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티 플레이(1) >
서울 5성급 호텔의 한 스위트룸·
차형석은 거울을 보고 셔츠를 입으며 말했다·
“그 새끼 웃긴 놈이네· 뜬금없이 기자가 아니라니 인턴 따위는 기자도 아니라는 거야 뭐야?”
“그러니까요· 아이~ 짜증 나· 지가 뭔데 인턴 무시해?”
왕가희는 벌거벗은 상태로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린 채 짜증을 부렸다·
“알고 보면 그래요· 꼭 없는 것들이 돈 좀 생기면 없는 사람들 더 무시한다니까? 병신 새끼들···· 상놈이 호적 샀다고 진짜 양반인 줄 알아요·”
“그럼 나도 상놈?”
왕가희가 슬쩍 눈치를 보며 묻자 차형석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상놈까지는 아니지· 양반의 첩도 상놈을 부리는 거 몰라?”
“으음··· 첩?”
“미친년··· 왜? 그럼 너 나랑 결혼하려고 했냐?”
“뭐 그건 아니지만····”
차형석은 그녀를 비웃고는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잘 됐어· 인턴은 기자도 아니라는 놈이면 뒤가 깨끗한 놈일 리가 없지· 아 그런데 널 어떻게 알고 인턴이라고 했지? 우리 쪽 기자 명단을 외우고 있을 리도 없고····”
“본사 사옥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났으니까 혹시 알아보는 사람이 은밀하게 제 정체를 말해줬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씨발 무슨 영화 찍냐? 007이야? 네 얼굴만 조회하면 인사기록이 튀어나오게?”
“그냥 개인적으로 절 알았던 사람일 수도 있고요·”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인상을 쓰고는 욕설을 내뱉었다·
“이 미친년이··· 너 내가 SNS 적당히 하라고 했지? 수영복 입고 지랄 염병하는 사진을 그렇게 올려대니까 너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 거 아니야? 기자란 년이 얼굴로 뜰 생각부터 하고 있어·”
“오빠도 그거 보고 나 불렀잖아요·”
“그건 그거고 이년아· 아이씨 그거 아니면 제대로 개망신 한번 줄 수 있었는데····”
“그럼 이제 어쩌려고요?”
차형석은 대답 대신 묵묵히 넥타이를 맸다·
그냥 넘어갈까 싶다가도 생각을 바꿔 먹었다·
이유는 별다를 게 없었다·
단지 자기가 결혼하려는 한주연보다 더 예쁜 여자와 결혼했으니까·
그것도 상놈 주제에····
그 예쁜 여자와 말 한번 섞어본 건 아니지만 그냥 그게 그의 속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넌 신경 꺼·”
“네····”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떨구는 그녀를 보고 그가 지갑에서 카드 하나를 꺼내 침대로 던졌다·
“이걸로 옷 하나 사 입어·”
“우와! 비싼 거 사도 돼요?”
“적당한 걸로 사· 주제도 모르고 긁고 다니지 말고· 친구들한테도 기분 내던지·”
“고마워요·”
“나 간다·”
그는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힐끔 보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어 난데· HS물산 최영훈 있잖아?”
[요즘 유명한 최영훈 상무 말씀이시죠?]
“그래· 그 인간· 이상하지 않아? 재벌도 아니라면서 어떻게 재벌 외동딸에게 접근해서 결혼했을까?”
[저도 예전에 결혼할 때 궁금해서 알아봤는데 입사 동기라고 합니다·]
“입사 동기가 그 인간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 렇죠?]
“윤 기자도 알다시피 재벌이 어디 일반인이랑 결혼하는 게 쉬워?”
[많이 어려운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많이 어렵지· 그런데 왜 그런 경우 종종 있잖아? 학벌을 속인다든지 재산을 속인다든지 해서 접근해서 결혼한 뒤에 뒤통수 치는··· 알아들어?”
[아~ 예·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영훈 상무는 왜···?]
“그냥 궁금하잖아· 평범한 집에서 자란 평범한 남자가 재벌집 외동딸이랑 결혼한 러브스토리· 사람들도 엄청 궁금해하지 않겠어?”
[맞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저희도 취재하려고 했었는데 쉽지 않아서····]
“왜 쉽지 않았는데?”
[HS그룹 쪽에서 그런 일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혼식도 거의 기사 몇 개 안 나간 수준이고 데스크에서도 해당 커플 이야기는 굳이 쓰려 하지 말라고····]
“에이··· 누가 그딴 실수를 해? 우리가 언제 누구 눈치 보면서 기사 쓰고 그랬어? 어!”
