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전포고(4) >
자신의 사무실로 올라오자마자 영훈은 곧바로 박병호 부장을 호출했다·
오랜만에 자신을 찾는 이유가 그동안 지시한 일에 대해 중간보고를 요하는 것임을 알기에 박 부장은 조금 긴장한 채 들어갔다·
“부르셨습니까·”
“네· 세영그룹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던 거 어느 정도까지 됐습니까?”
“일단 세영그룹 내부사정을 잘 아는 사람을 찾느라 시간이 소요되기는 했습니다· 기본적인 상황이야 저희 정보력만으로도 확인 가능한데 그룹 내부의 은밀한 정치적 상관관계까지 알아내려면 몇몇 핵심 인물들에게 접근해야 해서요·”
“그렇겠네요·”
“며칠 고생하다가 작년에 상무까지 지내다 퇴사한 김재헌이라는 사람을 알아냈습니다· 서울대 출신 기자였다가 어느 순간부터 신문이 아닌 세영개발로 옮기고 나서 승승장구한 인물입니다· 그러다 작년에 무슨 이유인지 계약이 종료됐고 지금은 야인이 돼 있습니다·”
“잘 찾았네요·”
“저희 직원이 끈질기게 접촉해서 결국 집까지 찾아가 대화에 성공했습니다·”
“어지간해서는 회사에 불리한 정보는 이야기해주지 않았을 것 같은데 잘 털어놓던가요?”
“알고 보니 작년에 임원계약을 이어가지 못한 이유가 그룹 수뇌부와 불화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불화인지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무척 불쾌한···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원한이 생겼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천보윤 의원에 대해서는 세영그룹과 전혀 연관된 부분이 없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천보윤 의원은 왜 나오냐고 물어보는데 거짓으로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으음····”
다행이다·
만약 세영그룹과 천 의원이 연관돼 있었다면 무척 골치 아플 뻔했다·
반대로 생각하면 만약 그가 세영그룹과 연관되어 있었다면 아마도 그의 사주에 대통령이 될 만큼 큰 인물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나왔을 게 확실했다·
“그런데 도수연 의원 이야기를 꺼내자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래요?”
“네· 10여 년 전 가족과 관련된 송사 때문에 도수연 당시 검사와 인연을 맺었고 그 이후로도 꾸준히 지원해왔다고 합니다·”
“지원해왔다고요?”
“예· 이후 도수연 당시 검사가 처음 정치에 발을 담그게 된 게 통일평화당 비례대표에 이름을 올린 거였는데 그걸 세영그룹에서 밀어줬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세영그룹 입김이면 비례대표 순번까지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도수연이 정치에 들어갈 수 있게 된 배경에 세영그룹의 도움이 있었다면 둘 사이가 무척 끈끈하겠어요·”
“그럴 거라 짐작됩니다· 이후 법무부장관에 임명됐다가 정권이 바뀌면서 통일평화당이 야당이 됐고 절치부심해서 청주 지역구에 나와 당선됐습니다· 법무부 장관 이력도 있는 사람이라서 재선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존재감을 보이고 있는데 이번에 행자부 장관 건도 세영에서 준 소
스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요?”
“네· 검찰도 마찬가지지만 대형 언론사도 정치인들이 가진 약점을 알아낸다고 바로 터트리지 않습니다· 사건이 외부에 노출됐을 때 일어나는 각종 파생효과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사건 하나가 터진다면 이미 파생효과를 어느 정도 예측한 뒤에 터트리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박 부장은 마치 선생님처럼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행자부 장관 건도 이미 세영에서 알고 있었던 건일 수도 있다는 말이네요?”
“맞습니다· 행자부 장관의 교수시절 논문 표절 문제는 이미 세영에서도 몇몇 기자들은 알고 있었다고 했으니까요·”
“그럼 세영에서 도 의원을 대권 주자로 밀려고 했다는 거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소스를 도 의원에게 줄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기묘했다·
처음에는 천보윤 의원을 밀어주려는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했는데 조치연 영감이 끼어들어 일을 복잡하게 만들더니 결국 도수연과 세영의 연결고리가 드러났다·
이래서 인생이 재미있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수연 의원이 10년 전에 세영그룹의 사건을 맡았다고 했죠?”
