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집이나 저 집이나···(2) >
우명건설 김창훈 상무는 비서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HS물산 최영훈 상무? 언제?”
“이번 주 금요일 저녁이 어떠신지 물어봅니다·”
“이번 주 금요일이면 내일이잖아? 뭐지? 불안하게···· 알았어 그때 보자고 해·”
“하지만 금요일 저녁은 브랜드 사업팀 회식이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법인카드 주면 되는 거 아니야? 나 있으면 괜히 불편해하겠지· 난 회식 빠진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약속 컨펌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윤희찬 부장 불러와·”
“알겠습니다·”
비서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희찬 부장이 상무실에 들어왔다·
그는 마치 자신의 집처럼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아주 독을 품었다·”
“뭐가?”
“뭐긴 네 형이지· 어제부로 우리회사 지분 1% 추가 획득했다고 하더라· 아니 무슨 돈이 그렇게 계속 생기냐? 누가 네 형한테 자꾸 용돈 주냐?”
“설마 아버지가 주시는 걸까?”
“농담이지 인마···· 그런데 어디서 돈이 그렇게 생기지? 네 형 여자친구가 끌어왔나?”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벌써 남자친구 그룹 물려받으라고 돈을 대준다고? 그것도 형 명의로? 세금은 어떻게 처리하고?”
“그렇지? 도대체 알 수가 없네··· 뭔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말이야·”
곰곰이 고민하던 윤 부장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그런데 나 왜 찾은 거야?”
“HS물산 최영훈 상무가 갑자기 날 불렀어·”
“최 상무? 왜? 지금 인도에 무슨 문제 있나?”
“문제없지· 너도 알잖아?”
“알지· 내가 최 상무 때문에 매일 보고받고 있는데··· 총리 쪽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어· 다음 프로젝트도 HS건설로 밀어줄 분위기야· 토지매입으로 그쪽에 들어가는 돈이 많으니까 계속 한국 기업으로 진행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이 돈다고 하던데· 그럼 HS건설은 노 난 거지· 그냥
얼굴 보자는 게 아닐까?”
창훈은 입술을 삐쭉이며 희찬의 맞은편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그럴 리가···· 지금까지 일적인 연락 아니면 문자 한 통 안 보내던 사람이 얼굴 한번 보자고 사람을 부르겠어? 그것도 당장 내일 보자는데?”
“내일? 그럼 뭔가 이슈가 있다는 거네?”
“그러니까·”
“됐어· 고민해봐야 뭐해· 너··· 최 상무가 너에 대해 알고 난 뒤부터 너무 조심스러워졌어·”
“그런가?”
“솔직히 쫄리는 건 맞긴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기죽어 있을 필요 없잖아· 만나보면 답 나오겠지· 그건 그렇고 우명솔라 매출이 눈에 띄게 줄고 있어· 지금이 기회인 거 알지?”
“흠····”
“네 형이 사재 털어서 우명건설 주식을 끌어모으는 이유가 뭐겠어? 자기 자리가 불안해지고 있는 거야· 어쩌면 최 상무가 널 부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일 수 있어·”
“그럴까?”
“최 상무는 계산이 철저한 사람이야· 원하는 게 있으면 그만한 대가를 주고 우리가 원하는 게 있으면 그에 맞는 대가를 원해· 사실 이것보다 더 좋은 거래 상대는 없는 거야·”
“그거야 그렇지·”
“최 상무를 최대한 이용해서 이번 기회에 네 형 꺾어 보자·”
누가 이 상황을 본다면 참으로 기묘하다고 생각할 게 틀림없었다·
창훈은 그룹의 차남이고 직위상으로도 상무가 분명하지만 대화의 주도권은 희찬이 쥐고 있었다·
게다가 희찬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열망은 과연 창훈의 형을 꺾는 걸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이 창훈인지 희찬인지 헷갈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
이세준 부회장이 신영손해보험에 가서 망신을 당한 일은 전 계열사에 퍼져 나갔다·
이세명 사장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룹 최고위 인사가 갔는데도 신영손보 임직원 누구도 나와보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다른 계열사 임직원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군대로 따지면 참모총장이 모 사단에 방문했는데 사단장이 있는 곳까지 가는 내내 간부 하나 코빼기 하나 내비치지 않은 상황이라고 할까?
신영손보 로비에서 벌게진 얼굴로 애써 화를 내리누르던 모습이었다는 목격담이 사내 인트라넷에 퍼졌고 사측에서 해당 내용을 삭제하자 외부 대기업 직원 익명 게시판에까지 퍼지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일촉즉발의 상황·
영업이익이 1조를 넘어서도 박스권을 오가던 주가는 52주 전고점을 돌파하며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이야기 들었지?”
