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집이나 저 집이나···(3) >
“내가 밀어주면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상황인지는 둘째치고 만약 밀어준다고 가정했을 때 뭘 주실 수 있습니까?”
윤희찬 부장은 대답 대신 김창훈 상무를 바라보았다·
“왜 날 봐?”
“제가 말하면 공신력이 있습니까? 상무님이 말씀하셔야 말에 신뢰가 생기죠·”
윤 부장의 말에 창훈이 헛기침을 하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크흠··· 만약 원하는 계열사가 있다면 잘 포장해서 하나 넘겨드리겠습니다· 단 그중에 건설과 태양광은 안 됩니다· 태양광은 그룹의 미래라서요·”
영훈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전에도 이거랑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요?”
“하하하 맞습니다· 그랬죠· 상무님은 필요 없다고 하셨고·”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필요 없습니다·”
원하는 게 없다는 건 받을 것도 없다는 뜻·
당연히 창훈은 점점 속이 타기 시작했다·
윤희찬 부장의 말처럼 지금 기회를 놓치면 언제 이런 기회가 다시 올지 모르니까·
언제고 갑자기 정치적인 이유로 태양광 패널 가격이 급등하게 되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태양광 패널 업체인 우명솔라는 훨훨 날아오를 게 분명했다·
그 전에 아버지에게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고 지주회사인 우명의 지분을 조금이라도 취득해야 한다·
그 정도는 되어야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룹에 대한 최소한의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 있어도 감히 아버지의 허락 없이 지주회사의 지분을 취득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그게 가능하려면 형을 뛰어넘는 능력을 보여줘야 하는데 지금이 딱 적기였다·
“우명그룹 계열사를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시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상무님은 참 어렵네요· 그럼 혹시 계열사 말고 우리의 동맹 관계를 더 격상시키는데 필요한 무언가가 있으십니까?”
우명그룹 계열사 하나가 1년에 벌어들이는 돈이 못해도 수백억을 넘을 것이고 몇몇 알짜들은 수천억을 넘게 벌어들일 거다·
그럼에도 시큰둥한 건 그걸 가져봤자 누구 하나 더 행복해지는 사람이 없다는 데 있었다·
Nodri Clare처럼 성장성이 무궁무진한 기업도 아닐 테고 해주조선해양과 군산조선소처럼 위험에 빠진 기업을 살리는 것도 아닌 데다가 니폰유센처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기업도 아니었다·
이러니 굳이 뭘 더 가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글쎄요·”
영훈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게 최선·
창훈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희찬이 영훈의 앞접시에 잘 익은 고기를 한 점 놔주며 말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분명 고민거리가 있으신데 해결을 못 하고 계신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혹시 우리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윤 부장의 말을 듣자마자 떠올린 건 당연하게도 조치연에 관한 일이었다·
다만 그건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사안이기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데 영훈의 표정이 바뀐 걸 본 윤 부장이 뭔가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연이어 말했다·
“‘법무법인 아시아’라고 아시죠? 거기 대표님이 회장님 장인 되십니다· 연세가 아흔이 넘으셔서 이제는 아들이 실직적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그 정도로 법무법인 아시아랑 우리 우명은 거의 인척관계나 다름없죠· 모든 법적인 문제는 그쪽에서 다 처리해주거든요· 그래서 우명은 다른 그
룹에 비해 법무팀 규모가 작습니다· 굳이 늘려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래요?”
“네·”
“으음····”
이번 건 확실히 구미가 당기긴 했다·
우리나라 법은 가진 자들의 편이라서 돈만 많으면 언제든지 원하는 법무법인을 선정할 수 있지만 그래도 친분이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서였다·
아무 의사나 찾아가도 진찰받을 수 있지만 주치의를 두는 이유가 따로 있겠는가?
다만 그 친분이 한다리 건너야 하는 것이고 그 법무법인의 사람들이 어떤 자들인지 아직 모르기에 쉽사리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창훈이 망설이는 영훈을 보고 말을 보탰다·
“제가 우명의 후계자가 되면 HS그룹이 법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 최대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또····”
영훈은 말을 끊었다·
“잘 알아들었습니다만 먼저 이야기했던 것처럼 제가 김창훈 상무님을 밀어줄 수 있을 지는··· 확신하기 어렵네요· 게다가 그쪽 아버님께서 지금 열심히 딴 생각을 하시는 중이라····”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닌지라 일단 거절하고 보려는 와중 갑자기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하다는 말이 얼핏 들려오고 나서 갑자기 누가 머리 하나를 쑥 들이밀었다·
모르는 남자 얼굴이 들어와 영훈이 미간을 찌푸리는데 김창훈 상무가 놀라서 목소리를 높였다·
“뭐야?”
