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운(大運)이 충돌하다(3) >
“그럴수가 있나요? 타고난 사주대로 사는거 아니예요?”
영훈은 웃음을 터뜨렸다·
“타고난 사주는 그저 길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의 길이 아니라 여러개의 길을 보여주죠· 만약 사주만 보여주고 이 사람이 누군지 알려주지 않으면 난 백퍼센트 정확하게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아맞출 수 없을 겁니다·”
“그럼 현재 직업과 직급이 해석에 도움이 되는 건가요?”
“당연하죠·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가 완전히 똑같이 살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주는 같은데 왜 그럴까요?”
“성격이 달라서?”
“성격만 다르겠습니까? 생긴것도 조금 다르죠· 결정적으로 자라오면서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취향이 달라지고 취향이 달라지면 친구도 달라지겠죠· 취향이 달라지면 환경이 달라집니다· 만나는 여자가 달라지고 배우자가 달라지며 자식들이 달라집니다· 똑같은 삶을 살 수 없죠·”
“그럼 사주를 왜 봐요?”
“말했듯이 여러개의 길 중에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를 보는 겁니다· 그러다 현재 그 사람의 직업이나 배우자의 사주를 알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죠·”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주변을 한번 살피곤 물었다·
“그럼 차지열 상무의 사주는 뭔가요?”
“그는 본래 사업가의 사주를 타고 났습니다· 그런데 전형적인 사업가의 사주는 아니예요·”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본래 사업가의 사주를 타고 나면 배짱이 있고 대범하며 큰 돈을 쓰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여기서 그냥 사업가가 아니라 성공적인 사업가의 사주라면 예지력이나 감각이 발달합니다·”
“그런데요?”
“차지열 상무는 큰 돈을 쓰는데 주저함이 없고 예지력이나 감각이 발달한 것까지는 좋은데 자의식과 자존심이 굉장히 강하게 타고 났습니다· 아마 자신을 압도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라면 그 자존심을 숙일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반발심이 일겁니다· 만약 송은채 사장님이 그 스스로 숙일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회사에 출근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스트레스 받고 있을 게 분명하겠네요·”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였을까?
연희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 정도라면 그냥 사업을 할 것이지···”
“바로 그게 문제예요· 이 사람은 생각이 너무 많고 실천력이 떨어지면서 욕심은 과다하거든요· 그래서 자기돈으로는 뭘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사업을 하기만 하면 분명히 잘 할 사람인데 실천을 할 배짱이 없는 사람이라는 거군요·”
“맞습니다· 아마 누군가 그의 옆에서 용기를 북돋아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지금쯤 꽤나 성공적인 사업가가 됐을 텐데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었던 거겠죠· 대운이 오는 시기를 놓친 겁니다· 전형적으로 좋은 사주를 타고 났지만 좋은 인연을 만나지 못해 타고난 운을 다 펴지 못한 경우라고 볼 수 있죠·”
“그럼 나도 타고난 재복을 다 누릴 수 없을 수도 있나요?”
영훈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죠· 배우자를 누구로 맞을 지에 따라서 더 좋아질 수도 있고 반대의 경우일 수도···”
“잘 알겠어요·”
잠시 멈칫하던 그녀는 이어 말했다·
“고마워요·”
영훈은 피식 웃었다·
“무섭습니까?”
“네?”
“운명을 무서워하는 것 같거든요·”
“내가요?”
“음··· 처음에는 당신이 성격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건가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두려움이 생긴다면 다르겠죠·”
“···”
연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두려워하는 거 나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두려워 하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거든요· 좋은 모습입니다·”
영훈은 빙그레 웃으며 연희를 지나쳐 옥상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연희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
“얘는 왜 이렇게 안 내려와·”
송은채 사장은 작은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약속한 시간에서 10분이 넘었는데도 아직 주차장으로 내려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상시라면 비즈니스에서 시간약속의 중요성이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법이라고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빨리 나타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혹시 마음이 바뀌면 어쩌나 하는 조급함 뿐이었다·
“어? 아가씹니다·”
수행기사의 말에 송 사장이 얼른 창밖을 바라보았다·
빠른 걸음으로 차량을 향해 다가오는 연희를 보고서야 송 사장은 마음을 놓았다·
“미안 늦었지·”
송 사장은 옆자리에 타는 연희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혹시 마음을 바꾸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는데 연희의 얼굴은 평소와 전혀 다를바 없었다·
“괜찮아· 얼마 안 기다렸어· 그런데 다음부터는 늦으면 늦는다고 미리 연락좀 주지 그러니?”
“미안해· 빨리 오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졌거든·”
“응? 무슨 이야기?”
“어··· 조금 있다가 이야기할게·”
연희가 얼버무리자 송 사장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아무리 수행기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백프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 이외에는 없다는 게 송 사장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연희와 송 사장이 향한 곳은 신촌세브란스병원 VIP 병동·
송 사장은 남편인 임지훈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향하면서 계속 연희를 힐끔거렸다·
역시나 말이 없어진 연희는 바짝 긴장해서 입술을 자근자근 씹고 있었지만 발걸음을 늦추지는 않고 있어 송 사장은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들어가자·”
연희는 잠시 멈칫하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짝 마른 몸으로 누워있는 아빠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임지훈 사장은 누워 있다가 들어오는 연희를 보고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여보 우리 왔어요· 인사해·”
“나 왔어요·”
연희는 송 사장의 생각보다 차분하게 말하며 임지훈 사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네가 웬일이냐?”
