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티 플레이(2) >
이세준 부회장은 아침에 출근해서 언제나처럼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TV를 켰다·
출근할 때 차 안에서 각종 경제 뉴스를 듣고 부회장실에서 놓친 뉴스를 다시 확인하는 게 그의 일과였기 때문이다·
지금 나오는 프로는 각종 경제문제를 놓고 전문가를 초빙해 이야기를 듣는 것인데····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고 뉴스를 시청하던 그가 깜짝 놀라 튕기듯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오전부터 증권가 지라시에 퍼진 정보로는 신영금융지주 이세준 부회장이 형제의 난을 마무리 짓고 신영투자증권과 신영손해보험 그리고 신영모건스탠리 자산운용 이렇게 3개 회사를 매각할 방침이라고 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신영그룹이 형제의 난으로 상당히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는 건 맞습니다· 특히 돌아가신 이경호 회장의 상속재산이 어느 쪽에 많이 돌아가는지에 따라서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될 테고요· 문제는 이세준 부회장이 형제의 난을 잘 마무리한다고 봤을 때 적어도 신영손보는 정리하
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3개 회사 중에 최소한 신영손해보험 만큼은 정리하고 싶을 것이다?]
[네 그렇죠· 그룹의 경영권을 완벽히 장악한다고 해도 신영손해보험은 이세명 사장이 지분을 10% 넘게 보유하고 있거든요? 눈엣가시로 보일 테고 적당한 매수자만 있다면 매각하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할 겁니다·]
매각하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이세준 부회장은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다만 매각하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것과 지금 이 상황에 그걸 입 밖으로 내뱉는 건 다른 문제다·
신영은행에서 일했던 임원이 신영투증에 있기도 하고 신영생명에 있던 임원이 신영손보에서 일하고 있기도 하다·
그룹 내부적으로 순환하며 근무하는 형태인데 여기서 신영손보를 잘라낼 거라고 확신하듯이 이야기하면 당연히 신영손보 측 임직원들은 불안해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세준 부회장은 뉴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소리쳤다·
“야! 들어와 봐!”
그의 고함 소리에 비서실장이 황급히 들어왔고 이세준 부회장은 아무 말 없이 뉴스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음··· 그렇군요· 그렇다면 증권가 지라시에 도는 이야기가 아주 거짓말은 아닐 수 있다는 말이겠네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 나온 이야기가 아주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닐 수 있다는 거죠·]
[그럼 신영투자증권과 신영모건스탠리 자산운용은 어떻습니까?]
[이 부분은 현재 형제의 난이 벌어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이형준 상무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로 아버지와의 사이가 극도로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신영투증과 신영모건스탠리 자산운용 두 곳의 경영자가 이형준 상무와 아주 가깝다는 건 신영그
룹 내부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인정하는 것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렇게 보면 3개 회사 매각에 관련된 이야기도 아주 가능성이 없다고만은 볼 수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신영손보 보다는 조금 가능성이 떨어질 수는 있겠죠· 그들은 아무래도 전문경영인일 뿐이니까·]
[문제는 이 지라시에 다른 이야기도 있다는 겁니다· 이세준 부회장에 관한 조금··· 문제적인 내용도 함께 있었는데 이건 어떻게 보십니까?]
“이런 미친 새끼들····”
이세준 부회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것인데····
[문제가 있죠· 이런 식의 사생활 관련된 소문 퍼트리기는 반드시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합니다·]
[이 때문에 오늘 오전에 퍼뜨렸던 지라시가 이세명 사장 쪽에서 흘린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반드시 수사를 통해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고 봅니다·]
개소리도 저런 개소리가 없다·
지들이 먼저 그 헛소문이 무엇인지 잔뜩 궁금하게 해놓고 수사를 해서 밝혀야 한다니 마니 하는 게 말이나 되는가?
“이런 씨발··· 야! 이거 당장 확인해서 싹 다 지워!”
“알겠습니다· 그리고 당장 법무팀 움직여서 발본색원 하겠습니다·”
“뭘 발본색원을 해? 너 같으면 걸리게 올리겠냐?”
