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을 토해내는 여자(5) >
임복희는 당장 예약 손님들을 뒤로 미뤘다·
이 기분에 손님을 받아 남의 운명에 대해 어쩌고저쩌고 훈수를 둘 수는 없었다·
당장 내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남의 인생이 문제란 말인가?
신당에 앉아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어느 순간 튕기듯 몸을 일으키고 밖의 제자에게 소리쳤다·
“차에 시동 걸어! 나갈 테니까·”
“예!”
그녀는 얼른 옷을 갈아입고 뛰어나가 차에 올라타곤 전화를 걸었다·
“오라버니!”
[어이쿠 귀청 떨어지겠어! 이건 어떻게 나이를 먹어도 진득할 줄을 몰라·]
“내가 지금 오라버니 잔소리 듣고 있을 정신이 아니에요· 지금 어디 있어요? 나 지금 차 탔어요· 집이에요?”
[아닌데?]
“그럼 어딘데요?”
[크흠··· 지금 당장 오려고? 다음에····]
“내가 지금 그럴 정신이 없다니까!”
임복희가 빽 소리 지르자 결국 명우도사도 마지못해 승낙했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문자 보내줄 테니까 지하주차장에 도착해서 전화해· 내려갈 테니까·]
“알았어요·”
잠시 후 그녀의 핸드폰으로 도착한 문자에는 강남의 한 오피스텔 주소가 적혀 있었다·
멀쩡히 아파트 구해서 잘살고 있는 양반이 왜 갑자기 오피스텔 주소를 찍어주나 궁금했지만 이내 도착하면 알 거라 생각하고 초조한 가슴을 애써 억눌렀다·
40여 분 가까이 운전한 차가 강남역 인근의 한 대형 오피스텔에 도착했고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걸었다·
명우도사는 전화를 받은 후 20분 정도를 기다렸다가 문자에 찍어준 호실로 올라오라는 말을 남겼고 그녀는 그대로 차에 탄 채 초조하게 20여 분을 기다려야 했다·
정확히 시간에 맞춰 올라간 호실의 문 앞에는 놀랍게도 ‘명우도사 사주아카데미’라는 황당한 명패가 붙여져 있었다·
“오라버니 밖에 저거 뭐예요?”
그녀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다짜고짜 물었다·
명우도사는 민망한지 시선을 슬그머니 돌리며 말했다·
“점쟁이 짓 정리하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놀아? 집만 있으면 뭐해? 먹고 살아야지· 결혼도 해야 하고····”
“결혼할 여자는 생겼고? 그 결혼업체 통해서 여자 만난 거예요?”
“흐흐··· 그게 말이야· 일단 앉아 봐· 커피 할래?”
“됐어요·”
명우도사는 실실 웃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네가 소개해 준 업자가 몇 번 스케줄을 잡아줘서 다녀오기는 했잖냐·”
“그랬지· 그런데 다 차였다면서요? 나이가 너무 많다고·”
“내 마음에 안 든 적도 많았다· 내용을 너무 곡해하고 있다·”
“뭐 어쨌든 그래서요?”
“그래서 헛헛한 마음 달랠 길 없어서 해외여행이라도 해보려고 여러 군데 돌았는데 글쎄 내 짝을 모로코에서 만날 줄 어떻게 알았겠냐?”
“모로코? 그건 어디 붙어있는 나라예요?”
“어디 붙어있는지가 뭐가 중요해? 어쨌든 나 다음 주에 또 모로코 나간다· 거기서 결혼식 올리고 여기로 데리고 올 거야· 여기서 같이 살기로 했다·”
“신부가 몇 살인데요?”
“스물일곱·”
“허··· 도둑놈도 이런 도둑놈이····”
“내가 꼬신 적 없다· 그냥 서로의 마음이 맞았을 뿐이야· 내 선비적인 자태를 보고 반했다고 하더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안 되면? 내가 억지로 데려오기라도 한다더냐? 물론 내가 돈 있는 티를 좀 내긴 했지·”
그제야 그녀도 인상을 찌푸리며 그나마 이해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오라버니 얼굴에 돈이라도 없으면 그게 선비예요? 거지지·”
“너 말이 심하다? 크흠··· 그래서 왜 그렇게 날 찾은 거야? 빨리 말해라· 30분 뒤에 수업 있어·”
“오라버니 수업을 듣겠다는 사람이 있어요?”
“왜 없어?”
“이 바닥에서야 오라버니 이름이 유명하지만 일반인들이 오라버니 실력을 어찌 알고 몰려온대요?”
“요즘 일찍 퇴직한 사람이 많잖아· 그래서 이것도 노후를 위한 기술을 배운다고 생각하는 거지· 사주 한번 배워두면 쏠쏠하게 돈 벌 수 있으니까·”
“말 되네· 그래서 돈은 좀 벌고?”
