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을 토해내는 여자(1) >
도수연 의원의 뒤통수가 보이기는 하는 것 같은데 문득 궁금해졌다·
“도수연 의원이 왜 그걸 춘천으로 옮기는 겁니까? 본인 지역구도 아닌데· 게다가 지금 여당을 공격하는 와중이라 무리하게 국토부 공무원들을 움직이려고 하다간 자칫 잘못하면 본인이 위험하게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나도 처음에 그게 이해가 안 가더군· 원래 남을 공격할 때는 행여 자기 몸에 붙은 티끌이 무슨 사단을 내지는 않을까 하면서 몸조심을 하는 게 보통이거든· 그래서 더 궁금해졌지· 그만큼 바이오산업 벨트 선정지가 그녀에게 중요하다는 것일 테니까·”
“그건 그렇겠죠·”
“만약 여기에 도수연이 중심이 된 비리라도 밝혀낸다면 단번에 수세를 뒤집고 분위기를 역전시킬 수 있어· 이 분위기를 대선까지 이어간다면 정권을 유지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그의 어조에 숨겨진 열망을 읽지 못할 영훈이 아니었다·
정권을 유지한다는 말은 곧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뜻·
이왕이면 회사와 가까운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게 좋을 테지만 이상하게 영훈은 기분이 그리 좋지 못했다·
너무도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회사에 도움이 되겠거니 하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원하는 대로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덜컥 겁부터 났다·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 점쟁이가 될 운명이라고 했다·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마음먹기에 따라 나라를 망치기 딱 좋은 판이 깔려버리는 셈이었다·
지금이야 욕심을 억제한다지만 막상 대통령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게 됐을 때 온전히 자신을 지키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천보윤 의원은 어두운 영훈의 표정을 보고 그가 자신을 걱정하는 거라 착각했다·
“걱정하지 말게· 내가 조용히 알아볼 테니까· 나도 국토부에 연줄이 없는 건 아니야· 바이오산업 벨트 선정에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인물이라면 몇몇 안 될 테니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어련히 잘 하시겠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무심결에 대답하고 생각해보니 천 의원이 그냥 자랑하자고 여기까지 자리했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수연 의원이 뭔가를 꾸미고 있는 걸 알아냈다···
그래서?
“그래서 말인데 내가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네·”
“뭘 말입니까?”
“혹시 군산 조선소처럼 어려움에 빠진 곳을 도울 생각이 또 있는가 해서 말이야·”
“대선 공약에 한 줄 올리고 싶어서 그러십니까?”
“조재민 시장이 군산경제를 얼마나 바꿔놓은 지는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겠지? 솔직히 난 조 시장이 처음 그 이야기를 언론에 꺼냈을 때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네· 그냥 전국구 의원이 되기 위해 관심을 받고 싶은가 보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걸 실현시켰어· 박수를 쳐주고 싶었고 실제
당선 축하 행사 때 진심을 다해 박수를 쳐줬네·”
“···”
“지금 군산 시민들이 조재민 시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지지율이 얼마더라? 아마 90%가 넘는다지? 정치인인 조 시장에게 군산조선소 해결이 평생 가는 정치적 업적을 쌓았다고 보일 수 있는 것처럼 자네도 내가 공약 한 줄 채워 넣기 위한 수작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네·”
“그래서요?”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시민들에게 얼마나 큰 혜택과 행복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는 거겠지· 지금도 전국에 산적해 있는 문제들이 많네· 난 자네가 그리고 자네 회사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보고 있네·”
영훈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의원님 그냥 저에게 정치를 하라고 하시지 그러십니까·”
“그럴 생각은 있는가?”
지금도 행여 욕심을 부릴까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데 정치인이라니···
안 될 말이다·
“아니요·”
“그러니 하는 말이네·”
“맞는 말씀이긴 한데 군산조선소는 우연이 맞아떨어져서 그렇게 된 겁니다· 제가 정치인도 아닌데 지방 경제를 억지로 일으켜야 할 이유도 없고 그건 정치인이 할 몫입니다·”
“자네 말이 백번 맞아· 정치인의 몫이지· 그런데 경제라는 게 정치인이 온 힘을 다해 노력하려고 해도 경제인이 따라주지 않으면 무소용 아닌가? 전적으로 자네더러 다 하라는 말이 아니야· 뭘 할만한 게 있다면 언제고 도움을 요청해주게· 그럼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다는 말이었어·”
“생각해보겠습니다·”
영훈이 대답할 수 있는 최대치의 답변이었다·
말이 길었고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결국 종합해보면 대선 공약에 쓰일 만한 남들과 다른 무언가를 하나 얹고 싶다는 말이었다·
물론 그게 나쁘다고는 보지 않는다·
어차피 대통령이 될 만한 사람을 밀어주는 이유가 나중에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정치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보험을 들기 위해서니까·
서로 간의 이익이 맞아떨어지는 것이라 문제 될 게 전혀 없음에도 이렇게 몸을 사리는 건 조금이라도 적극적으로 나섰다간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럼 무거운 이야기는 그쯤하고 그 땅에다가 뭐 할 생각인가?”
