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세 역전(4) >
우명솔라 본사가 있는 세종시에 도착한 도훈은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이 우명그룹의 후계자가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혹여나 동생과 회사 경영권을 두고 경쟁하더라도 아버지의 마음은 언제나 자신을 향해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 믿음이 무참히 깨져버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결국 오랜 시간 침묵하던 그가 비서실장을 불러놓고 물었다·
“아버지가 도대체 왜 마음을 바꾸셨을까?”
혼잣말이 아니라 조수석에 앉은 비서실장에게 묻는 말이었다·
우명솔라 비서실장은 홍채경이라는 입사 6년 차로 경력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김도훈 사장의 신뢰를 듬뿍 받고 있었다·
단순 비서라고 하기에는 그녀의 스펙이 너무도 대단해서 짧은 경력을 문제 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소수에 속하던 뒷담화를 하던 사람들도 1년 동안 빈틈없이 사장을 보좌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그녀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정확하고 날카로운 촉과 더불어 아름다운 외모까지 어느 하나 빠질 것 없는 그녀는 도훈의 믿음직한 조언자이자 애인이었다·
홍채경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
“회장님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후··· 아버지가 배다른 자식이 있다고 하셨어·”
“배다른 자식이요?”
“그래· 너도 알다시피 우리 아버지가 여자가 좀 많았어? 요즘에도 어디서 누굴 만나고 다니시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애 엄마는 죽었고 아이가 할머니랑 같이 살고 있대·”
“그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호적에 올리고 싶다고 하셨어·”
“네?”
홍채경은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안 되죠 당연히!”
“그래· 그래서 안 된다고 했지· 씨발 어느 자식이 이걸 그러자고 하면서 동의하겠어? 미치지 않고서야 못하는 거야· 게다가 우리 엄마가 좀 무서워? 막상 아버지도 혼자서는 엄마를 감당 못 하니까 나한테 거들어 달라고 한 건데 당연히 거절했지· 그게 다야·”
“다른 이야기는 더 없고요?”
“그래· 그 이후로 창훈이한테 주식을 줘야겠다고 마음먹었으니까 말려도 소용없다는 듯이 말씀하셨어· 끝 상황 끝난 거지·”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완전히 협박한 거나 다름없잖아요? 나 안 도와주니까 동생한테 주식 주겠다고 협박한 거죠·”
“이걸 협박의 카드로 썼다고? 말이 안 되지· 이걸 협박으로 써먹으려면 동생한테도 같이 썼어야 하는 거 아니야? 둘 다 거절하면····”
말을 멈춘 도훈이 채경과 눈을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혹시 김창훈 상무가 회장님의 제안을 이미 수락한 게 아닐까요?”
“그래놓고 우명의 지분을 받기로 했다는 거지?”
“그러면 말이 되잖아요?”
“말이야 되는데··· 창훈이가 그걸 승낙했다고? 배다른 자식을 호적에 올리는 순간 물려받을 자산 가치가 수천억 대로 줄어들 텐데?”
“아닐 수도 있죠· 만약 사장님이 그룹을 물려받고 김창훈 상무에게 우명건설 하나만 가지게 한다면 김창훈 상무로서는 그룹 지분을 받고 호적에 한 명 더 추가하는 게 이득 아닐까요?”
“그 얘기는 창훈이 새끼가 날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다는 거잖아?”
“전에 그러셨잖아요? 동생이 사장님 싫어한다고· 그럼 언제고 벌어질 일이었을 수 있어요·”
“아니 정확하게는 날 싫어하면서도 무서워하는 거였지· 그런데 이건 지금 나랑 한번 붙어보자고 하는 거잖아 씨발놈이···· 이 새끼 지금 컸다고 옛날 기억은 다 잊어먹은 건가?”
도훈은 입술을 깨물다가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채경이 급히 물었다·
“어디 가시려고요?”
“어디긴? 그 새끼 있는 우명건설로 가려는 거지·”
도훈이 옷을 걸쳐 입고 나가려 하자 채경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차분히 말했다·
“남자끼리는 주먹다짐하고 싸울지 모르지만 여자끼리는 어지간해서는 머리채 잡고 싸우지 않아요· 왜 그런 줄 알아요?”