“솔직히 내가 점 봐줄 때만큼은 안 되지만 그래도 품위유지 할 만큼은 들어온다· 평온한 운명 억지로 뒤흔들 필요도 없고 위험한 운명 억지로 좋은 말해줄 필요도 없으니까· 있는 그대로 말해준다는 게 이렇게 마음 편할 줄 몰랐다·”
확실히 명우도사는 작년에 비해 얼굴이 많이 평온해 보이기는 했다·
그 모습이 괜히 쓰린 그녀는 툴툴거리며 말했다·
“잘났어 정말····”
“그런데 넌 왜 그렇게 죽상이야? 또 사고 쳤어?”
“내가 무슨 애예요? 사고나 치고 다니게?”
“너 사고 많이 치잖아· 차라리 애라면 사고 쳐봤자 물건을 깨뜨리거나 엎어져 자빠지는 정도라서 그러려니 하지만 어른이 사고 치면 수억을 날려버리니 더 걱정스럽지·”
“흥····”
“그래서 무슨 일인데?”
임복희는 잠시 입술을 우물거렸다·
사실 그녀가 지금까지 명우도사의 헛소리를 들어준 것도 정말 관심이 있어서 들어준 게 아니라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고민하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한참 고민하던 그녀는 급기야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오라버니 나 오늘 누구 봤는지 알아요?”
“누굴 봤는데·”
“언니 아들··· 명자 언니 아들이 찾아왔어요·”
명우도사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누가 찾아와? 영훈이가 널 찾아갔어?”
눈물을 쏟을 기색인 그녀가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영훈이? 오라버니는 알고 있었어요? 명자 언니 아들이랑 구면이었어요?”
“그래 예전에 날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요!”
“내가 너한테 왜 그 얘길 해야 하는데? 영훈이 내 아들이다· 내 아들 이야기를 왜 너한테 해야 해?”
“그 그거야····”
“명자 죽은 거 네 탓 아니다 내 탓이지· 마누라 아픈 줄도 모르고 그렇게 내돌렸으니 그게 어디 제자 탓이냐?”
“·······”
그녀는 대답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서 영훈이가 뭐라고 하더냐?”
“나더러 마음이 좁아서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한대요·”
“잘 봤구나·”
“오라버니!”
“그리고 또?”
“코로 벌어서 입으로 나오는 상이래요· 명자 언니가 내 신내림굿을 늦게 해준 이유도 그걸 봐서 그랬을 거라고 하는데 오라버니가 보기에도 그래요?”
명우도사는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명자가 널 처음 봤을 때부터 그리 얘기했었다· 그런데 신이 들어온 이상 어쩔 수 없었지· 결국 시기의 문제일 뿐이라는 걸 명자도 죽을 때가 돼서야 받아들였다·”
“어차피 할 수밖에 없는 걸 왜 그리 늦게 해줬대요? 방법이 없는데·”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었다· 넌 점쟁이가 되면 안 된다고 했었어· 결국 방법을 못 찾은 것뿐이었지·”
임복희는 주먹을 쥐고 눈물을 흘렸다·
“거짓부렁··· 거짓부렁 하지 말아요· 방법을 찾기는 무슨 방법을 찾아요?”
“됐다· 지난 이야기는 해서 뭐해? 너도 죽은 사람 원망 그만해라· 흘러간 강물 때려봐야 네 손만 아프지·”
“흥! 생불이 여기 계셨네·”
“그게 끝이냐?”
“나더러 얼마 남지 않았대요·”
“응?”
“나더러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자신의 미간을 가리켰어요· 그거 내 미간에 뭔가 보인 거죠?”
명우도사는 화들짝 놀라 임복희의 미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로서는 아무리 지켜봐도 별다른 게 보이지 않았다·
굳이 흠집을 찾아보자면 조금 거무스름한 빛이 돈다는 것?
이 정도로는 상에 변화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이가 그렇게 말했다고?”
“네· 그렇게 말했어요·”
명우도사는 허탈하게 등을 의자에 기댔다·
“그럼 맞겠네·”
“오라버니가 보기에는 어떤데요? 보이는 게 없죠?”
“내 눈에는 보이는 게 없다·”
“그럼 괜찮은 거 아니에요?”
“너도 알잖아? 내가 못 보는 걸 명자는 꿰뚫어 보곤 했다· 인당은 사람의 운명을 보는 척도야· 괜히 명궁(命宮)이라 불리는 게 아니지· 이건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영으로 보는 거다· 내 영력이 그 정도였다면 그 당시 명자에게 그렇게 집착하지는 않았겠지· 흠··· 그 아이는 명자의 영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런데 임복희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어요· 오라버니가 못 보는 거면 됐어요·”
“무시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제까짓 게··· 신내림굿도 안 받은 놈이 뭘 알아요? 신력이 괜히 신력이에요?”
“그건 그렇다만····”
사실 명우도사 역시 영훈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임복희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신내림굿이 왜 신내림굿인가?