[죄송합니다·]
“윤 기자· 죄송할 짓 만들지 마· 자기도 나 미국에서 오래 봐서 내 성격 어떤지 알잖아· 나 한국 생활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줘야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비록 언론 쪽을 신경 안 쓴다고는 하지만 회사가 안 좋은 방향으로 가는 걸 내가 그냥 두고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그래·”
[그럼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크흠··· 내가 윤 기자한테 뭐라 한 건 아니고 그냥 답답해서 그랬으니까 속으로 내 욕하지 말고·”
[아휴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잘못을 했으면 질책을 받아야 다음에도 이런 실수를 안 하고 더 나아질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래서 윤 기자 좋아해· 우리 미국에서 좋았잖아? 그치? 흐흐흐····”
[그럼요· 그때 정말 행복했습니다·]
“크흠··· 그러니까 한번 알아봐· 혹시 알아? 재밌는 거 하나라도 나올지?”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충성!]
“그래 고생하고!”
그는 전화를 끝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 식당으로 내려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멀리 창가에 그림같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오래 기다렸죠?”
“아니에요· 얼마 안 됐어요·”
한주연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가 얼른 그녀에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앉으세요· 뭘 일어서고 그러세요· 일찍 오려고 했었는데 미팅이 오래 걸려서··· 아니 직원 하나가 너무 황당한 실수를 저질렀지 뭐예요· 그거 처리하느라고 오래 걸렸습니다·”
“바쁘시겠죠· 괜찮아요· 식사는 뭘로···?”
“여기는 점심 특선 코스가 괜찮습니다·”
그는 점원을 불러 요리를 주문하고는 말했다·
“집에서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신다고 하시던가요?”
“너무 잘 됐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요? 진짜 다행이다·”
“어머 당연히 좋아하시죠· 싫어하실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제가 사실 학점이 좋지는 않거든요· 막 노는 성격은 아닌데 공부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어떤 건지 아시죠?”
“하하 알기는 아는데··· 저는 형석 씨가 공부 잘하시는 줄 알았어요·”
“아니에요· 그냥 게임 좋아하고 약간 오타쿠 기질이 있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학점이 낮아서 실망하실까 봐 걱정했거든요· 이미 주연 씨 집에서는 제 뒷조사 다 해보셨을 거 아니에요?”
주연이 깜짝 놀라며 손을 저었다·
“어머 그렇지 않아요· 뒷조사라뇨?”
“주연 씨는 몰라도 이미 어느 정도는 알아봤을 겁니다· 하지만 괜찮다고 하셨다니 학점이 부족한 정도는 용인해주셨나 봅니다·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그를 보며 주연은 더욱 그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라면 부끄러워 먼저 말을 못했을 것 같은데 그는 서슴없이 솔직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볼 때 나중에 결혼해서도 믿음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남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다행이긴 한데··· 정말 뒷조사 같은 건 안 하셨을 거예요·”
“아니라면 다행이구요· 아 이번에 인천공항 면세점 입점 때문에 머리 아프시죠?”
주연이 눈빛을 빛냈다·
“사실 그렇긴 해요·”
“주연 씨 일인데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없죠· 사실 지금까지 인천공항 메인 자리에 위치한 면세점들은 같은 자리에서 벌써 5년 동안 해 먹었잖아요· 이제 바꿀 때 됐어요· 며칠 내로 사설이나 보도 나가면서 문제점을 제기할 테니까 자연스럽게 여론이 움직일 겁니다·”
“고마워요·”
“고맙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차형석은 사람 좋은 눈웃음으로 그녀를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
신영손해보험 사장실·
이세명 사장은 이형준 상무와 마석대 신영은행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한 명이 부족한 거네? 그렇지?”
마석대 은행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정관상에 대표이사 해임은 이사진들의 절반 이상이 동의하면 가능하게 돼 있으니까요·”
“한 명··· 딱 한 명이 문젠데 가능할까?”
형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일단 다섯 명은 확실한데 나머지 다섯 명은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굉장히 두텁습니다· 뒤를 아무리 캐봐도 딱히 약점을 잡을만한 건더기도 없고요·”
“다른 사람은 약점을 잡아서 회유했다는 거네?”
“그건 작은아버지가 굳이 아실 필요가 없으실 겁니다· 알아서 좋을 것도 없고····”
“하긴 그렇긴 하지·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이세명 사장은 형준이 어떻게 절반의 이사진들을 회유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은 크게 없었다·
그걸 알게 되는 순간 만약 형준이 불법적인 일에 관여했다면 같이 엮이게 될 게 걱정돼서였다·
“어쨌든 제가 파악한 바로는 저로서는 그들을 회유하기가 어렵다는 거였습니다·”
“그래도 그중에 가장 확률이 높은 사람은 있을 거 아니야?”
