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을 토해내는 여자(2) >
“그러니까 지금 도수연이가 점쟁이 말을 믿고 바이오산업 벨트를 춘천으로 옮기려고 한다는 말이지? 니 말이 그거지?”
가늘게 눈을 뜨며 바라보는 천보윤 의원의 질문에 김우섭 보좌관은 민망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궜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뭐?”
“한번 알아볼 필요성은···”
“하아··· 검사 출신에 법무부장관까지 역임했던 도수연 의원이 점쟁이 말을 믿고 바이오산업 벨트 조성지를 바꾸려 한다? 인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천보윤 의원은 믿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똑똑한 도수연이 점쟁이 말에 휘둘린다는 것 자체가 상상이 되질 않았으니까·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공교롭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도수연 의원이 양진수에게 접근한 건 그게 아니면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우연일 수도 있잖아· 도수연이가 춘천으로 꼭 옮겨야만 할 이유가 그 점쟁이 이익과 맞아 떨어질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겠지만 도수연 의원은 검사 출신 아닙니까? 숨겨둔 재산 찾아내는데 일가견이 있고 걸렸을 때 파급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도수연 의원이 저리 움직이는 이유가 단순히 금전적인 이익 때문은 아닐 수 있습니다· 만약 선거를 염두에 둔다면···”
“선거 때문일 수도 있다?”
“강원도가 아무래도 낙후되어 있는데다가 선거를 치를수록 강원도 민심이 여당 쪽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경기도로 갈 바이오산업 벨트를 강원도로 옮긴다면 강원도 민심도 야당을 응원하게 될 겁니다·”
천 의원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말 아니야· 서로 다른 걸 생각하다가 우연히 맞아떨어졌다는 거지·”
“만약 점쟁이가 도수연 의원을 이 논리로 설득시켰다면요?”
“야 도수연이가 바보냐? 아니면 도수연이가 사이비 신도고 그 점쟁이가 교주야? 설득하면 그냥 설득당해주게?”
김우섭은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자신이 생각해도 점쟁이가 설득하고 그걸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도수연의 모습이 상상이 안 되었으니까·
“그럼 접을까요?”
“하··· 이게 말이 안 되는 거기는 한데 그렇다고 그냥 없는 일로 하자니 이상하긴 하고···”
“그러니 한번 들쑤셔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일단 그건 내가 처리할 테니까 넌 도수연이 계속 지켜만 봐·”
“알겠습니다·”
“아니다· HS그룹 최영훈 상무한테 전화 넣어· 내가 좀 만나자고 한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천보윤 의원은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뭔가가 걸리긴 걸렸는데 아무래도 혼자 고민해서는 답이 안 나올 것 같았다·
*
HS그룹 내에서도 가장 엘리트들만 모인 기획조정실이니 직원들이 얼마나 빡빡하게 열심히 일하는지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다·
당연히 점심시간도 1시간을 꽉 채워 쉬는 직원이 과장급 이상만 가능했고 심지어 급한 프로젝트가 걸려있을 때면 부장님도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기 일쑤였다·
민희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최영훈 상무 비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항상 점심시간 가장 마지막에 나가서 제일 일찍 들어오려고 노력한 그녀였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무려 11시 반에 회사를 나와 근처에 위치한 HS관광 소속 5성급 호텔로 향했다·
당연히 그저 호텔 점심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누군가와 약속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훈의 허락을 맡아 호텔 내에 위치한 중식당에 도착한 그녀는 자못 긴장한 채 밖에 서 있는 형준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왜 나와 있어요?”
“어? 왔어· 예쁘네·”
민희가 희미하게 웃는 그에게 물었다·
“왜? 불안해요?”
“아니··· 그냥 답답해서 나왔어·”
“들어가요·”
“어·”
형준이 앞장서서 그녀를 이끌고 미리 잡아놓았던 룸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식탁에는 이세명 사장과 그의 아내인 안명자가 앉아 있었다·
안명자는 민희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왔니?”
“안녕하셨어요?”
“그래 앉아·”
민희는 자리에 앉으며 이세명 사장의 얼굴을 살폈다·
자신이 들어왔음에도 눈길 한번 마주치지 않고 계속 불편한 얼굴로 앉아 있는 걸 보니 형준이 답답해하며 밖에 나와 있었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아니 망설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마음을 돌려버린 게 아닐까 할 정도로 보였다·
안명자는 남편의 얼굴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는 말했다·
“저기요 표정 좀 풀지 그래요?”
“크흠···”
이세명 사장이 헛기침을 하며 여전히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형준이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형준아·”
“네·”
“내가 자초지종 다 들었다· 너 안 됐고 우리 형도 안 됐어· 다 불쌍한 사람들이야· 누구 하나 욕할 거 없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피가 다른 건 사실이고 그럼 그 재산 네 거 아니다·”
“여보!”