“왜?”
“먼저 화내면 지는 거니까요· 그래서 비꼬았으면 비꼬았지 절대 화가 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아요· 화내면 내가 상처받고 약점 찔린 걸 들키는 거니까· 가서 뭐라고 하려고요? 주식 받지 말라고 하시게요? 아니면 회장님의 사생아를 호적에 올리면 안 된다고 하려고 그래요?”
“·······”
“힘으로 찍어 누르는 건 힘을 가지고 난 다음에 해야 해요· 김창훈 상무가 아직 상무밖에 안 된다고 하지만 사장님과는 회사가 달라요· 그룹 회장이 되기 전에는 힘을 가졌다고 할 수 없는 거 아시죠? 힘이 없는데도 화를 내면 상대는 겁을 먹는 게 아니라 우습게 생각해요· 가슴 깊이 조금
이라도 남아 있는 두려움까지 사라지게 될 거예요·”
도훈은 채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비서를 불러 냉수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는 냉수를 쭈욱 마시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고마워· 덕분에 정신 차렸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만약 사생아 문제를 김창훈 상무가 먼저 알았고 이미 회장님과 암묵적인 거래를 한 거라면 사장님은 선택하셔야 합니다·”
“어떤 선택?”
“회장님을 선택하실지 아니면 어머님을 선택하실지요·”
“당연히 아버지 아니야? 내가 지금 엄마 편들어서 아버지 눈 밖에 나면 그걸로 끝이니까· 엄마한테야 미안하지만·”
“그럼 일단 회장님과 다시 대화하셔서 도대체 그 사생아의 정체가 뭔지 알아오셔야 합니다·”
“알기는 해야겠지 당연히··· 그런데 그 아이 정체를 당장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어?”
“네·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알아야 전략을 잡을 수 있습니다· 진짜 아들은 맞는지 어렵게 살아왔던 건 맞는지 어디서 사고 친 적이나 흠잡을 만한 건 없는지····”
김도훈 사장이 빙그레 웃었다·
“만약 엄마 없이 자라서 사고나 치고 다니던 아이라면 그걸 빌미로 아버지의 생각을 돌릴 수 있겠네?”
“네· 특히 어린 나이부터 문란하게 놀았다면 더더욱 일을 만들어 볼 수 있어요·”
“만약 공부도 잘하고 별다른 사고도 안 친 놈이면?”
홍채경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뭐··· 포기할까요?”
그녀는 포기하는 척 말했지만 그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냉혹하고 어떨 때는 잔인한 면이 있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처럼 도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원래 사람은 유혹에 약하거든· 특히 어린놈일수록 더 유혹에 약하지· 건실한 놈 타락시키는 거야 일도 아니지·”
“맞아요· 당신은 나도 타락시켰잖아요·”
그녀가 도훈의 가슴팍을 검지로 천천히 내리그었다·
도훈은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문으로 다가가 문을 잠갔다·
*
점심시간이 끝나고 한창 일에 치일 시간 오히려 조금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기획조정실에 한 명 있었다·
바로 최영훈 상무·
그가 바쁜 이유는 외부 미팅을 하러 다녀서 그런 거지 회사 내에서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쁜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민희가 안 바쁜 틈에 슬쩍 들어갔다·
“상무님?”
“네?”
영훈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아 얘기해요· 무슨 일인데요?”
“상무님 요즘 인사문제 때문에 고민이 있으시다고 들었어요·”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요· 니폰유센 말하는 거 맞죠?”
“네· 맞습니다·”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만나서 사주를 보면 정확한데 후보 될 사람들을 일렬로 쭉 세워놓고 악수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회사 내부 인물이라면 억지로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외부에서 초빙할 인재는 직접 하나하나 가까이서 면접을 봐야 하는데 이 바쁜 상황에 언제 그럴 여유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설렁설렁 아무나 그 자리에 앉히기에는 니폰유센이 한국에 본사를 둔 곳도 아니었고 대부분의 직원이 일본인이어서 믿을 만한 사람이 앉아야 했다·
그래서 고민 중이었다·
“제가 어제 자원사업부 오지환 부장을 만났었는데 오 부장이 조금 뜬금없는 소리를 했어요·”
“뭔데요?”
