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전포고(2) >
도수연은 기분 나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영훈도 따라 일어났다·
“오늘은 당신과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울 듯하니 다음에 따로 약속을 잡도록 해요· 그리고··· 한 가지 충고할게요· 당신이 이 늙다리와 계속 인연을 이어나가는 건 결코 좋은 선택은 아닐 거예요· 그게 어떤 의미일지 잘 생각해보도록 해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는 영훈을 흘깃 쳐다보고는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영훈이 자리에 앉자 조치연은 말없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연세 생각하세요· 독한 술을 해독하기에는 영감님 간이 그리 건강하지 못할 겁니다·”
“네 녀석이 그랬잖아· 끝을 볼 때까지는 살 거라고· 그럼 됐다· 내 간은 딱 그 정도만 버텨주면 된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한 모금 마신다·
단번에 들이키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 그가 말했다·
“보니까 어떠냐?”
“·······”
“왜 말이 없어?”
“그녀의 운명을 물어보는 겁니까?”
“그렇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영감님이 알아야 할 내용이 아닙니다·”
“매정한 놈·”
“전 약속만 잡아달라고 했는데 자꾸 자리에 같이하겠다고 하셔서 의아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있으셨군요·”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자리했을까·”
“전 그냥 존재감만 보여주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굳이 선전포고까지 하신 이유가 뭡니까?”
“무서워하라고 그랬다· 두려움에 떨고 있으라고 그랬다·”
“저들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다시 나왔어· 그리고 네 말대로 선전포고까지 했으니 이제 내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하게 될지 알게다· 장부를 가지고 검찰에 갈 거라고 생각하겠지·”
“저들도 장부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까?”
“당연히 알지· 왜 모르겠어· 그런데 그 장부를 함부로 내보이지 못할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날 그냥 둔 게지·”
“그 장부에 뭐가 있길래 그럽니까?”
“흐흐····”
조치연은 묘한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내 돈이 세영그룹을 거쳐 판·검사들에게 흘러 들어간 장부지· 누구는 자동차로 누구는 애들 학비로 누구는 병원비로····”
“판·검사요?”
“그것들 말고도 다른 것들이 많지만 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그거다· 누구보다 청렴결백해야 하는 이들의 치명적인 약점을 내가 쥐고 있는 게지·”
영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 영감님을 그대로 두었다고요?”
“흐흐··· 내가 아직 죽지 않고 있는 게 신기하지? 못 죽이는 게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아는데 어디에 숨겨뒀는지 모르니 날 어설프게 건들면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는 게 날 죽이지 않는 첫 번째 이유다·”
“그때 집에서 꺼냈던 거 아닙니까?”
“하하하! 이놈아· 내가 널 어떻게 믿고 그걸 보여줘? 내가 전에 꺼내놨던 건 정치인들에게 준 내역이다·”
“정치인들보다 판·검사를 상대로 한 장부가 더 중요하다는 거군요?”
“당연하지· 정치인들 잡아넣는 게 판·검사고 재벌들 잡아넣는 게 판·검사다· 그런 판·검사들의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나면 어디 정치인 스캔들에 비견될 수 있겠어?”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뭡니까?”
“그걸 세상에 내보이면 누가 수사할 것 같으냐?”
“그거야····”
영훈은 그제야 조치연이 예전에 했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말 모든 걸 걸지 않고서는 이 장부를 깔 수 없었던 거였다·
“검사가 수사할 테지· 지들 약점을 지들이 수사하는데 제대로 할 것 같으냐? 세상에 존재가 드러나면 반짝 시끄러워지기는 하겠지· 하지만 석 달만 지나 봐라· 어느 언론사에서 그 스캔들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사람들의 기억에선 잊혀지고 결국 흐지부지 마무리될 게다· 그럼? 나와 내
가족들은 산산이 부서지겠지·”
저 장부를 까는 순간 어떤 결과가 나오든 조치연은 죽어야 했다·
존재는 알고 있으나 세상에 나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굳이 조치연을 죽여서 위험을 감수할 이유도 없었다·
“도수연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군요·”
“크크크··· 어디 발등에 불만 떨어졌을까? 도수연이가 왜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줄 알아?”
“설마···?”
“도수연이 남편 이름이 장부에 올라가 있거든· 하하하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게 아니라 그 불이 허벅지까지 올라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걸? 하하하!”
