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을 토해내는 여자(3) >
성북동에서 웅크리고 있던 조치연은 요즘 하루하루가 새로운 나날이었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고 할까?
매일 아침이면 그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뉴스가 하나씩 등장했는데 오늘도 그랬다·
새벽부터 일어나 정원을 걸으며 산책하고 8시경에 아침을 먹는 것이 하루의 시작인데 8시가 되자마자 초인종이 울렸다·
찾아온 이는 놀랍게도 조치연도 익히 잘 아는 세영그룹 송지용 비서실장이었다·
“오랜만에 찾아뵙습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고개 한 번 까딱하지 않고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맞은편 소파에 턱 앉으며 하는 말이 저러니 누가 봐도 그의 인사가 진심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치연은 개의치 않았다·
존댓말로 인사를 한 것만으로도 지금 그의 심사가 무척 뒤틀렸다는 것임을 알고 있으니까·
그는 그런 놈이다·
세영그룹 회장의 사냥개이자 그의 잔혹함을 그대로 배운 놈이기에 그와 얼굴을 마주하는 이는 누구든 긴장해야 마땅했다·
물론 예외는 있는 법이다·
“자네로서는 무척 실망스럽겠지만 평안했네·”
“그럼 계속 평안하시지 왜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고 그러십니까? 그러다가 영감님 평안이 깨질까 두렵군요·”
“원래 내 인생은 잔잔한 적이 없었지· 전쟁통에서 살아남고 유신 시대의 잔혹함도 견뎌낸 나네· 게다가 누구 때문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을 허망하게 보낸 적도 있었지· 그간 내 마음은 사막처럼 황폐했고 태풍처럼 휘몰아쳤는데 자넨 그걸 몰랐나 보군·”
송지용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자연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공경이 사라져 있었다·
“아이고 우리 영감님 남자네 남자· 사막이 어떻고 태풍이 어떻고 하는 걸 보니 사고 한번 제대로 쳐볼라는가 보네요? 영감님 가족 생각하셔야지· 알아보니까 손주도 보셨다는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주 걱정은 안 되시나?”
여유롭던 조치연의 표정도 굳어졌다·
“이런 개 호로잡놈이··· 세상이 바뀐 걸 아직 몰라? 세영그룹 힘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 것 같아? 아직도 깡패짓하고 돌아다녀도 위에서 다 카바 쳐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세영의 개 주제에 어딜 감히····”
“이 양반이 말이면 다 말인 줄 아나···· 영감님 죽고 싶어요?”
“내가 할 말이다 이놈아· 내가 널 가만 놔둘 것 같아?”
송지용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그는 이내 화를 가라앉혔다·
“꿈 한번 야무지시네· 내 마음 같아서는 한바탕 확! 그냥··· 피칠 한번 해주고 싶은데 우리 회장님이 하신 말 때문에 참고 갑니다· 대신 내가 경고 하나만 할게요· 그 장부 세상에 나오면 그땐 영감님 아니라 사랑스러운 영감님 손주 평생 장애인 연금 받고 살게 될 겁니다·”
“저 저런 썩을 놈이····”
“난 할 얘기 다 했으니까 갑니다· 잘 생각하세요· 또 딴 생각하다 호되게 혼나지 마시고··· 응? 크흐흐흐····”
송지용은 조치연을 비웃으며 집을 나갔다·
“저런 개 호로놈이····”
조치연이 화를 못 참고 팔걸이를 때려댈 때 마침 일하는 아줌마가 도착했다·
그녀는 오자마자 조치연에게 말했다·
“아침 차릴까요?”
“됐어· 점심 때 올 테니까 그리 알고····”
조치연은 서둘러 송병창 사장을 부르고는 옷을 챙겨 입고 정성 들여 머리를 빗은 뒤 집을 나섰다·
“이제 사람 좀 두세요· 저도 사장입니다· 언제까지 어르신 보좌하고 돌아다녀요?”
송 사장이 툴툴거리자 조치연이 나무랐다·
“이놈아!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 것 같냐? 내가 이 나이에 누굴 믿고 사람을 들여? 나 죽으면 너도 좋을 테니 잔말 말고 운전이나 해·”
“예 예~ 어디로 모실까요?”
“네 조카사위 있는 곳으로 가자·”
“조카사위요? HS그룹 본사로요?”
“그래·”
“어르신 어르신이 대놓고 HS그룹에 모습을 드러내면 HS그룹 쪽에서 곤란해할 수 있습니다·”
“이놈이····”
“제가 불러낼 테니 밖에서 보시죠·”
“···그렇게 해·”
송병창 사장은 속으로 안도하며 차를 몰았다·
그는 가다가 신호에 걸렸을 때 영훈에게 빠르게 문자를 보냈다·
*
“자네 점을 믿나?”