“아직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솔직히 그 땅이 가치가 있는 건지 얼마 전에야 알게 됐거든요· 그리고 우리 HS건설은 현재 국내 아파트 건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바이오산업 벨트까지 하남에 들어서면 지하철까지 연장해 오는 건 기정사실이야· 게다가 기업이 많이 들어오면 적당한 상업시설까지 갖춰야겠지· 하필 자네들이 가진 땅이 위치도 좋아· 못해도 땅값만 평당 천만 원을 넘어갈 거네·”
“좋네요· 공돈이 생긴 기분입니다·”
“하하하· 정말 관심이 없나 보군· 이거 남긴 건가? 내가 맛 좀 봐도 되겠지?”
“그럼요 드십시오·”
맛있어 보이는지 천보윤 의원은 후식으로 나온 과자를 몇 개 집어먹으며 영양가 없는 잡담을 즐기다 한참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그가 나가고 영훈은 반쯤 남은 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연한 제안을 받았으니 적극적으로 나서도 모자를 게 없는데 괜히 심란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때 오지환 부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상무님 자원개발팀 오지환입니다·]
“네 말씀하세요·”
[니폰유센 쪽 정리 다 끝났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됐다·
“그래요?”
[네· 기다렸다는 듯이 후쿠하라의 남편이자 니폰유센의 회장이 죽고 말았습니다· 정확히 어제 새벽에 죽었습니다· 지분은 후쿠하라와 딸에게 상속됐고 노무라 홀딩스의 에토 세이치도 해주조선해양 인수를 승낙했습니다· 누가 소유를 하든 회사 가치를 올려주는 쪽이라면 상관하지 않겠
다는 태도였습니다· 우리 쪽 선박이 인도되는 즉시 주식을 교환하고 바로 인수절차 들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후쿠하라는요?”
[작은 유통업체 하나 넘겨준다고 해서 그런지 우리 쪽에 손을 들어줬고 죽은 회장의 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진 쪽에서 들어온다던 자금은요?”
[우리 쪽에 손을 들어주는 상황임을 파악했는지 결국 투자는 취소됐습니다·]
“수고했어요·”
[아닙니다·]
“그럼 쉬세요·”
전화를 끊은 영훈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뭐가 어찌됐든 또 하나의 고비는 넘겼고 이제 새로운 선박 공급처와 자동차 운반이라는 안정적인 캐시카우를 하나 확보했으니 해주조선해양은 또 한번 도약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
한강 반포대교 아래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과 휴식을 즐기는 가족들이 한강둔치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행복한 광경을 보면서도 차 안의 남자는 홀로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누군가가 보조석 차문을 벌컥 열고 탄다·
“반갑습니다· 저 천보윤 의원님 밑에 있는 보좌관 김우섭입니다·”
“왜 보자고 했습니까?”
“아시면서 그러시네···”
국토교통부 3급 공무원인 양진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난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실 수 있죠· 그런데 궁금해서 그럽니다· 하남에 들어설 예정 아니었어요? 갑자기 춘천으로 바꾼 이유가 뭡니까?”
“아직 결정된 일은 아닙니다·”
“그럼 없는 말은 아닌 거네요 그쵸?”
양진수는 핸들을 잡고 있는 손에 땀이 촉촉하게 배는 것을 느꼈다·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양진수 씨 그렇게 긴장하지 마시고··· 우리가 양진수 씨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
“그러지 말고 진실되게 말씀해주세요· 솔직히 양진수 씨도 걸리는 게 있으니까 저와 만나러 나온 거 아닙니까?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나올 이유도 없었잖아요?”
양진수는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 말았다·
도수연을 언급하며 만약 조금의 비리라도 있으면 사돈의 팔촌까지 싹 뒤질 수 있다는 말을 하는데 어떻게 안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저 하남보다 춘천이 국토균형발전을 위해서 더 적합하다는 내부 의견입니다·”
“국토균형발전 좋죠· 나도 너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수도권에 너무 집중돼 있어요· 교육도 그렇고 놀이시설도 그렇고··· 그러니까 아파트 가격이 계속 오르지· 이래서는 안 돼· 저는 진심이에요· 우리나라는 이래서 안 돼·”
“그게 바로 내부 의견이었···”
“그런데 양진수 씨· 그럼 처음부터 춘천을 밀었어야지 하남으로 선정된 거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이제 발표만 남은 상황에서 갑자기 춘천으로 바꿔버리면 ‘혹시?’라는 생각 안 들겠어요? 나 같아도 들겠다· 갑자기 왜? 춘천에 땅이라도 사놨나?”