“네·”
이세명 사장은 담배를 쭈욱 빨아들이고 연기를 내뿜었다·
회한이 가득 찬 눈빛·
형준은 가만히 재떨이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재떨이에 담배를 털어내고는 말했다·
“형이 어릴 때부터 너 싫어하는 거 알고 있었다·”
“네?”
“따지고 보면 너뿐만이 아니라 네 동생들도 다 싫어했지· 처음에는 그냥 아이를 싫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말도 안 듣고 제멋대로인 아이들을 싫어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 그런데 네가 고등학교 대학교를 가서도 너와 네 동생들을 여전히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왜 몰라? 이십 년을 넘게 붙어살았는데···· 눈빛만 보고도 안다고 하면 과장이지만 형에게서 풍기는 불쾌한 감정을 못 읽을 정도는 아니다· 형수와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말로 다 못할 혐오감을 담고 있었어· 그걸 보면서 이유가 있겠구나 싶었지만 입으로 내뱉은 적은 없었다· 아
무려면 어떠냐? 내 일도 아니고 따로 가정을 만들어 살면 남이나 다름없잖아· 안 그래?”
“그렇죠·”
“나라고 신영손보 하나 맡아서 키우는 걸로 만족했을 리가 있겠어·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오로지 형이 우선이었다· 사실 형이 똑똑하긴 했지· 하필 말이야 우리 아버지하고 라이벌인 분이 계셨는데 그분 아들도 공부를 꽤 했단 말이야· 그러니 우리 아버지가 형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나·
우리 아버지가 그래서 너도 좋아했던 거야· 아버지는 잘난 자식을 좋아하거든·”
잘난 자식을 좋아한다는 말·
이세명 사장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태도 속에 깊은 아픔이 숨어 있음을 형준은 알았다·
그는 다시 담배를 빨아들이고 길게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네 작은어머니 있잖니·”
“네·”
“장례식장에서 그 난리를 떨고 와서는··· 훗··· 날 아주 쥐 잡듯 잡아댔다· 상상이 돼?”
“작은어머님이 좀 드세긴 하시죠·”
“대학교 때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다·”
“그래요?”
“미술을 하던 여자였는데 어찌나 곱고 여리던지 바람만 불면 날아갈까 한다는 표현이 딱 맞는 여자였다· 말도 착하고 고운 말만 쓰던 그 여자랑 처음으로 결혼이라는 걸 상상했었지· 그런데 못 했어· 그 여자와 결혼하면 형보다 나을 게 전혀 없다는 걸 알았거든· 누구의 강요도 없이 그녀
와 헤어지고 나서 당시 서울에 큰 부동산을 몇 개 가지고 있던 집안의 여자와 결혼했다· 네 작은어머니지·”
“그래도 잘 하신 거 아닙니까? 작은어머니 재산이 상당하신데····”
“그래 보이냐?”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마누라가 가진 그 많은 재산 때문에 집에서도 위신이 땅에 떨어진 채 살았다· 가장인데 밖에서 일해서 돈을 버는 가장보다 집에서 애를 돌보는 마누라가 가진 재산이 더 많아· 그럼 내 말이 아이들에게 먹히겠냐? 후····”
“작은아버지 탓이 아닙니다·”
“아니 결혼을 잘못한 거야· 애초부터 난 아버지 눈에 들지도 못했는데 조금 더 힘을 가져보겠다고 이 결혼을 했으니 내 탓이지·”
“그래도 지금은 온 집안사람이 전부 작은아버지에게 파이팅을 보내고 있는 거 아닙니까?”
형준이 분위기를 올려 보고자 농담 비스무레하게 던졌다·
그런데 이세명 사장의 눈빛이 더욱 가라앉았다·
“형준아·”
“네?”
“너 내가 왜 너랑 손잡은 줄 알아?”
단순히 생각하면 재산을 차지하고 싶어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번뜩이는 그의 눈빛을 보자 형준은 단순히 그 이유가 아님을 알았다·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라는 말씀이신 거죠? 잘 모르겠습니다·”
“돈 때문에 그럴 거였다면 애초부터 그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하지 않았을 거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양쪽 사이에서 박쥐처럼 왔다 갔다 채신머리없이····”
“그럼요?”