천보윤 의원의 뜬금없는 질문에 영훈은 순간 움찔했다·
“네? 점이요?”
“몸에 난 점 말고 사주나 신점 같은 거 말일세·”
“아··· 그걸 왜 물으십니까?”
영훈이 조심스럽게 묻자 그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게 참··· 내가 말하기에도 조금 민망해서 말이야· 솔직히 정치하는 사람 중에 아는 점쟁이나 자주 찾는 철학관 하나 없는 사람이 거의 없어·”
“그런가요?”
“국민을 살피고 법을 정하는 사람들치고 너무 속물적이라고 욕하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4년 계약직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렇긴 하죠· 계약직치고는 엄청난 권력을 가지긴 했지만····”
“맞네· 엄청난 권력을 가진 4년 계약직이니 다음 계약이 연장될 것인지에 엄청나게 예민할 수밖에 없네· 그러니 평생 다닌 적 없던 교회도 찾고 절도 찾고 심지어 점도 보는 거지·”
“아····”
영훈은 솔직히 이런 주제가 불편했다·
꼭 자신의 정체를 알면서 괜히 이야기를 빙빙 돌리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표정이 굳어지는데 천보윤 의원은 그게 국회의원에 대한 실망이라고 판단했다·
“국회의원도 사람 아닌가? 자신의 미래가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지· 이해해주게·”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건 왜···?”
“도수연이가 말이야··· 바이오산업 벨트를 하남에서 춘천으로 옮기려고 했다고 했잖아?”
“그랬죠·”
“내가 국토부 3급 공무원을 통해서 알아낸 게 있는데··· 웃지 말게·”
“알겠습니다· 안 웃을 테니까 말해보세요· 뭔데 그럽니까?”
“그 3급 공무원 마누라가 점을 보러 다니는 게 취미인데··· 허··· 뭐 그런 취미가 다 있는지···· 어쨌든 점을 보러 갔다가 그 점쟁이한테 바이오산업 벨트 선정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거야·”
“점쟁이한테서요?”
이쯤 되니 영훈도 점점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래· 하남이 아니라 춘천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는 거지· 3급 공무원 마누라가 그래도 생각이 있어서 자기 남편한테 청탁하려는 줄 알고는 자기 남편은 그런 힘이 없다고 에둘러 거절하려고 했는데 글쎄 그 점쟁이가 뭐라고 했는 줄 아는가?”
“뭐라고 하더랍니까?”
“조만간 국회의원이 힘을 써줄 거라고 말했다는 거야·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바로 도수연한테 국토균형발전을 위해 하남이 아닌 춘천이 돼야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해· 이게 뭐라고 생각하나?”
“하····”
허탈하게 웃음이 나오는 상황에서도 이상하게 그림이 그려졌다·
왜인지 알 것 같았다·
오래전에 ‘정말 스님의 말씀대로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점쟁이가 된다면 어떻게 하게 될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떠올렸던 여러 가지 가정 중 하나가 바로 이거였다·
너무도 익숙한 방법이었다고 할까?
“자네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에요·”
“아니라고?”
“의원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니까요· 누구나 한 가지씩의 트라우마는 가지고 있고 그걸 누군가 건드리면 이해할 수 없는 비논리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도수연 의원의 트라우마를 그 점쟁이가 건드렸다 그 말인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럼 정말 점쟁이 말을 듣고 그걸 움직이려고 한다는 건데···· 훗··· 자네 말이 맞다면 앞으로 도수연이가 다음 선거에 나오는 건 보지 못하겠군·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점쟁이 뒤를 털어볼까? 아는 검찰 하나 움직이는 거야 문제가 아닌데·”
“음··· 제가 먼저 만나보겠습니다·”
“만나보겠다고? 나야 좋은데 자네가 가서 점쟁이랑 무슨 할 말이 있을까?”
“궁금해서요·”
“궁금해?”
“네·”
내가 할지도 몰랐던 짓을 다른 누가 하고 있다는데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자네가 그렇다면야··· 보좌관에게 주소 보내라고 하겠네·”
“감사합니다·”
이때 영훈에게 문자가 날아왔다·
조치연이 흥분해서 당장 자신을 만나겠다고 회사로 오고 있다는 문자였다·
영훈은 호텔로 오라고 답장을 보낸 뒤 천 의원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급하게 만나야 할 사람이 생겼습니다·”
“안 그래도 나도 일어나려고 했네· 나도 바쁜 사람이야·”
“하하 그러시죠·”
“꼭 쫓겨나는 기분이구만·”
천보윤 의원이 툴툴대며 떠나고 난 뒤 얼마 있다가 ‘화옥당’이라는 이름과 주소가 문자로 찍혀왔다·
화옥당····
이상하게 연화당이 떠오르는 이름이다·
문득 조치연이 ‘화옥당을 알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호텔 스위트룸에 앉아 생각을 거듭하고 있을 때 벌컥 문을 열고 조치연이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송 사장이 허겁지겁 들어와서는 조치연에게 잔소리를 했다·
“어르신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그러세요? 무릎도 안 좋으신 양반이····”
“됐다· 무슨 사내놈이 그렇게 잔소리가 많아? 여기 먹을거리 있으니까 저기 가서 과자나 입에 물고 있어라·”
“제가 무슨 앱니까? 입에 물려놓고 입 다물게 하게?”