영훈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는 조치연을 보며 조용히 술을 마셨다·
생각보다 악연의 고리가 더 깊게 엮여 있다는 것이 그를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
신영은행의 행장인 마석대는 굳은 표정으로 형준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경호 회장이 죽고 신영금융그룹은 그야말로 폭풍의 눈이 되어 있었다·
형제의 난이 일 거라는 예상 때문에 신영금융지주의 주가는 미친 듯이 널뛰기를 하고 있었고 경제지를 비롯해 언론들은 누가 이경호 회장의 뒤를 이을지 연일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에 반해 회사 내부는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혹시나 애먼 유탄에 맞아 회사를 등질지 알 수 없어 셋 이상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일은 삼갔으며 불필요한 회식도 자제했다·
특히 임원들은 내부 임원들과의 골프 약속도 취소하는 등 집안 단속과 눈치 보기를 병행하고 있었다·
다들 누가 됐든 이 사태가 어서 진정되기만을 바라는 현실이었지만 그게 쉽지 않을 거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마석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지만 지금 회사에서 누구보다 난처한 사람은 그였다·
“도와주고 싶지만 내가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라는 거 알고 있지?”
도와주고 싶다는 마석대의 말은 반쯤만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은 조용히 사라져줬으면 한다는 것임을 형준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다른 임원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형준이 가진 폭탄은 너무 위험했고 더러운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더러운 치부를 가지고 조용히 이 바닥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한다는 걸 형준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제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닙니다· 은행장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임시주총에서 대표이사 해임 건의안을 내주세요·”
마석대는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그건 너무 노골적이야· 뒤가 없다고· 하면 이길 수는 있는 건가?”
“이길 수 있습니다·”
“그걸 믿을 수가 없어· 나더러 개국공신이 되라고 제안하려면 승산을 보여주게· 아직 이세명 사장이 전면으로 나서지도 않았네· 이세명 사장 없으면 자네 혼자 역부족이야· 난 지는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아·”
“저 역시 지는 싸움은 하지 않습니다· 작은아버지는 며칠 내로 곧 입장을 밝히실 겁니다·”
“그럼 입장을 밝힌 다음에 나와 이야기를 하세· 그리고 그 전에 내가 하나 경고하지·”
“말씀하세요·”
“이세준 부회장님이 자네 이러는 거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지금의 나는 자네 편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 결정이 언제고 그대로일 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네· 그럼 자네 편을 들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어떨 거 같은가? 두 번 세 번 확인해야 될 거야·”
“알겠습니다· 명심하도록 하죠·”
은행장실을 나온 형준은 자신을 흘깃 바라보고 고개를 숙이는 비서들을 스쳐 지나갔다·
저 비서들은 아버지의 눈일까?
아니면 그냥 무심결에 한 행동일까?
아무렇지 않은 행동에도 수많은 의미를 부여해야 하고 마주치는 모든 사람을 의심해야 하는 자신의 상황이 점차 힘겹게 다가왔다·
아버지가 출근하면 부회장실에 누가 들어갔는지 수시로 체크하고 무슨 대화를 나눴을지 최악의 경우까지 상상을 거듭해야 했다·
식욕도 떨어지고 있었고 점심시간만 지나도 피곤이 몰려왔다·
지쳐가고 있음을 느낀 형준이 민희에게 전화하려 할 때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형준아·]
“네·”
[너 누구 한 명 좀 만나줘·]
“누굴 만나요?”
[엄마 친구 중에 현숙이라고 알지? 아들이 이번에 취업하려고 하는데 어렵대· 네가 만나서 한번 보고 손 좀 써줘·]
형준은 힘이 쭉 빠졌다·
“엄마 내가 지금 누구 취업시켜줄 상황이 아니에요·”
[알아 너 바쁘고 힘든 거· 그런데 현숙이 남편 뭐하는 사람인지 몰라? 국토교통부 5급 공무원이야· 엄마가 뭐 아무나 막 취업시켜 달라고 그러니? 다 너한테 도움이 될 사람들이니까 그렇지·]
“국토교통부 5급 공무원 알아서 내가 어따 써먹어요? 우리 회사가 무슨 건설회사야? 엄마 괜히 위신 세우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알겠는데 지금 상황이 그렇지 않아요· 집 나와서 호텔서 살고 있으면서 그러고 싶어?”
[야! 그럼 호텔에서 계속 쥐죽은 듯 살아야겠니? 너 엄마 그렇게 기죽어 사는 거 보고 싶어? 남편한테 버림받은 여자로 계속 살았으면 좋겠니?]