“네 여자친구가 그랬지? 형이 날 믿지 못할 거라고· 난 그걸 믿을 수 없었다· 집에서는 호구 취급당해도 형만은 날 믿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이행날짜 적어주기만 하면 날짜 좀 미뤄지는 건 상관없었어· 그저 남들 앞에 내 이름 석 자 당당하게 보여주고 가족 앞에서 위신 한번 세워주기만
을 바랐다·”
“·······”
“내가 너랑 손잡은 이유 이제 나한텐 정말 남은 게 돈밖에 없어져서다· 이제 돈이 아니면 내가 설 자리가 없어· 그리고 내가 너와 이 회사를 나눠 가지기 직전에··· 쾅! 하고 찍을 거다·”
“뭘···?”
“도장· 이혼할 거라고·”
형준은 순간적으로 작은아버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이해했다·
“복수하고 싶으신 겁니까? 작은어머니에게요?”
“흥! 내가 신영의 절반을 가지기 직전에 이혼하자고 하면 네 작은어머니가 어찌 나올 것 같으냐? 흐흐흐··· 바짓가랑이라도 잡으며 절대 못 헤어진다고 하겠지 크크큭···· 그런데 난 미련 없이 헤어질 거다· 신영의 절반이 딱 내 앞으로 오기 직전에 이혼서류에 도장 쾅! 새길 거다· 하하
하!”
이세명 사장은 무릎 꿇고 빌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시원하게 웃어댔다·
그 이혼이 생각만큼 쉽게 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쨌건 형준은 작은아버지의 생생한 꿈을 가지고 초 치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진정 원하는 건 이혼 자체가 아니라 이혼이라는 협박을 통해 고통스러워하는 작은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금요일 저녁 강남의 한 유명 고깃집·
주변이 완전히 방음이 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히 칸이 나뉘어져 있어 일부러 고개를 쏙 내밀고 쳐다보지 않으면 안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기 힘든 곳이었다·
영훈은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는 윤희찬 부장을 슬쩍 바라보다가 물었다·
“두 분은 항상 같이 다니시네요? 영혼의 단짝 같습니다·”
“하하 제가 이 친구 없으면 불안해서 그래요· 저보다 머리가 좋으니까· 특히 최 상무님처럼 머리 좋은 분 앞에 저 혼자 나가면 불안해서 어쩝니까? 둘이 하나다 생각하시고 마음 편히 많이 드십시오· 그런데 무슨 일로···?”
영훈은 잘 익은 등심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음미하다가 말했다·
“아버님께서 요즘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영훈의 밑도 끝도 없는 물음에 창훈은 순간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갸우뚱했고 윤 부장이 대신 나섰다·
“정확히 어떤 말씀을 하시는 건지···?”
“원하는 기업이 있는 건지 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김창훈 상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사장단 회의에서도 M&A에 관련된 이야기는 없었고요· 사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그렇지만 작년에 현진중공업 때문에 적지 않은 손실을 보고 그 이후부터 M&A에 관련된 이야기는 회의에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죠?”
“상무님 아버님께서 저희 장모님 옆구리를 콕콕 찌르고 계셔서요·”
최영훈 상무의 장모라면 HS그룹 회장을 말하는 것이리라·
“송은채 회장님을요? 그런데 어디를···?”
창훈이 의문을 표할 때 윤 부장이 물었다·
“혹시 현진중공업 가지고 딜을 하셨습니까?”
“맞아요·”
“아무래도 현진중공업에 묶인 자금이 아까우신 것 같습니다· 당시 자금을 회수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많은 자금이 거기에 묶여 있는데 주가는 회복될 기미가 없고 또····”
“또요?”
“우명솔라의 부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태양광 패널 가격이 아직도 낮은 편인 데다가 대형 프로젝트도 많지 않은 상황이라 그 부실을 그룹 내 자금으로 메꿔야 하는데 그중에서 그게 가장····”
“눈엣가시라 이거죠?”
윤 부장이 머쓱해 하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우명솔라가 김창훈 상무님의 형님 거였나요?”
“그렇습니다·”
“흐음····”
좀 말려보라고 말해보려 했는데 이 집도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당장 돈 쓸 일이 급한데 뭉칫돈이 애먼 데 묶여 있으니 일단 뭐라도 찔러보는 게 아니겠는가·
이때 윤희찬 부장이 또 나섰다·
“상무님 이렇게 해보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네?”
“여기 김창훈 상무님 지금 분위기 좋습니다· 우명건설 실적 좋고 인도에서 따낸 공사로 다음 인사에서 전무 앞두고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언제 우명건설 부사장으로 올라서도 이상하지 않고 올 초 정기인사에서 승진하지 않은 게 오히려 내부에서도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입니다·”
“그래서요?”
“저희 상무님 밀어주십시오·”
윤희찬 부장이 고기를 굽다 말고 일어서서 고개를 꾸벅 숙인다·
< 이 집이나 저 집이나···(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