왜 사람들이 신점을 찾는가?
신도 받지 않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영훈이 신을 받았을 리 없으니 그녀의 말이 아주 잘못됐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단지 영훈의 능력을 알고 있기에 이번만큼은 그녀의 의견에 따라줄 수 없을 뿐이다·
“난 오라버니의 의견을 듣고자 온 거예요· 오라버니가 괜찮다고 하니 됐어요· 신내림굿도 안 받은 풋내기 따위의 협박에 내가 흔들릴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라고요·”
“후··· 이것아·”
“됐어요· 난 이만 갈게요· 경치 좋고 위치 좋으니 학원 잘 되겠어요· 제자 시켜서 화분 하나 갖다 놓으라고 할게요·”
그녀는 더 이상 명우도사의 잔소리를 듣기 싫다는 듯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운명이구나··· 운명이었어····”
명우도사는 허탈하게 웃었다·
명자가 했던 이야기가 이제 와서 이해가 됐다·
하지만 이제는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
이세준 부회장은 화들짝 놀랐다·
“다시 말해봐·”
“이세명 사장이 이형준 상무와 손을 잡고 부회장님을 몰아내기로····”
“끝까지 말해!”
“서로 간에 각서를 쓰고 공증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세명 사장이 법무법인 정명에 상속재산 청구 소송을 맡겼다고 합니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고작 며칠 전만 해도 동생이 모든 게 다 마무리됐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뻥뻥 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씨발 차 대기 시켜·”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비서실장은 얼른 부회장실을 나가며 수행기사에게 부회장님이 곧 내려가시고 도착지는 아마도 신영손해보험 사옥이 될 거라 말해주었다·
신영손해보험 사옥은 그룹 본사가 위치한 을지로와는 달리 강남 테헤란로에 위치해 있었다·
을지로에서 강남까지 오는 내내 수행기사와 비서실장은 가시방석을 깔고 앉은 것처럼 불안한 마음이었다·
혼잣말로 연신 욕설을 내뱉는 부회장을 뒤에 태우고 차까지 막히니 그 갑갑함이란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니까·
그렇게 어렵사리 신영손해보험 사옥에 도착한 이후 비서실장은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이미 신영손해보험에 부회장이 가고 있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임원도 얼굴을 내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빌딩에 서늘한 기운이 도는 건 에어컨 바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세준 부회장은 마치 전투를 앞둔 병사처럼 굳은 표정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움직였다·
다행히 이세준 부회장을 알아보는 직원이 있어 황급히 엘리베이터를 잡아주는 모습까지 없었다면 분위기는 더 악화됐으리라·
그렇게 사장실까지 직행한 이세준 부회장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왔어? 앉아·”
이세명 사장은 콧김을 씩씩 뿜으며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형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차까지 미리 준비해 놓은 걸 보면서 이세준 부회장은 속이 더 뒤집힐 것 같았지만 겨우 참고 자리에 앉았다·
상석에 앉은 이세명 사장이 침중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미안해·”
“배신 한번 기가 차게 때리는구나·”
“그래 배신이지· 그런데 그거 알아? 형이 내 제안을 그렇게 거절하지 않았다면 형준이가 그 어떤 혀에 발린 말을 해도 넘어가지 않았을 거라는 거·”
“이 새끼··· 야 내가 이행날짜 안 적어준 것 때문에 그래? 인마 내가 그거 안 줄 사람이야?”
“안 줄 사람 아니라는 거 알지· 그런데 언제? 나 다 늙어 힘쓰지도 못하고 마누라만 살판나서 온갖 명품 몸에 칭칭 두르고 다닐 때? 자식새끼들만 좋아서 난 손에 쥐어보지도 못한 돈 흥청망청 쓰고 다닐 때?”
“·······”
이세준 부회장은 그제야 너무 자기 기준으로만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다 죽을 때가 돼서 억만장자가 되면 뭐할까?
제아무리 많은 재산이라도 쓸 수 있을 때여야만 가치가 있다는 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마누라가 날 들들 볶아· 자식들도 날 야심 하나 없고 배짱 하나 없는 루저 취급한다고· 그런데도 형 믿고 가려 했는데 형은 오로지 형만 생각했지·”
“이행날짜 적어줄게· 언제로 해줄까? 형준이 회사에서 내쫓고 한 달 뒤로 할까?”
“이미 늦었어·”
“인마!”
“늦었다고!”
이세명 사장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는 울분을 토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 번쯤은 날 생각해도 되는 거잖아! 평생 형 위주로 살아왔으면 한 번쯤은 내 생각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는 거잖아! 이제 늦었어· 이제··· 형하고 나는 남인 거야· 올 오어 낫띵(all or nothing)· 난 이 판에 올인했어· 형은 어때?”
이세준 부회장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 선택 후회하게 될 거다·”
< 복을 토해내는 여자(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