“시끄러· 그리고 넌 팔자 좋구나· 아침부터 이 큰 호텔에서 사람을 맞이하고?”
조치연은 송 사장에게 역정을 내곤 소파에 편히 앉아 미소를 짓고 있는 영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빈방이었습니다· 오늘 예약도 없다고 해서요· 빈방 놀리면 뭐 합니까? 이렇게라도 쓰면 좋지· 그런데 아침 댓바람부터 왜 그렇게 급하게 절 찾으셨어요?”
“세영에서 움직였다· 날 협박하더구나·”
“그럴 줄 알고 계셨잖아요?”
“알고 있었지· 그런데 조금의 곤란함도 보이지 않았다·”
“곤란하지 않았다면 사람을 보내지도 않지 않았을까요?”
“아니 사람을 보낸 건 그저 형식적인 경고다· 그런데 그 위협에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어· 놈들은 아직도 내가 그 장부를 검찰에 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요?”
“·······”
잠시 망설이던 조치연은 진짜 과자를 입에 물고 있는 송병창 사장에게 말했다·
“긴하게 대화할 게 있으니까 잠깐 나가 있어라·”
“저한테도 비밀입니까?”
“알아서 좋을 게 없다· 편하게 놀고 돈이나 벌려면 그냥 모르고 있는 게 나아·”
“우리 조카사위한테 문제 있을 건 없죠?”
“에끼! 이놈아! 너보다 수십 배 똑똑한 녀석이다· 누굴 걱정해?”
“아휴 알았어요· 나갑니다·”
송병창 사장이 나가자마자 조치연이 급히 물었다·
“어찌할 생각이냐?”
“진짜 장부를 낼 자신 있습니까?”
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있다·”
“아는 검사는요?”
“있지만 하나하나 세영의 손에 닿지 않은 검사는 없다· 그것보다 넌 어찌할 생각이냐고 물었지 않냐?”
“···영감님이 장부를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면 모르겠는데 장부를 포기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한 가지 확실한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그게 뭔데?”
“검찰에게 수사하도록 맡기는 방법이죠·”
조치연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내가 한 이야기를 어디로 들은 게야!”
“검찰이 썩었다고 하지만 어디 모든 검사가 다 그렇겠습니까? 조직의 눈치를 보느라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든 자들도 있겠죠· 나서봐야 배신자 소리나 듣고 제대로 된 결과도 못 내놓을 걸 아니까 참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놈들에게 이 사건을 맡기자고? 그럼 또 눈치 안 볼 것 같으냐?”
역정을 내는 조치연을 향해 영훈이 미소지었다·
“아니요·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그럼?”
“세영이 그렇게 힘이 대단하다면 어디 약자만 건드렸을까요· 분명 검찰 내부의 인사들에게도 종종 힘으로 억압하려고 했을 겁니다· 거기에 반발한 검사도 있겠고 불이익을 받은 검사도 있겠죠·”
그제야 조치연의 안색이 밝아졌다·
“세영에게 악감정을 품은 검사에게 접근하라는 말이구나?”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그럼?”
“지금 말씀드리긴 그렇고 일단 세영에게 악감정을 품은 검사들이 있는지 한번 알아봐 주세요· 그다음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때까지 세영 쪽은 자극하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크흠··· 알았다·”
“그건 그렇고 혹시 화옥당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화옥당?”
“네·”
“화옥당··· 화옥당··· 혹시 화옥신녀 말하는 게냐?”
영훈은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아십니까?”
“알지· 네··· 아니다· 연화신녀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제자 하나를 나중에 화옥신녀라고 불렀다는 소리를 듣긴 했다·”
“직접 보지는 않으셨고요?”
“화옥신녀가 이름을 날릴 땐 난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그의 딸이 죽은 뒤였으니 점쟁이를 만날 정신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그렇군요·”
“왜?”
“아닙니다· 그냥 어떻게 알게 돼서요·”
“만날 게냐?”
“궁금하십니까?”
“그야 궁금하지· 화옥신녀라는 계집이 널 보며 무슨 말을 할지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누?”
< 복을 토해내는 여자(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