안명자가 소리쳤지만 그는 들은 채도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오래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이건 아니야· 당신도 잘 들어· 당신도 따지고 보면 이씨 집안의 남이야·”
“내가 왜 남이야? 호적에 올라와 있는데 왜 내가 남이야!”
“이혼하면 끝인 거지·”
“그럼 나랑 이혼하겠다고?”
“이혼당하기 싫으면 지금 하는 이 짓 그만 멈춰·”
“아니 이 양반이 미쳤나? 어제까지만 해도 마음 바꿨다며? 그래서 이 자리 잡은 거 아니야!”
“내가 잘 못 생각했어· 이건 아니야· 당신 형제 사이 갈라놓지 마·”
민희는 어이가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잘 해결됐다며 오늘 자리를 만들었는데 갑자기 저렇게 나올 줄이야·
자기도 어이가 없는데 형준의 마음이야 오죽할까 싶어 옆을 돌아보니 시커멓게 굳은 표정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민희가 그런 그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그게 힘 내라는 뜻임을 알아서일까?
형준이 작은어머니를 닦달하는 작은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재산 나눠줄 거라고 하신 거 그대로 믿으시는 거죠?”
이세명 사장의 닦달이 멈춰졌다·
형준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아버지가 가진 재산 작은아버지에게 대부분 물려줄지도 몰라요· 그런데 언제요?”
“뭐?”
“언제 물려받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1년 뒤? 아니면 3년 뒤? 그것도 아니면 10년 뒤?”
“···”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가진 지분과 재산 대부분을 작은아버지에게 줄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착각이에요· 돌아가실 때쯤에는 당연히 작은아버지에게 주겠지만 잘 살아있는데··· 아직 누릴 것도 많고 만날 여자도 쌔고 쌨는데 그걸 작은아버지에게 주겠어요?”
이세명 사장은 그래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너만 사라지면 우리 가문은 문제될 게 없어· 재산은 절반으로 공평하게 나누어질 테고 회사는 다시 안정을 찾을 거다· 너만 사라지면 돼· 대신 너 먹고 살 만한 자리는 내가 마련해보마·”
“고마운데요 작은아버지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아요·”
“무슨 착각?”
“신영금융지주 사외이사 열 명 중에 제 손이 닿은 사람이 다섯 명입니다· 은행 직원들 중에서도 상당수는 절 따르고 있어요· 제가 나가면 그냥 나가겠습니까?”
“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사실 직시를 하시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작은아버지는 지금 이 상황이 그저 남의 집 불구경 보듯 하시는데 이거 남의 집 문제가 아닙니다·”
형준의 말에 처음에는 조금 당황헀던 안명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분노로 입을 꾹 다물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에게 민희가 말했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니까 사장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세명 사장님 형준 씨가 했던 말 적어도 이세준 부회장님이 형준 씨가 퇴사한 다음에 모든 재산을 다 줄 거라는 말은 믿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네가 뭘 안다고?”
“적어도 한 가지는 알 것 같습니다· 이세준 부회장님의 마음이요·”
“허··· 네 까짓게 우리 형 마음을 어떻게 알아?”
“전 알 것 같은데요? 내 피가 섞이지도 않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싫어서 시작한 싸움에 동생이 말려들었어요· 동생은 형의 재산을 탐내지 않겠다고 하지만 우연찮게 장례식장에서 동생의 아내가 자신에게 대놓고 시아버지 상속 재산을 일부라도 물려받겠다고 소송을 한다고 해요·
당연히 형은 머리가 아파와요·”
“···”
“동생이 혹시 아내에게 설득당하지는 않았을까? 만약 피가 섞이지 않은 자식과 손을 잡고 날 몰아내는 건 아닐까?”
“흥! 제법 소설을 쓰고 있다만 형님과 나 사이를 이간질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얄팍하다·”
“이간질이라뇨? 전 이세준 부회장님의 마음이 이럴 거라는 걸 말씀드린 거예요· 만약 제가 이세준 부회장님이었다면 충분히 동생을 의심할 것 같거든요· 혹시나··· 내가 준 재산을 가지고 날 위협하려고 하지는 않을까? 하는···”
민희는 말을 끊고 이세명 사장의 얼굴을 살폈다·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는 분명 그가 내심 갈등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여기서 더 몰아붙여봐야 먹히지도 않을 거라는 생각에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혹시라도 제 말이 믿기지가 않으면 언제고 한번 여쭤보세요·”
“뭘?”