“죄송합니다 상무님· 사장님께서 찾으셔서····”
“뭐?”
남자는 고개를 빼고 입구 쪽으로 손을 들어 보인다·
이 황당한 광경에 영훈이 물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네 형 수행비서입니다·”
굳어진 창훈의 표정·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남자가 홱 들어온다·
윤희찬 부장은 깜짝 놀라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190에 이를 만큼 커다란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하니 잘생긴 데다가 안경을 쓰고 있어 잘 생김에 지적인 이미지를 더했다·
그는 영훈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이야··· 브랜드 사업팀 회식에도 빠지고 누굴 만나러 갔다기에 여자를 만나나 했었잖아·”
“날 찾았다고? 왜?”
“왜긴··· 형이 오랜만에 동생하고 술이나 한잔 하려고 했지·”
그는 그대로 옆에 앉으며 영훈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김도훈입니다· 우리 창훈이가 윤 부장 데리고 만나시는 분이면 보통 분은 아니실 것 같은데····”
“최영훈입니다·”
“뭐 하는 분이신가요?”
영훈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그럼 그쪽은 뭐 하는 분이십니까?”
순간 도훈의 미간이 꿈틀거렸지만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미안합니다· 우명솔라라는 작은 태양광 업체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식사하셨습니까?”
“아직 안 했습니다·”
“그럼 고기 추가하시죠·”
영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벨을 눌러 점원을 불렀다·
윤 부장은 잽싸게 수저를 세팅했고 창훈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쎄한 기분이 그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형이 자신을 찾았다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아마도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가 회식에 빠졌다는 소리에 자신의 동선을 추적했을 게 분명했다·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마침 우리 직원이 여기 지나가는데 네가 여기 들어가는 걸 봤다더라· 그 직원 아니었으면 몰랐지·”
“보너스 줘야겠네·”
김도훈 사장은 코웃음을 치고는 영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정도 가지고 보너스 주면 건방져져서 안 돼· 그런데 최영훈 씨라면 혹시 HS물산 기조실에 계시다는 분 맞습니까?”
“제가 유명인이라도 된 것 같네요· 모르는 분이 제 이름을 다 아시는 걸 보면····”
“요즘 재계에서 HS그룹이 제일 주목받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 중심에 최영훈 상무가 있다고 잡지에까지 실렸는데 못 보셨나 봐요?”
“제가 잡지 같은 걸 보지 않아서요·”
“옷차림을 보면 굉장히 근사하신데?”
“다 와이프 덕입니다· 제 와이프가 패션 감각이 좀 되거든요·”
“아··· 창훈이가 그렇게 쫓아다녔다던 그··· 임연희? 맞죠?”
창훈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하지만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이상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서로 은연중에 견제하고 있었기는 했지만 남들 앞에서 이런 식의 망신을 줄 만큼 대놓고 견제하는 식의 행동을 한 적은 없었는데····
창훈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뭔가···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형인 김도훈 사장의 심경을 뒤흔든 게 분명했다·
“김창훈 상무님이 결혼 전에 제 아내와 몇 번 만난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쫓아다녔다는 말은 금시초문이군요· 아내도 김창훈 상무와는 좋은 친구 사이였다고 했는데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사람 속을 살살 긁었지만 영훈도 창훈도 별다르게 반응하지 않았다·
“중요한 일이 따로 있었나요?”
“신영의 이형준 상무와 친하시죠?”
생각지도 못한 방향이다·
“그런데요?”