힘없고 메마른 목소리에 연희는 뭔가가 울컥 올라오는 걸 느꼈다·
“언제까지 안 보고 살 수는 없잖아요·”
“난 네가 안보고 살려는 줄 알았다·”
“생각을 바꿨어요·”
연희는 잠깐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도 내가 영수 대신 죽었으면 해요?”
송은채 사장은 흠칫 놀랐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난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
“거짓말인 거 알아요· 뭐 거짓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내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으니까·”
“···”
“종종 들를게요·”
“보기 싫은 아빠 뭐하러 보러 와?”
“영정사진 보면서 화내면 무슨 소용이에요? 원망 들어줄 사람 있을 때 원망하려구요· VIP 병실이라 좋네요· 갈게요· 나 갈게 엄마· 윤 기사님 부르지마· 택시 탈거야·”
연희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려는데 송은채 사장이 불렀다·
“얘 온 김에 그 얘기나 하고 가· 그 신입사원 있잖니·”
“아··· 차 상무 이야기?”
“응· 뭐라고 하든?”
“그냥 속을 잘 알 수 없는 사람 같대· 그 정도야 엄마· 오늘 처음 만났잖아· 고작 처음 만난 사람을 그렇게 쉽게 평가할 수 있겠어?”
“준기도 처음 만나서 다 알아봤잖아·”
“사람마다 다른가 봐· 나 갈게·”
연희는 송 사장이 더는 말을 꺼내지 않게 그대로 문을 닫고 나왔다·
차지열 상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말을 꺼내봤자 오히려 더 난감한 상황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조금 신기하고 영험한(?) 능력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작 신입사원일 뿐이다·
꼴랑 한번 본 사람이 차 상무에 대해 언젠가 뒤통수를 때릴 무서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한다고 이야기를 하면 엄마가 믿을 수 있을까?
믿는게 이상한 것이며 정말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는다면 어디서 사기 당하기 딱 좋은 성격이 맞을거다·
가정집 주부라면 몰라도 한 기업의 수장이라면 이런 근거 없고 불확실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게 더 큰 문제다·
그렇다고 좋은 이야기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호기심에 입사를 시키긴 했지만 아마 엄마도 이런 수준의 이야기를 기대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럼 이야기를 들은 자신이 중간에서 커트 하는게 맞다고 연희는 판단했다·
지금쯤 안에서 엄마와 아빠가 그 신입사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게 분명했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괜히 삼촌이 엄마한테 바람을 넣어서는···”
연희는 투덜거리면서도 홀가분한 표정으로 병실을 나섰다·
집으로 들어갈까 고민하던 그녀는 택시를 타고 다시 회사로 향했다·
이 우울한 기분으로 그냥 집에 들어가기 싫었기 때문이다·
마침 오늘 동기들끼리 치맥 한잔 하기로 했기 때문에 한자리 끼려고 했는데 택시를 타고 을지로에 도착하니 이미 영훈은 치맥 한잔 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연희는 궁금함을 못 참고 바로 회사로 들어갔다·
“왜 그렇게 빨리 빠져나갔어요? 술자리 재미 없었어요?”
“아니요· 그것도 좋은데 아무래도 내가 부족한 게 많다 보니까 한가하게 술이나 마실 수가 없겠더라구요· 그래서 뭐 좀 보는 겁니다·”
영훈이 보는 건 노 대리가 하다가 고 과장이 보류시킨 ‘Nodri Clare의 국내시장 전략’이라는 보고서였다·
이미 고 과장이 연희에게 보고 디벨롭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지시까지 내린 아이템이었다·
“오오~ 열정이 대단한데요? 저도 같이 할까요?”
“그러면 좋죠· 혼자 보다는 둘이 나으니까·”
연희는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슬쩍 주변을 둘러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전에 이게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른다고 하셨잖아요? 왜 관심이 생긴 거예요?”
“지금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요?”
“이 보고서의 내용은 잘 몰라도 노 대리님에게 대운(大運)이 들어 왔다는 건 알거든요· 그러니 노 대리님이 만진 이게 꽤 좋은 아이템이라는 게 제 결론입니다·”
연희는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어차피 팀에서 팜 오일건 때문에 정신없어서 이거 손대 봤자예요· 아마 내년은 지나야 손댈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 과장님이 디벨롭 하라는 거 그냥 하는 말이죠· 큰 기대 걸지 마요·”
“연희 씨·”
“네?”
“회사 임원진에게 인정받고 싶으시죠?”
연희의 눈동자가 떨린다·
사장 딸이라고 인정받고 싶지 않을리 없다·
아니 오히려 그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을 수 있다·
아들이 아닌 딸이기에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녀의 성공과 명예에 대한 욕심은 익히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면요?”
“그럼 이거 잡으세요·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노형석 대리를 잡으시면 됩니다·”
“그럼 당신은요?”
“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렵니다·”
“일은 우리가 하고 당신은 배우면서 실적 올리고?”
“아직 한창 배워야 할 시기 아닙니까· 서로 윈윈이죠·”
< 대운(大運)이 충돌하다(3)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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