“해외자원 사업부 윤정환 상무를 니폰유센 대표로 생각하고 있는지 상무님한테 한번 여쭤봐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냥 물어봐 달라고요? 내가 윤정환 상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네·”
“더는 없고요?”
“네 그냥 그것만 부탁했습니다·”
“왜 그걸 부탁했는지 물어봤어요?”
민희는 살포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말했다·
“윤정환 상무에게 본인이 찍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윤정환 상무를 니폰유센으로 보내야 회사 생활이 순탄할 것 같다는 투로 말했습니다· 제가 윤정환 상무가 어떠냐고 여쭤보면 자연스럽게 상무님께서 사장 후보군에 윤 상무님을 추가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허··· 그래요?”
대개 윗사람과 문제가 생기면 윗사람보다 자신이 자리를 옮길 생각을 하지 윗사람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릴 생각은 못 하는 법이다·
예전에 오 부장과 일본에서 같이 일해봤기 때문에 그의 사주를 본 적 있었는데 머리는 잘 쓰는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파격적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었다·
게다가 친화력이 남다른 사람이라 누구와 적대할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이런 일로 움직일 줄이야····
“니폰유센 대표가 아니라면 전무 급 이상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전무 급 이상도 괜찮다? 진짜요?”
“네·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영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네··· 오 부장이 그렇게 말했다는 거죠?”
“네 확실히요· 어떤 부분이 이상하신데요?”
“전무 급 이상도 괜찮다는 말· 본인이 상무가 아닌데 어떻게 괜찮을 건지 확신하는 거예요? 한국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에서 일하는 건데 사장도 아니고 전무 급이면 무조건 좋은 건가?”
민희는 영훈이 직장인의 생리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좋을 걸요? 니폰유센 전무로 일하면 다음에 다시 한국으로 올 때 사장 급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영훈은 빙그레 웃었다·
“가족하고 떨어져 지내는 게 싫을 수도 있고 아니면 가족이 반대할 수도 있죠· 다른 한편으로 회장님하고 누군가가 가까워져서 윤정환··· 전무? 하여튼 전무라고 칠게요· 윤 전무가 원하던 자리를 누군가가 가로채려고 하면 막을 수 있겠어요?”
“그건····”
“경력이야 쌓이는 건 맞는데··· 회사생활이 어디 데이터만 가지고 되는 건가요? 로봇이 일하는 게 아니고 사람이 일하는 건데· 내가 윤정환 상무라면 좋은 거 반 너무 일본에서 일하느라 그룹 핵심 실세와 떨어져 있어서 불안한 거 반··· 이렇게 생각할 것 같은데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 그걸 오지환 부장이 모르겠어요? 사장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전무 급으로 가는 건데?”
“그럼···?”
“이건 오지환 부장 생각이 아니에요· 당사자가 아니면 이렇게 확실하게 좋다 싫다를 말할 수 없죠·”
민희는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설마 이게 지금 윤정환 상무가 일부러···?”
“글쎄요· 어떻게 되는지 한번 지켜보기로 해요· 오 부장이 알아서 한다고 하니까 궁금해지네요· 어떻게 판을 만들어보려는지·”
“알겠습니다·”
민희가 나가고 영훈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궁금해진다고 했지만 사실 영훈의 관심사는 이런 게 아니었다·
지이잉·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오랜만에 조치연에게서 온 전화다·
“여보세요?”
[고얀 놈· 늙은이가 전화를 안 하면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구나·]
“죄송해요· 일이 바빠서요·”
[바쁘긴··· 나 좀 보자·]
“네 그래야죠· 그런데 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이놈아· 늙었다고 그걸 잊어버렸겠느냐? 약속 장소로 나오면 내가 검사 한 명 소개해주마· 네가 보고 잘 들 칼인지 무도 못 썰 놈인지 한번 가려내 봐라·]
“알겠습니다· 가죠·”
조치연은 부연설명 없이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도착한 문자·
약속장소를 알리는 것이었다·
특이하게도 자정이 넘은 새벽 1시 반포대교 남단 한강 둔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 전세 역전(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