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세 역전(1) >
다음날 영훈은 연희와 같이 출근하는 차 안에서 약간의 꾸중(?)을 들었다·
“요즘 나 너무 심심하게 두는 거 알아?”
생각해보니 일 때문에 그녀에게 소홀한 건 맞았다·
“미안해· 근데 요즘 저녁에 틈틈이 요트 면허 자격증 공부하고 있어· 그거 따면 자주 나가자·”
“그럼 좋긴 하지···· 그런데 그냥 난 오빠가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지고 일했으면 좋겠어· 솔직히 회사에서 오빠가 제일 바쁜 것 같아·”
“하하 그 정도는 아니다· 직원들이 얼마나 힘든데· 난 그냥 자주 돌아다니는 정도지· 서류에 파묻혀서 일하는 직원들이 보기에 난 그냥 설렁설렁 일하는 상사일걸?”
“그런가· 그런데 오빠 요즘 얼굴이 좋지 않아· 물어보면 항상 괜찮다고는 하는데 난 그냥 걱정스러워·”
“진짜 괜찮아· 그냥 고민이 좀 있었는데 많이 해결됐어·”
처음엔 현진중공업으로 장모님을 흔든 우명그룹 김태현 회장 때문에 조금 불쾌했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조금 해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모든 걸 HS그룹이 다 손대지 않아도 조금만 시각을 넓히면 다른 길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비록 현진중공업이 장모님 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고는 하나 어차피 그건 미련일 뿐이었다·
차라리 아예 다른 주인이 그걸 차지하게 된다면 그 미련도 사라지게 될 게 분명했다·
연희는 그게 무언지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다행이네· 그럼 오늘 점심은 우리 둘이 먹자·”
“그럴까?”
“응· 약속 없지?”
“어 오전에도 바쁘지 않으니까 조금 멀리 갈까? 꽃게찜 어때?”
“굿굿~”
그렇게 기분 좋게 합의했지만 점심 시간 1시간 전에 연희와의 달콤한 점심 데이트는 무산되고 말았다·
우명건설 김창훈 상무가 세상 급한 일이라며 꼭 만나자고 청했기 때문이다·
연희는 또 방해자가 등장했다며 쫑알거리며 김창훈 상무를 씹었지만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고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다·
김창훈 상무와 약속한 장소는 을지로를 한참 벗어난 상암의 한 퓨전 레스토랑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윤희찬 부장과 함께 미리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영훈이 들어오자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먼 곳으로 오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전에 일도 있고 해서 주변 눈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을지로는 워낙 직장인들이 많아서 어느 식당에 들어가도 꼭 우리 회사나 계열사 직원들이 있거든요·”
대기업의 위엄이라고 할까?
우명그룹이 재계 서열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것이 아님에도 그 규모를 짐작하게 했다·
당연히 어느 정도 과장이야 있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죠· 그런데 왜 갑자기 보자고 했습니까?”
영훈이 자리에 앉으며 묻자 창훈이 따라 앉으며 물었다·
“그런데 먼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뭘요?”
“그 식당의 아이가 저희 아버지 배다른 자식이라는 거요·”
“그래요?”