“네·”
“그것 좀 확인해보세요·”
박병호 부장은 잠시 멈칫했다·
망설이던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민한 사건입니다·”
“대략 알고 있어요· 자세히 알아보라는 거예요·”
이미 알고 있다고 하니 박 부장도 더는 말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당시에 나왔던 기사 중에 삭제되지 않은 것들로 대략적인 사건 개요는 확인할 수 있겠지만 더 정확히 알려고 하면 당시 사건을 잘 알고 있는 검사나 변호사를 찾아야 합니다· 그럼 우리가 세영의 10년 전 사건을 파고들려는 게 외부에 알려질지도 모릅니다·”
“음··· 일단 최대한 조용히 알아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방금 커피숍에서 올라왔는데 세영일보 기자라고 하면서 인터뷰를 요청했어요·”
영훈은 아까 밑에서 받았던 명함을 꺼내 박 부장에게 넘겨줬다·
“왕가희 기자? 이름이 특이하네요·”
“알아보세요· 기자는 아닌 것 같은데····”
어디 기자 관상이 따로 있을까·
그럼에도 영훈이 그녀가 기자가 아니라고 단정 지은 이유는 그녀의 눈과 입 때문이다·
좋은 눈은 항상 정면을 보고 있어야 하며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듯 치켜 올리는 사람은 오만한 경우가 많다·
반대로 사람을 앞에 두고도 눈동자가 아래를 향하고 눈두덩이가 두터우며 눈꼬리가 길게 늘어져 있으면 대개 음흉하고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많다· 왕가희의 눈이 그랬다·
또한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모두 얄팍해 헛된 말을 많이 하고 복도 없으니 입의 상으로 보면 빈천하기 그지없었다·
만약 이런 사람이 기자라면 기사는 온통 거짓뿐일 것이고 그 기사들은 전부 자기의 이익을 위해 쓰였을 터였다·
“기자가 아닌 것 같다고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기자가 아닌 것 같았어요·”
“알겠습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박 부장이 나가고 민희가 들어와 말했다·
“상무님 천보윤 의원 보좌관이 방금 연락해 왔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의원님께서 시간 되면 만날 수 있겠냐고 전했습니다·”
“언제요?”
“마침 전에 만났던 호텔에서 저녁 약속이 있다고 합니다· 저녁 시간 끝나고 볼 수 있겠냐고 합니다·”
“그래요·”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사실상 지금 당장 볼 수 있겠냐는 말과 다름없었다·
우연히도 때마침 연희가 오늘 저녁은 친구들과 식사하겠다고 했는지라 저녁 시간이 애매했는데 잘 됐다고 생각했다·
호텔 스위트룸에서 그림 같은 야경을 배경으로 룸서비스를 시켜 혼자 조용히 식사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설렜다·
마침 국회의원과 만날 약속까지 정해졌으니 핑계도 딱 좋았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퍼지고 있을 때 민희가 슬며시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상무님?”
“네? 왜요?”
“음··· 신영금융 이형준 상무 건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딱 봐도 근심하는 표정이 다 드러나 있었다·
너무 무심했나 하는 생각에 자책하며 얼른 대답했다·
“일단 기다리는 중이에요· 우리가 전면에 나서서 한쪽 편을 들면 서로 골치 아파지니까· 일단 이세명 사장이 나서서 대립각을 세워주면 내가 도와줄 생각이에요·”
“상무님이요?”
“네·”
그제야 민희는 얼굴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나중에 일이 잘 되면 하도록 해요· 회사 차원에서 도움을 주면 아까 말했던 대로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 내가 개인적으로 도움을 주려고 하는 거니까·”
“상무님이 도와주신다고 하니까 HS그룹 전체가 도와주겠다는 말보다 더 안심이 되는데요?”
“그런데 그건 알고 있어야 해요· 회사에 피해가 생길 수도 있다면 언제든지 생각을 달리할 수도 있다는 거·”
“당연합니다·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침착하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니 안심이 되긴 했다·
“좋아요· 이형준 상무에게 이세명 사장 결심이 서면 연락 달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
그냥 손님이 온다고 해도 5성급 호텔 룸서비스면 음식의 퀄리티는 문제가 있을 리 없다·
그런데 사실상 회장 다음으로 파워가 세다는 영훈이 와서 음식을 시키니 시키지도 않은 각종 음식까지 줄줄이 올라온다·
혼자 먹기에는 버거울 정도지만 그래도 주방의 성의를 봐서 겨우 먹는데 똑똑 소리가 나며 사람이 들어왔다·
“상무님 천 의원님 오셨는데요·”
“들어오시라고 해요·”
곧바로 천보윤 의원이 들어오는데 그는 탁자에 그득한 음식을 보며 감탄했다·
“이게 다 뭔가?”