“이세준 부회장님께 날짜를 딱 지정해서 양도해줄 수 있겠냐구요· 그 전까지 우리 형준 씨가 퇴사한다는 가정하에 해당 날짜로 재산을 양도한다고 계약서라도 써준다면 형님을 믿고 형준 씨와 손을 끊겠다구요·”
“그거 좋은 방법이구나· 넌 네 남자를 방금 회사에서 쫓아낸 셈이라는 걸 알아둬라·”
“부회장님의 배포가 그렇게 크시면 형준 씨가 회사를 나오는 게 맞겠죠· 설마 이 정도 능력에 어디 가서 처자식 굶기겠어요?”
형준은 당황했지만 그래도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되자 이세명 사장의 부인 역시 할 말이 없어졌다·
어차피 이세준 부회장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주면 그룹 재산의 절반이 손에 들어오는 격이니 그녀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민희는 그렇게 식사를 마치곤 형준의 손을 잡고 식당을 나왔다·
업무시간에는 맞춰 회사에 들어가야 했기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어서였다·
형준은 민희가 회사로 돌아가는 길까지 바래다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가 정말 그 계약서에 도장이라도 찍어주면 어떡하려고?”
“어떡하긴요? 깔끔하게 포기해야지·”
“진짜?”
“두 형제 사이가 그 정도로 돈독하면 어차피 우리가 무슨 수를 써도 방법이 없어요· 그러면 우리 깔끔하게 포기해요·”
“안 아까워?”
“우리 상무님 회사에 입사했을 때 두 손에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어요· 그런데 회사를 이만큼 키웠어요· 당신도 할 수 있어요· 작게 시작해서 크게 키우면 되지·”
“그것도 재미있겠네· 그럼 그래볼까?”
민희는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것도 좋은데 아직 포기하지 말아요· 모르는 거잖아·”
“우리 아버지가 그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구나?”
“그냥··· 그냥 느낌이 그래요· 당신 아버지는 결정적인 순간에서 주저하고 갈등하거든요· 그게 아니었다면 당신이 친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이미 사태를 정리했었어야죠· 아닌 척하는데 물렀어·”
“그 그래?”
형준은 민희의 저 싱그러운 미소에 괜히 몸이 으스스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맞다·
이건 착각인 게 분명했다·
*
“하하하 그래· 내가 깔끔하게 정리했지·”
이세명 사장이 전화에 대고 으스댔다·
[그래? 형준이가 쉽게 물러났어?]
“당연하지·”
[그 맹랑한 계집애는?]
“형준이랑 결혼한다던 걔? 아주 당돌하더만· 어쨌든 내가 둘 다 깔끔히 해결했어·”
[어떻게 해결했는데?]
“나 형님 믿고 있다· 형제 사이 갈라놓지 마라· 이 사태 마무리되면 형님이 재산 딱 잘라 반 나눠준다고 했다· 이러니까 입을 싹 다물더라고·”
[잘했네 잘했어· 그럼 당연히 나눠줘야지· 내가 전에 말했잖아? 나 이거 욕심 없다· 아버지가 나한테 다 물려주신 거는 나더러 형준이 깔끔하게 정리하라고 힘을 몰아준 것일 뿐이야· 사태 끝나면 이제 나한테 남은 가족이 너밖에 더 있냐? 내가 와이프가 있냐? 자식이 있냐?]
이세명 사장은 다 늙어서 갑자기 외롭게 혼자가 된 형이 안타까워졌다·
“그러니까··· 내가 아니면 형님 속을 누가 알아? 맹랑한 게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나중에는 세상 무너진 것처럼 우울한 얼굴로 나가더라니까? 그 얼굴을 형님이 봤어야 하는데 하하하하! 하여튼 형님은 이제 푹 주무셔· 내가 깔끔하게 마무리했으니까·”
[그래 고생했다·]
“그런데 형님 있잖아···”
[응?]
“나도 우리 마누라 눈치가 있잖아· 알지? 우리 마누라 장례식장에서 길길이 날뛰던 거?”
[그렇지· 나도 제수씨한테 미안했다·]
“우리 마누라 안심시키게 각서 하나만 써줘·”
[각서?]
“별거 아니야· 형준이 내보내고 나서 한 달 뒤에 나한테 아버지 상속 재산 반 딱 잘라서 나눠준다는 내용이면 돼·”
[이행날짜를 적어서?]
“그렇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잠시 핸드폰에 말소리가 끊겼다·
그 찰나의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을 때 다시 이세준 부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행날짜는 좀 그렇고 형준이 내보내면 내가 상속재산 절반 준다고 싸인하고 도장 찍어서 공증까지 해줄게· 걱정하지 마·]
“이행날짜도···”
[너 나 못 믿어? 걱정하지 말라니까··· 나 지금 미팅있으니까 언제 술이나 한잔 하자· 끊는다·]
이세명 사장은 끊어진 핸드폰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 복을 토해내는 여자(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