영훈이 몰랐다는 듯이 묻자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정말 몰랐습니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저 그 식당 어제 처음 갔습니다· 당연히 몰랐죠·”
말은 이렇게 했지만 영훈은 김태현 사장의 사주를 알고 난 뒤에 어느 정도 추리를 통해 짐작하고 있었다·
김태현 회장은 타고 나기를 정력적인 사람으로 슬하에 자식이 다섯 이상이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태현 회장의 자식이 그처럼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었고 한 여자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니 지금까지 부인 이외에도 여러 여자를 만났을 것이다·
자식이 많을 팔자이니 어디에선가 그가 모르는 자식이 살아가고 있을 확률이 높았는데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제육덮밥을 먹고 나서 이 식당에 뭔가 있다는 걸 알았다·
맛이 정말 없었기 때문이다·
산에서 내려와 지금까지 온갖 맛있는 음식을 먹고 돌아다녀서 그런지 입맛만 고급이 돼서 큰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 음식은 대기업 회장이 굳이 찾아와 먹을 정도가 아니었다·
맛이 아니라면 무슨 사연이 있다는 건데 정이 많은 김태현 회장으로서는 예전에 식당 주인에게 빚을 졌을지도 모르고 또 다른 이유로는 이 집에 혹시 배다른 자식이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그 의심이 가장 먼저 들었는데 역시나 김창훈 상무가 그걸 알아내 온 걸 보면 그의 운이 확실히 나쁘지 않음이리라·
“거 참···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정말 놀랐습니다· 상무님이 말씀하셨던 그 식당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했는데 글쎄 그 식당에 중학생 남자아이가 드나들었습니다· 전 처음에 제대로 분간하지 못했지만 여기 윤 부장이 단번에 저희 아버지와 그 학생의 얼굴이 닮았다고 하더라
고요·”
“정말 신기하긴 하네요·”
“일단 윤 부장이 그 학생에 대해 알아온 내용이 있습니다·”
윤희찬 부장이 입을 열려고 하자 마침 음식이 나왔고 점원이 룸을 나간 이후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학생 엄마 되는 사람은 5년 전 암으로 죽었고 지금은 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회장님이 매년 건축의 날 행사가 끝나면 꼭 그 집을 들르시는데 언제부터 그랬냐고 비서실에 물어보니 딱 엄마가 죽은 이후부터였습니다· 아 일단 드시죠·”
점심은 갈비탕이었는데 꽤 푸짐하게 나왔다·
영훈은 한 숟갈 뜨고 커다란 갈빗대에 붙은 고기를 가위로 해체하며 말했다·
“먹으면서 들을 테니까 계속하세요·”
“네· 일단 동사무소에 가서 어려운 형편이니 도와주는 사람이 혹시 있냐고 물어보니까 나라에서 나오는 것 말고는 자신들이 아는 게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난감해하고 있는데 마침 그 집을 좀 안다는 할머니가 옆에서 듣고는 그 집 손주 학비를 누가 매년 대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 했습니다·”
“그래요? 거 입이 싼 할머니네요·”
“그러니까요· 일단 그 이상 알아내는 건 힘들지만 아무래도 회장님께서 은밀히 도와주려고 하시는 것 같은데 금액이 커지면 혹시나··· 누군가 알게 될까 봐 학비 이상 도와주지는 못하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으음····”
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갈비를 양념간장에 찍어 먹었다·
그저 이야기 잘 들었다는 표정·
김창훈 상무는 답답한 마음에 앞에 놓인 갈비탕은 입 한번 대지 못하고 물어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 이걸 엄마가 알게 되면···· 아버지가 큰돈을 후원하지 못한 이유는 분명 엄마가 알게 될까 봐 그럴 건데 이걸로 제가 아버지의 눈에 들 수 있을까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셨네요· 아버지가 어머니 때문에 그 어린 학생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면 상무님이 나서서 아버지 편을 들어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어머니가 만약 이 사실을 알면··· 지금까지 아버지의 바람을 어머니가 몰랐겠습니까? 당연히 아셨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딱 하나만 약속하라고 하셨어요· 절대 사생아는 안 된다고요· 만약 어머니가 알게 되면 이혼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말이죠· 전 상무님이 우명그룹을 이어받는 걸 도와주는 조력자지 우명그룹을 입에 떠먹여 주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건 맞습니다·”
“아버지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는데 마침 사생아가 나왔고 그걸 어떻게 활용하실지는 오로지 상무님의 결정에 달렸습니다· 제가 상무님의 가족관계까지 걱정하면서 조언을 드릴 수가 없어요·”
“후··· 그렇네요· 하하 바보 같은 질문이었어요·”
“저도 모자 관계 갈라놓는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보이는 게 그거라서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만약 집안에 그런 사정이 있다면 그냥 이번 건은 포기하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포기하라고요?”
“네 다음에 또 좋은 기회가 생기겠죠·”
영훈은 태연스럽게 말하며 갈비를 뜯어먹었지만 창훈의 마음은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다·
“이것보다 좋은 기회가 생길까요?”
“하하하 상무님· 제가 무슨 점쟁이라도 됩니까?”
“아··· 그렇네요· 최 상무님하고 이야기하면 어째 꼭 점쟁이랑 대화하는 기분이라····”
“드세요· 말했잖아요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시라고· 천천히 드시면서 생각하세요·”
최영훈 상무는 미소를 지으며 식사를 권하고는 다시 맛있게 갈비탕을 먹었다·
그 모습이 괜히 얄미워 보였지만 이내 창훈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자고 다짐하고 식사에 열중했다·
*
“야 너는 이 상황에 급하지 않고 여유롭게 생각할 수 있겠냐?”