“·······”
사실 누가 올렸는지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이세명 사장과 이형준 상무가 작당하고 움직였을 게 뻔했으니까·
다만 그 둘이 바보 멍청이도 아니고 아무리 파봤자 그 둘의 꼬리가 잡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지라시를 지우고 내부단속을 시켜야 한다·
“9시 전까지 정리해서 인트라넷에 올려· 지라시 내용은 모든 게 거짓이고 신영그룹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자회사 매각 방침이 없다는 식으로· 알겠어?”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기··· 저 새끼들이 말한 사생활 내용이 뭔지도 알아내 와· 그리고 저기 저 새끼들····”
이세준 부회장은 경제전문 채널에서 보도 중인 앵커와 속칭 전문가라는 놈들을 가리키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비서실장은 급히 대답했다·
“저기 두 놈 인적사항 추적해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이형준 상무 쪽 사람이거나 회유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알아와·”
“알겠습니다·”
비서실장은 고개를 숙이고 부회장실을 나갔다·
주먹을 움켜쥐고 부르르 떨던 이세준 부회장은 호흡을 가다듬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 동생이 이행날짜를 기입해 달라고 했을 때 해줬어야 하는 것을····
하지만 과연 예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행날짜를 적어줬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확신이 들지 않았다·
재산을 나눠준다는 건 권력도 나눠준다는 것·
권력을 나누어 주는 것도 아까웠지만 그 나눠준 권력으로 자신을 겨누지 않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영훈은 민희가 내민 아이패드에 뜬 기사를 보고는 그녀에게 다시 넘겨주고 말했다·
“꽤 괜찮은 작전이기는 하네요· 임직원들 반응은 어때요?”
“이형준 상무의 말에 의하면 사내 인트라넷에 다들 걱정하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신영금융그룹보다 규모가 작거나 대우와 복지가 부족한 회사에 편입되면 상당한 손해를 입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합병된 회사 직원들은 언제고 구조조정을 당할 수 있다
는 불안감이 있어서 상당히 동요하고 있는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주가는요?”
“아직까지는 별 반응이 없습니다· 지라시이기도 하고 이세준 부회장이 사내 인트라넷에 매각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단속했다는 게 알려지기도 해서요·”
“그··· 문제의 사생활이라는 건 뭐예요?”
민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이세준 부회장이 별장에서 여자들을 불러놓고 파티를 벌였다는 내용입니다·”
“아이고··· 이세준 부회장이 화가 많이 났겠네· 그런데 그게 효과가 있을까요? 그냥 망신주기 아닌가?”
“그냥 헛소문으로 망신주기는 아닙니다·”
“설마 그 얘기가 진짜라는 거예요?”
“네·”
“와··· 이형준 상무가 마음 독하게 먹었네·”
“지금까지 증거를 모으려고 했지만 워낙 사람들을 철저하게 관리해서 이형준 상무도 증거를 모으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관리됐는지 잘 알고 있기도 하고 지라시도 단순한 해프닝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구체적으로 나와 있어서 이세준 부회장이 꽤 곤란해질
건 분명합니다·”
“만약 검찰이 이걸 물고 달려든다면····”
“경영진 이슈가 터지면 아마 임직원들이 더 불안해지긴 할 겁니다· 게다가 구속이나 기소되기라도 하면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을 테고요·”
“음··· 어떻게 될 거라고 봐요?”
“제 생각이요?”
“민희 씨 생각도 궁금하고 이형준 상무 쪽 생각도 궁금하고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일단 이형준 상무 쪽은 이번 지라시로 무조건 어떤 결과를 만들겠다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로 인해 흔들린 사외이사들의 마음을 얻겠다는 게 목적이라고 합니다·”
“아··· 일리가 있네요·”
“저도 이번 일이 조금 무리한 게 아닌가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알겠어요· 나가봐요·”
민희가 나가고 영훈은 생각에 잠겼다·
이형준 상무의 올해 운은 상당히 좋은 편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만사형통할 정도는 아니었고 좋은 기회와 인연이 그의 손을 잡아주고 있지만 곳곳에 걸림돌이 있으니 슬기롭게 대처해야만 하는 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형준 상무는 태생적으로 끈기가 부족하고 쉽게 지치는 사람이다·
학업이나 예체능으로 크게 성취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고 할까?
그렇다고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어서 적당한 학업을 성취할 정도는 되니 타고난 운으로 적당히 놀고먹는 걸 즐기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서른 초중반부터 태풍에 휘말려 운명의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하는 형국이었는데 그의 부족한 부분을 민희가 옆에서 도와주니 결국 그가 원하는 걸 이루게 될 것처럼 보였다·
다만 이세명 사장의 운을 모르니 그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다·
그나마 민희가 옆에 붙어 있으니 크게 곤란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때 다시 민희가 들어왔다·
“상무님 말씀하셨던 시간입니다·”
“아 고마워요· 점심 먹고 들어올 겁니다·”
“알겠습니다·”
영훈은 실장실에서 나와 연희와 눈을 한번 마주치곤 차를 타고 서초동으로 향했다·
윤희찬 부장이 찍어준 주소 근처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찾아가 보니 구석진 자리에 해봄식당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얼핏 봐서는 거의 분식집이 아닌가 싶은 곳이었는데 들어가 보니 손님은 아무도 없고 테이블도 고작 여섯 개 정도에 불과했다·
조금 일찍 왔나 싶어 메뉴판을 보다가 가장 무난한 제육덮밥을 시켰는데 잠시 후 일단의 무리가 들이닥쳤다·
“어?”