“그 말이 아니잖아요!”
형준의 목소리가 점점 올라갔다·
[누구는 엄마 나이에 대기업 회장도 한다는데 난 남편한테 쫓겨나서 호텔 전전하는 걸 보고도 넌 어쩜 그렇게 냉정하니?]
“인테리어 한다고 호텔 들어가 있는 거잖아·”
[그럼 남이 쓰던 집엘 그냥 들어가? 남들이 볼일 본 변기에 그대로 앉아? 다 낡아서 귀신이 나올 법한 집에서 그냥 살아? 어쨌든 너 걔 만나든 안 만나든 취업 알아서 해결해줘· 현숙이 내 친구야· 내가 10년 전부터 걔 아들 취업 안 되면 내가 책임져 주겠다고 큰소리쳤었어· 이거 못 물
러·]
귀신이 나올 법한 집이 30억이나 할까·
“엄마····”
[걔 하나 취업시켜준다고 이세준 그 인간한테 밀리는 거니? 너 그 정도 할 수 있잖아· 엄살 부리지 말고 엄마 부탁 하나만 들어줘· 그리고 너 빨리 결혼해· 장례식장에 어디 비서 데리고 왔다는 소문 들리던데 그런 애들 빨리 정리하고 엄마가 이번에 제대로 된 애 소개해줄 테니까 빨리 선
봐· 알겠니?]
“끊어요·”
[형준아! 너····]
형준은 엄마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이 정도로 상황 판단을 못하는 엄마가 아니었는데 집에서 쫓겨나고 심경의 변화가 컸던 게 분명했다·
나락으로 떨어진 자존감을 올리기 위해 저러는 것 같아서 이해를 못 할 것도 아니었는데····
형준은 괴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걸 억지로 참으며 그대로 회사를 벗어났다·
때마침 눈에 띈 작은 호프집·
그는 홀리듯 그 집에 들어가 소주와 치킨을 시켰다·
평소에는 잘 먹지도 않던 치킨과 소주였지만 오늘만큼은 이상하게도 어떤 술이라도 마시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였다·
“크으····”
치킨도 없이 미리 나온 치킨무를 곁들여 소주를 마시는데 어찌나 맛있는지····
치킨이 나오기도 전에 한 병을 다 마셨을 때 문자 하나가 왔다·
[이세준 부회장님 금일 고이케 유리코씨를 만나셨습니다·]
고이케 유리코는 유한회사인 로얄메이저라는 회사의 대표이자 신영금융지주의 사외이사 중 하나였다·
작년에 코빼기도 안 비친 그녀까지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숨통이 조여지는 느낌에 그는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언제인지 모르지만 어느새 그의 옆에는 민희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형준이 술을 마시는 걸 보면서도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켰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의 형준이 잔뜩 취한 채 물었다·
“언제 왔었어? 온 지도 몰랐네·”
“당신이 불렀잖아요·”
“내가?”
“네·”
“내가 뭐라고 하면서 불렀어?”
“보고 싶다고 했어요·”
“·······”
형준은 다시 술을 들이켰다·
몇 잔을 연거푸 마신 그는 서비스로 나온 어묵탕에 숟가락을 가져가다 말고 입을 열었다·
“내가 그냥 다 포기하고 도망치자고 하면 따라올 거야?”
“아니요·”
“그렇지? 솔직히 저 정도 회사를 그냥 포기하는 건 아깝긴 해·”
그녀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포기하고 싶어요?”
“아버지가 나한테 장난감을 사준 적이 딱 한 번 있다? 딱 한 번··· 변신 로봇이었는데 아직도 그거 안 버렸어· 어릴 때는 유일한 아버지 선물이라 너무 소중해서 안 버렸고 나이가 들어서는 그걸 버리면 정말··· 내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닐 것 같았어·”
“·······”
“난 어릴 때 엄마보다 아버지가 더 좋았는데····”
“그 장난감 이제 버려요· 버릴 때 됐어요·”
형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그가 민희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 너무 힘들다·”
애 같은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민희는 마음이 차분해졌다·
눈물이 블라우스를 적시는 걸 느끼던 그녀가 말했다·
“걱정하지도 말고 무서워하지도 말아요· 내가 당신 지켜줄게·”
민희는 어깨를 들썩이는 형준의 등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 선전포고(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