“내 친구가 신영에 대해 좀 잘 아는데 사실 이형준 상무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뭐··· 날라리는 아니라고 해도 좀 많이 노는 친구라고 들었거든요? 나랑도 몇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옛날에는 뭐··· 그랬습니다·”
“·······”
“그런데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갑자기 사람이 달라졌어요· 일도 잘하고 능력도 출중하게 보여주고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지· 그런데 내 친구가 말하길 여기 최영훈 상무님과 이형준 상무가 돈독해진 후부터 그렇게 됐다는 소문이 있다는 거예요·”
영훈은 대답 없이 윤 부장이 앞접시에 덜어놓은 고기만을 입으로 가져갔을 뿐이다·
윤 부장도 김도훈 사장이 떠들든 말든 계속해서 고기를 구워댔다·
도훈은 그런 영훈을 보며 조금 더 굳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어쩌면··· 이형준 상무가 저렇게 바뀐 데에는 최영훈 상무가 뒤에 있지 않을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이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술 안 하세요? 등심은 와인이랑 같이 먹어야 하는데·”
도훈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점원을 불러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그는 점원에게서 뺏듯이 와인 따개를 낚아채고는 능숙하게 와인을 개봉한 후 영훈의 잔에 따라주었다·
그리고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우리 친하게 지냅시다·”
“저야 좋죠·”
“그런데 내 동생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까?”
“인도 이야기였습니다·”
도훈은 과장되게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쳤다·
“아~ 맞아· 그랬지· 인도에서 신공항 건설을 같이 하고 있는 중이었죠? 그럼 혹시 그때 신영하고 HS건설 그리고 우리 우명을 묶었던 컨소시엄 아이디어도 혹시···?”
“그건 김창훈 상무 의견이었습니다·”
창훈이 미미하게 눈으로 감사의 인사를 한다·
도훈은 슬쩍 창훈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랬군요· 내 동생이 가끔 저렇게 번뜩일 때가 있다니까요·”
점원이 추가로 내온 고기가 윤 부장에 의해 구워졌고 도훈은 대충 몇 점을 입으로 가져간 다음 영훈의 눈을 직시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는 거 농담 아닙니다· 우명과 HS가 친해지면 서로 간의 시너지는 대단할 겁니다· 건설 쪽은 내 동생과 이야기하시고 만약 더 큰 그림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그러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여기 고기 맛있긴 한데 다음엔 더 좋은 데로 모시도록 하죠·”
그렇게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190이 넘는 건장한 체격을 하고 있으니 그가 자리에 없는 것만으로도 한결 공간에 여유가 생긴 느낌이다·
“후··· 감사했습니다·”
윤 부장이 슬쩍 바깥을 살피곤 인사한다·
“나갔어?”
“어· 그리고 주변 다 둘러봤는데 의심 갈 만한 사람은 없었어·”
“그래 앉아·”
창훈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이미 그의 심정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영훈은 모르지 않았다·
“우리 이야기를 들은 게 아닌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영훈의 말에도 창훈은 굳어진 얼굴을 바로 하지 못했다·
“경고한 겁니다· 날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정도는 뭐··· 그래도 형이 행동력이 있네요? 따로 만나자고 연락하는 게 보통인데·”
“이 자리에 올 때까지 당신에 대해 모르고 있었을 테니까요· 마침 잘 됐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내 앞에서 일부러 당신에게 호감을 표시한 건 나에게 무력감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도 죽자고 덤비는 상황은 아니지 않습니까?”
“상무님 눈에는 그저 형제간의 가벼운 기싸움 정도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니 뭐····”
솔직히 신영그룹처럼 부자간에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는 상황도 아닌지라 영훈이 봤을 때 아무래도 무게감이 떨어져 보이는 건 당연했다·
이 집이나 저 집이나 집안 꼴이 말이 아니라서 보는 재미는 있다고 할까?
영훈은 살짝 기분이 상해 보이는 창훈에게 물었다·
“중간에 우여곡절이 길었습니다만 어쨌든 아버지에게 현진중공업 일에 손 떼라고 말 못 하시는 거죠?”
“네? 그렇게 직접적으로는····”
“그럼 빠른 시일 내에 회장님과 만날 수 있는 자리 한번 마련해보세요 자연스럽게·”
윤희찬 부장이 빠르게 말을 알아들었다·
“일주일 뒤에 건축의 날 행사가 있습니다· 회장님은 그 동네에 가시면 꼭 들렀다 가는 식당이 있고요·”
“잘됐네요· 혹시 김도훈 사장도 그 자리에 나옵니까?”
“아닙니다· 건축의 날에 우명솔라 사장이 참석하는 게 어울리지는 않으니까요·”
“그럼 그때 회장님을 만나고 나서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창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뭘···?”
“당신을 우명그룹 후계자로 밀어줄지 아니면 신경 끌지 말이에요· 당신 아버지를 보고 결정할 생각입니다·”
< 이 집이나 저 집이나···(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