으니까 이제 내 차례가 아닌가 싶구만· 오래 걸리지 않으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말게· 무서워서 잠도 못 자겠구만 그려·”
“개소리 집어치우고 정말 할 얘기가 있으면 여기 이 사람 보내고 해요·”
“아니 아니··· 그러면 재미가 없지 않나· 이 나이 먹으니까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는 게 재미가 없어· 그러니 죽기 전에 제대로 놀아보고 싶으이·”
“이봐요·”
“내 자네에게 취조를 받으면서 세상을 잘못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네· 그저 많이만 모아놓으면 그게 다 내 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야· 세상을 우습게 본 게지·”
“·······”
“세상을 우습게 봤으면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맞는데··· 하필 그게 내 딸의 목숨값이라는 게 문제였지· 그건 계산이 안 맞아· 너무 비싸게 치르는 거잖아·”
“전에도 말했지만 그게 싫으면 목숨을 걸어야 해· 당신은 그럴 용기도 없었잖아·”
“그랬지· 한데 옥황상제가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네· 주책맞게 오래 산 보람이 있었던 게지·”
“흥! 이제 와서 용기가 생겨? 죽음이 보이니까? 당신이 죽으면 당신의 남은 아들은? 그건 두렵지 않나 봐?”
“너무 열 내지 말게· 어차피 난 도 의원이 아니라 다른 곳을 보고 있는데 왜 도 의원이 열 내고 있나?”
“·······”
그녀는 대답 없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리 아들이 걱정인 것도 맞네· 나야 어떻게 돼도 괜찮지만 그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이 아들까지 건드리면 어쩌나 하는 고민도 많았지· 그런데 괜찮을 것 같아· 제 녀석도 머리가 있고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그 정도도 헤쳐 가지 못할까· 그 녀석도 사람인데 지 누나 원은 풀게 해줘야지·”
“당신··· 자신 있어?”
“흐흐흐··· 자신이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인가· 그러니 자네는 어서 가서 알리도록 하게· 수저 들 힘도 없는 노인네가 오래된 빚을 받으러 왔다고· 그리고 언제 때가 되면 그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려주게· 내가 그게 궁금허이· 그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
조치연의 광기 어린 눈빛에 그녀는 숨이 턱 막혀왔다·
< 선전포고(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