“주방장이 새 메뉴를 준비한다고 미리 저한테 시식을 요청하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무리해서 먹어보는 중입니다·”
“부럽군· 솔직히 대한민국에서 자네가 제일 부러워·”
“저보다 돈 많은 사람 많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자네를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자네 얼굴을 볼 때마다 그늘이 진 걸 본 적이 없어서 그러네· 얼굴에 근심이 없다고 할까? 그 나잇대에 그 정도 위치에 있으면서도 피곤에 찌들지도 않고 무거운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지도 않아 보여·”
“그런가요?”
생각해보니 절에서 수양을 오래 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큰 걱정거리가 있다고 해도 어느 한도 이상의 스트레스는 받지 않았다는 걸 지금에서야 자각했다·
“부러워· 그래서 얼굴에 주름이 없는 건가?”
“조금 나이 들면 금방 확 늘어날 겁니다·”
“그래 봐야 돈으로 막으면 되는 거 아닌가? 요즘 10년의 세월 정도는 돈으로 막을 수 있잖아·”
“하하 아직 체험해보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한번 10년 어려지는 진귀한 체험을 해보고 꼭 의원님께 경험을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와인 남으면 나도 좀 주게·”
“네·”
영훈은 사람을 불러 와인을 시키고 물었다·
“어쩐 일로 보자고 하셨습니까?”
“도수연이 지금 조용한 거 자네가 한 일인가?”
영훈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전적으로 저 때문은 아니지만 원인을 제가 제공한 건 맞습니다·”
“이유를 알고 있다는 거네?”
“그렇습니다·”
“이유가 뭔가?”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단호한 대답에 천 의원이 조금 당황했다·
“말해줄 수 없다고? 우리는 같은 편 아니었나?”
“같은 편입니다· 그런데 이건 의원님이 알아서는 안 되는 내용입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연관돼 있기도 하고요· 불법적인 부분은 없습니다· 그저 지난 옛일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있는 상황일 뿐입니다·”
“옛일이 현재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렇습니다·”
“으음··· 그렇군· 어쨌건 옛일을 끌고 와 도 의원의 발목을 잡은 게 자네라는 말이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자네는 자랑하면 어디 아프기라도 하는가? 굳이 ‘어쩌다’라는 표현을 덧붙이지 않으면 양심에 가책이라도 느끼나?”
영훈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나 봅니다· 의원님 말씀대로 거짓말을 하면 왠지 모르게 벌을 받을 것 같다고나 할까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구만?”
“그거야 모르죠·”
천보윤 의원은 직원이 들어와 잔에 와인을 따라주자 그윽한 향과 맛을 잠시 즐기곤 말했다·
“좋은 와인이군·”
“입에 맞으시니 다행이네요· 전 요새 와이프 덕분에 와인에 입을 대기는 하지만 아직 뭐가 좋은 건지 잘 모르겠거든요·”
“솔직해서 좋군· 자네 덕에 그 말 많은 도수연이가 입을 다물었어· 그래서 나도 자네에게 도움을 주려고 좀 알아봤는데 마침 하남에 땅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네· 신도시 때문에 땅값 좀 올랐겠어? 축하해·”
“감사합니다· 혜성기업일 때부터 아파트를 올리려고 가지고 있었던 땅인데 운 좋게 그 지역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거 알고 있나? 원래 하남에 바이오산업 벨트가 들어갈 예정이었던 거?”
“네? 그런 게 있었나요?”
“그래· 국토부에서 바이오산업 벨트 유력지를 몇 군데 추려놓고 있었는데 내부적으로 하남을 유력하게 찍고 있었어· 그걸 아는 의원은 몇 안 되지만 그래도 은밀히 하남이 되지 않을까 예측하고는 했지·”
“하하 그거 좋군요·”
“당연히 좋지· 아파트만 들어가면 땅값이 올라가는 것에 한계가 있으니까· 하지만 수십 개의 바이오 기업이 들어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상업 구역도 조성돼야 할 테고··· 그런데 그게 춘천으로 바뀐다는 말이 돌았어·”
“춘천이요?”
“그래· 아무래도 이상해서 그게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니까 딱! 도수연이 나오는 거야· 이래서 사람은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는 건가 보네· 자네를 도와주려다가 도수연 뒤통수를 만지게 됐으니 말이야·”
천보윤 의원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 선전포고(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