“모릅니다· 다만 그중에 무조건 회유해야 할 사람은 있습니다·”
“누구? 고이케 유리코?”
“맞습니다·”
이세명 사장은 입을 씰룩이며 차로 입을 헹구곤 말했다·
“로얄메이저가 가진 신영금융지주의 지분이 얼마였지?”
“7%가량입니다·”
신영금융지주의 이사임과 동시에 주주명부 상단에 올라가 있는 주주 중 한 명이 그녀였다·
“그 여자가 우리 편에 서준다면야 무서울 게 없지· 그런데 가능하겠어?”
“아버지 편에 서 있는 다른 이사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아버지와 그리 친분이 깊지 않은 사람이 그녀라서 혹시나 우리 편에 서줄 수 있다면 그녀가 유력하기도 하고··· 일단 그녀가 가진 지분을 생각했을 때 무조건 데리고 와야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건 그렇지· 그녀는 로얄메이저를 상속받은 것에 불과하니까· 그런데 그래서 더 힘들잖아· 내가 알기로 그녀는 죽은 할아버지를 무척 사랑했고 할아버지의 뜻을 어길 생각이 조금도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저 역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방법이 없습니다· 그녀를 회유해야 하는 건 선택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생각해본 건 있고?”
형준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마 행장은?”
“저도 딱히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없습니다·”
이세명 사장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형준을 바라보다 말했다·
“쯧쯧··· 넌 어째 네 여자친구보다 못하냐?”
“제 여자친구가 뛰어난 건 맞는데 그걸 꼭 비교하시고 그러십니까?”
“비교가 되니까 비교를 하지· 그럼 이건 어때?”
“어떻게 말입니까?”
“너 신영손해보험이 원래 어디 거였는지 알지?”
“네· 지금은 사라진 동영손해보험 아닙니까?”
“맞아· 예전에 우리 아부지가 보험을 하고 싶었는데 나라에서 허가를 안 내주는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보험회사를 하려면 인수를 해야 했는데 딱 눈에 들어온 게 동영손해보험이었거든· 우리 아부지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형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그래 아네· 동영손보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계속 퍼뜨렸지· 당시 사장이 저지른 불륜에다가 치매 초기 증상을 보이고 회사를 외국 자본에 싸게 팔아넘길 거라는 등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뜨렸어· 근데 그때에는 그게 먹혔지· 국민이 진상조사를 요구했고 사장 일가가 저질렀던 약간
의 불법적인 요소들이 나왔지·”
“사실 다른 돈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흠이 될 것도 없는 거였죠·”
“그래· 솔직히 검찰에서 파고 들어서 뭐 하나 잡자고 들면 안 걸릴 사람이 어디 있나? 불륜이야 그땐 애인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외국 자본에 관한 거야 익명의 제보자 운운하면서 기사 하나 내보내면 그럴듯하게 여론을 흔들 수 있잖아· 결국 우리가 낼름 먹을 수 있게 됐지· 그렇다고
싸게 먹은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먹을 수 없는 걸 제값이라도 먹게 됐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
“그렇긴 한데····”
“왜? 내가 형 병신 만들자고 하니까 놀랐냐?”
“솔직히 그렇습니다·”
“인마· 우리 편일 때에야 형인 거야· 서로 적으로 전장 한복판에서 만났으면 내가 살기 위해 죽여야 하는 거고· 이 새끼 진짜 형의 피를 안 잇기는 했나 보네? 은근히 여린 구석이 있어·”
형준은 민망한 얼굴로 코를 들이켰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말했다·
“일단 아버지 쪽에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면 고이케 유리코도 마음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게 아니라 흔들리겠지· 그 여자한테 남은 게 할아버지 유산밖에 없는데 신영지주 주가가 크게 떨어질 수 있다고 하면 크게 놀랄 걸?”
“하지만 우리가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억지로 낸 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럼? 어찌해야겠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그럴듯하게 만들어야 하겠죠·”
이세명 사장이 손뼉을 쳤다·
“바로 그렇지! 그럼 어디 작전 한 번 짜 봐· 마 행장은 오늘 저녁 약속 있나?”
“없습니다·”
“그럼 나랑 요 근처에서 식사라도 하지·”
직장 근처에서 둘이 만나 식사를 한다·
둘이 손을 잡았다고 은근히 소문이 퍼지길 바란다는 뜻이며 마 행장이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하려는 거였다·
마 행장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 더티 플레이(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