김우섭 보좌관의 눈빛이 양진수를 예리하게 훑었다·
당연히 양진수는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립니까?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땅이라고는 사본 적이 없습니다· 내 명의 부동산이라고는 10년 전에 사놨던 아파트가 전부라구요!”
“그러니까 이유를 말해 달라구요·”
“그런 거 없습니다·”
“아휴 나 진짜 답답하네· 자꾸 이러시니까 진짜 뭐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잖아요? 춘천에 뭐라도 있는 게 아니면 이럴 이유가 없잖아? 당신 이름이 아니더라도 당신 가족들이나 친척들 이름으로 됐을 수도 있고···”
아무리 청렴하게 살아왔다고 해도 가족들이라고 청렴할 수는 없다·
“이봐요!”
“우리 깔끔하게 갑시다· 난 당신한테 아무것도 못 들었고 당신은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은 거예요 알겠죠? 당신도 이제 다음 정권에서 차관 한번 달 수도 있는 거니까··· 우리 높게 봅시다· 응?”
양진수는 어물쩍거렸다·
하지만 일단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준 것 자체만으로 김우섭은 됐다고 확신했다·
망설이는 건 결국 설득당하는 과정에 들어선 거라고 믿으니까·
역시나 잠시 망설이던 양진수가 입을 열었다·
“도수연 의원 쪽에서 춘천이 국토균형발전 측면에서 더 적합하지 않냐는 의견을 보내왔습니다·”
“아··· 그 분·”
“그게 답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진짜입니다·”
당연히 그게 다일 거라는 건 김우섭도 짐작하고 있었다·
돈이나 금품이 오가는 위험천만한 일을 도수연이 할 리는 없으니까·
그저 국회의원으로서 의견을 전달한 것이라고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테니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던 거다·
양진수에 대해 어떤 강력한 약점을 쥐고 있다면 말이다·
“에이··· 도수연 의원이 끼어들었던 건 이미 알고 있었던 거고 내가 듣고 싶은 건 이유입니다· 도수연 의원이 춘천에 땅이 있을 리도 없고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도수연이 그에 대해 어떤 약점을 쥐고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알려줄 리도 없었고·
검사에다 법무부장관 출신인 그녀였으니 모르긴 몰라도 불법적인 부분으로 약점을 쥐고 있을 테니 굳이 입 밖으로 꺼내 양진수의 기분을 나쁘게 할 이유도 없었다·
진짜 중요한 건 도수연이 바이오산업 벨트를 춘천으로 바꿔야 하는 이유니까·
“나도 그게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나한테 이유를 알려 주겠어요?”
“정말 모르는 거예요?”
“진짜예요· 그런데··· 이건 확실하지 않은데요·”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건데···”
“괜찮아요· 말해보라니까·”
놀라는 김우섭을 보며 양진수가 메마른 입술을 축이며 얼른 뒷말을 덧붙였다·
“확실하지는 않은데··· 제 아내가 삼청동의 점집을 자주 다니거든요? 그런데 제 직업을 알고 아내한테 이상한 이야기를 했었어요·”
“어떤 이야기요?”
점집이랑 춘천이랑 무슨 상관이 있을지 김우섭이 연관을 못 짓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그 점쟁이가 제 아내한테 바이오산업 벨트 이야기를 하면서 하남이 아니라 춘천이 꼭 되어야 한다고 했다네요·”
“춘천? 점쟁이가요?”
“네· 그래서 아내가 그 점쟁이한테 남편이 무슨 힘이 있냐는 식으로 웃어 넘길랬더니 글쎄 그 점쟁이가 곧 있으면 국회의원이 도와줄 거라는 식으로 말하더랍니다·”
김우섭은 그제야 머리에 반짝 불이 들어옴을 느꼈다·
“그래요?”
“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도수연 의원이 그런 의견을 저한테 보내온 거죠· 진짜 신기했는데 무슨 사이였냐고 물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잘했습니다· 안 물어보신 거 잘한 선택이었어요· 그런데 그 점집이 어디라구요?”
“그게···”
양진수는 황급히 자신의 와이프에게 문자를 보냈다·
< 복을 토해내는 여자(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