“안녕하십니까?”
김태현 회장이 영훈을 보며 눈을 빛냈다·
적어도 공식 행사에서 지나가다가 눈인사 정도는 했으니 영훈이 누군지 몰라볼 수 없었던 거다·
김태현 회장은 창훈을 돌아보며 물었다·
“네가 알려준 게냐?”
“HS물산 최영훈 상무가 회장님을 한번 뵙고 싶다고 해서요·”
창훈의 해명에도 김태현 회장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네· 제가 회장님을 조용한 곳에서 뵙고자 부탁했습니다·”
“크흠··· 그럼 따로 연락을 했어야지· 남의 식당에서 이게 뭔가?”
“조용히 식사하고 이동해서 말씀드려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조금 당황스럽네요·”
“뭐가?”
“저희 회장님에게 제안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당시 저희 회장님도 거기서 그런 제안을 들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도 회장님의 뜻을 존중해주셨는데··· 절 이렇게 무안하게 만들지는 예상하지 못했네요·”
“허··· 그러니까 내가 자네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제 팔이 이렇게 아프지 않을 것 같은데요?”
김태현 회장은 영훈이 내민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결국 마주 잡아준 후 자리에 앉았다·
“내 자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송 회장이 자네를 예뻐할 만하군· 그런데 조심해야겠어· 건방지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음이야·”
“조심하겠습니다·”
“그래서 대답을 들고 왔나?”
“답은 없습니다·”
“뭐?”
김태현 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영훈은 마침 나온 제육 덮밥을 숟가락으로 비비며 말했다·
“제대로 된 질문을 받아야 대답이 나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현진중공업에 관심이 있냐 없냐···· 관심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나랑 장난하는 건가?”
“그게 아니죠·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니라고 했지 않습니까? 우리 회장님에게 현진중공업이란 그저 있으나 없으나 한 기업입니다· 있으면 뿌듯하지만 그래 봐야 해주조선해양도 가지고 있는 데다가 부채도 많으니 걱정스럽고 없으면 마음 한구석은 쓸쓸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없으니 없는
데로 살 수 있는 그런 거죠· 그걸 가지고 싶냐고 물어보시면 저희가 어떤 대답을 드려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영훈은 제육덮밥을 크게 한 숟갈 떠서 입에 넣고 잠시 주인아주머니를 바라보다가 물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 어떤 질문과 대답이 오가야 할지 고민했는데 지금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
“회장님께 이 자리가 꽤 의미가 있어 보여서요· 나중에 비서실 통해서 자리 한번 마련해보겠습니다· 그럼····”
영훈은 창훈에게 살짝 눈짓하며 자리를 나왔다·
그의 건방진 태도에 황당함을 느낀 창훈이 얼떨떨해하며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이게 뭐하는 겁니까?”
영훈은 대답 없이 주차장까지 계속 걸어갔고 이내 차에 타고는 조수석에 탄 창훈에게 말했다·
“우리 회장님은 현진중공업을 원해요· 하지만 난 그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부채도 많고 해주조선해양이 있는데 굳이 그걸 인수해서 직원들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거든요·”
“그래서요?”
“현진중공업 인수해서 잘 성장시킨다고 약속하면 도와줄게요· 그쪽이 후계자가 될 수 있게·”
“그게 답니까?”
“솔직히 그거면 되는데 내가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뭐라도 받아야 되긴 할 것 같아서· 여기서 바로 말하자면 현진중공업 계열사 중에 현진기계는 우리가 가질게요· 건설과의 시너지를 생각하면 괜찮을 것 같으니까·”
어차피 자신이 가진 것도 아닌 걸 원하는데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약속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그 식당부터 알아봐요·”
“네?”
“그 식당··· 주인아주머니· 힌트는 드렸습니다· 뭐 해요? 내리지 않고? 점심 덜 먹어서 빨리 가서 식사해야 해요·”
창훈은 얼떨떨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고 영훈이 탄 차는 쌩하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더티 플레이(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