김창훈 상무는 최영훈 상무와의 점심 약속을 끝내고 회사로 돌아와 심각한 표정으로 윤 부장에게 말했다·
그는 소파에 털썩 몸을 눕히며 고개를 흔들었다·
“말도 안 되지· 최 상무는 우리랑 뭔가 달라· 생각하는 게 다르다고· 참새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리오?”
“같은 상무인데 누구는 참새고 누구는 봉황이냐?”
“누구는 본래 재벌로 태어나서 상무된 거고 누구는 개털이었다가 재벌그룹 상무가 된 거잖아· 너뿐만 아니라 너랑 비슷한 애들도 다 최 상무 앞에서는 참새 되는 거지·”
“씨발 그거 위안 되네·”
“그래서 결론이 어찌 되나?”
“난 아무래도 최 상무처럼 안 되겠다· 이거 기회 놓치면 다시는 안 올 것 같아·”
“잘 생각해· 최 상무 말대로 모자관계 그대로 굿바이다·”
“나도 알아· 엄마한테 미안해· 그런데 어쩌겠어? 솔직히 악마 같은 새끼한테 온갖 지원 다 밀어줄 때 내 심정이 어땠을 것 같냐? 엄마는 자기 아들이라 귀하다고 생각하지만 난 아니야·”
그때 삐 소리와 함께 전화기를 통해 비서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상무님 회장님께서 인도 추가 신공항 계획서 가지고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알겠어요·”
희찬이 휘파람을 분다·
“휘유~ 호랑이는 호랑이시네·”
“나 이거 해도 되는 거겠지?”
“이건 나한테 물어보지 마라· 난 이후 파장이 어떻게 흘러갈지 상상도 못 하겠거든· 솔직히 말해서 네가 회장님 편을 들었을 때 회장님이 정말 좋아하실지도 의문이야·”
“그렇긴 해· 우리 아버지도 들추고 싶지 않은 이야기일 수 있으니까·”
“내 말이····”
“일단 갔다 올게·”
창훈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보고서를 결재판에 끼우고 방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오르고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데 평소에는 느리게만 오던 엘리베이터도 오늘따라 바로 열린다·
긴장된 마음으로 회장실에 들어가니 아버지인 김태현 회장이 마침 우명건설 오경민 사장과 같이 앉아 있었다·
“어 이리 와· 여기 오 사장이 네 칭찬을 어찌나 하던지 내가 다 낯간지럽더라·”
“하하하 칭찬할 만하니까 칭찬하지요· 요즘 김창훈 상무 없으면 해외 쪽 업무가 진행이 되질 않습니다·”
“금칠 그만해· 뭐 해? 얼른 앉아·”
창훈은 조심스럽게 앉으며 말했다·
“자꾸 칭찬하시니까 저도 부끄럽습니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우리 김 상무가 겸손도 늘었습니다·”
“겸손은 무슨··· 지가 부끄럽지 않으면 사람인가?”
“하하하!”
그렇게 한동안 잡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던 오경민 사장은 슬쩍 창훈의 눈치를 보고 일어섰다·
“전 이만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왜? 같이 들어야지?”
“저야 우리 김 상무에게 보고받는 게 일이지 않습니까· 저까지 있으면 김 상무 부담될 테니 나중에 듣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둘이서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 눈치껏 빠져주려는 마음이라는 걸 창훈이나 김 회장도 눈치챘다·
창훈은 언제고 오 사장에게 꼭 밥 한 끼 사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럼 그렇게 해·”
그렇게 오경민 사장이 나가고 나서 김태현 회장이 물었다·
“뭐 할 이야기 있어?”
창훈은 갈등하던 마음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어제 가셨던 식당에서요·”
“어? 왜?”
“거기 들어왔던 학생이 이상하게 아버지를 닮았더라고요·”
“뭐? 너 인마 무슨 짓을····”
김태현 회장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진다·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알아봤는데 그 학생 엄마가 5년 전에 죽었다고 하네요· 아버지는 5년 전부터 매년 그 식당에 꼭 찾아가셨고···· 그 애가 걱정돼서 그러신 거죠?”
“·······”
“아버지 저 아버지 편입니다· 아버지가 호적 올리고 싶다고 하면 저 반대하지 않아요·”
순간 김 회장이 당황했다·
오죽 당황했으면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까지 했을까?
“정말? 진심이냐?”
< 전세 역전(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