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예의 대가(1) >
영훈은 자고 있는 연희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하지만 예민한 그녀는 영훈이 몸을 일으키자 바로 잠이 깨버렸다·
“가는 거야?”
“어 일어나지 마·”
“빨리 들어와·”
“알았어·”
연희는 다시 눈을 감았고 영훈은 조용히 나왔다·
혼자 살았다면 1시 약속 정도는 그냥 깨어있다가 나갔을 텐데 내일도 새벽같이 출근해야 할 연희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영훈은 대충 옷을 챙겨입고 차를 타고 나와 반포대교 남단으로 향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고 차가 막힐 시간도 아니었기에 20분도 채 되지 않아 약속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새벽 1시임에도 드문드문 사람이 보였다·
영훈은 굳이 차에서 나가지 않고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1시 정각이 되자마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김상철 검사입니다· 물건은 가지고 오셨죠?]
검사를 만나러 온 건 맞는데 뜬금없이 물건이라니?
게다가 조치연에게서 온 전화도 아니고 검사에게 직접 온 연락이기에 조금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음··· 일단 만나서 이야기할까요?”
[알겠습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영훈은 자세한 위치를 알려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작은 키에 조금··· 자유분방하게(?) 생긴 정장을 입은 남자가 차에 올라탔다·
“안녕하십니까· 김상철 검사입니다· 조치연 씨가 보내셨죠?”
아무래도 조치연은 이 자리에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일부러 둘만 만나도록 자리를 마련한 듯한데····
“비슷합니다·”
“비슷하다뇨? 물건 전달해주기로 하고 오신 거 아닙니까?”
“일단 제 소개부터 하기 전에 김상철 검사님이시라고요?”
“맞습니다·”
“그럼 소속하고 생년월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김상철 검사가 미간을 찌푸린다·
“그쪽이 불러놓고 뭐 하는 겁니까?”
“서로 의사소통에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먼저 확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후··· 동부지검 형사 5부 소속이고 800710입니다·”
“잠시만요·”
영훈은 바로 기조실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시간에 전화하기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동부지검 형사 5부 소속에 김상철 검사님이라고 있는지 확인해주세요· 생년월일은 800710입니다·”
사실 조치연이 불러낸 검사이기에 신원확인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한 것은 그의 생년월일을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5분 정도가 흐르고 확인문자가 도착했다·
영훈은 그걸 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으시군요·”
“아니 본인들이 날 불러놓고····”
“안녕하십니까· HS물산 기획조정실 최영훈 상무라고 합니다·”
이 상황에 악수를 청하는 영훈을 보고 그가 인상을 쓰면서도 손을 맞잡았다·
“HS물산이요? 아니 당신이 왜···?”
“조치연 씨가 물건을 보낼 테니까 여기로 나오라고 했나요?”
“하··· 이 사채업자 새끼가 날 엿 먹이네·”
김상철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엿 먹인 건 아닙니다· 전 검사님을 뵈려고 나온 게 맞으니까요·”
“그럼 당신이 날 만나게 해달라고 사주한 겁니까?”
“아니요· 오히려 부탁한 건 조치연 씨죠·”
“이게 무슨 소리야··· 지금 스무고개 해요?”
“혹시 조치연 씨가 넘겨준다는 게 장부인가요?”
김상철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도 장부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검사님은 어느 정도까지 알고 계실까요?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한 건지 아닌지를 알아야 뭐라고 답을 드릴 수 있는데요·”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영훈을 살피더니 물었다·
“당신이 왜 장부에 관심을 보이죠? HS물산에서 정치권에 로비라도 했었나? 아 전에 군산조선소 문제부터 해서 정치권에서 많이 협조해주긴 했었는데····”
“정치권이라···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영훈의 개의치 않는 모습에 그는 혼란을 느낀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훈은 말을 이었다·
“장부에 대해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제 장모님의 동생 되시는 분이 조치연 씨 밑에서 오래 일을 배웠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됐는데 어쩌다 장부를 가지고 꽤 오랜 시간 고민했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당신한테 장부 이야기를 했다고요? 본인 목숨줄이나 다름없을 텐데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닌 당신에게?”
“제가 좀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뭐 그게 중요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일단 계속해봐요·”
“장부를 어떤 검사에게 줘야 제대로 수사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셨습니다·”
“허··· 대한민국 검사를 뭘로 보고····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가장 확실한 방법을 알려드렸습니다·”
“어떤 방법?”
“정의감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장부의 당사자와 원한을 가진 검사· 그런 검사라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말씀을 전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내가 장부의 당사자와 원한이 있다고?”
대화를 하며 그의 사주를 계산해보았을 때 그는 확실히 검사가 될 사람이긴 했다·
속칭 사주에 칼이 있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사주였으니까·
똑똑한 데다가 초년 사주가 좋았고 경쟁의식도 있으면서 국가의 녹을 먹을 운명도 타고났다·
거기다 추가로 명예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중요했다·
“네· 세영그룹과 오래된 악연이 있을 사람이라면 적합하지 않을까 했었는데··· 혹시 그러십니까?”
김상철 검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걸 보고 영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나 보군요· 정확히 어떤 사연이 있었습니까?”
“장부에 세영그룹에 대한 비리가 있다고요?”
그는 영훈의 질문에 다른 소리를 한다·
“그렇다면요?”
“웃기는군· 일리가 있기는 한데 내가 아니라고 해도 그 정도 되는 장부라면 어느 검사든지 다 탐낼 겁니다· 그 사건을 쥐고 정국을 흔들어대면 단번에 스타 검사가 될 건데 누가 그걸 마다하겠어요? 그 정도 사안이면 아무리 세영그룹이 힘이 세다고 해도 못 막습니다·”
“장부에 검찰의 비리까지 같이 들어있다고 하면요?”
“말이 심하군요· 감당할 수 있는 말을 하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HS그룹에서 나왔다고 해도 방금 언행은 문제가 아주 많습니다·”
“미안합니다· 검찰 조직을 비하할 의도는 없었어요· 그저 그런 사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 그냥 넘어가고 일단 세영그룹과는 어떤 악연이 있으십니까?”
검찰의 비리가 어찌 중요하지 않을까·
하지만 영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면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영훈의 눈빛에는 강한 힘이 담겨 있었고 굳이 이 상황에 비밀로 할 것도 아니었기에 그는 자연스럽게 옛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래전에 내가 고시 공부를 할 적에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신림동 고시원에서 학원을 갈 때면 가끔 마주치는 여자였는데 어느 날 식당에서 우연히 합석하게 된 이후 꽤 친해졌었죠· 당시 식당 아주머니에게 어찌나 고맙던지··· 경찰공무원을 꿈꾼다기에 서로 응원하며 공부했었
습니다·”
“·······”
“고시 공부를 하기 때문에 차마 사귀자는 말은 못 했었는데 어느 날부터 얼굴이 많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어요·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돈 때문에 마음 고생이 많았다고 하던데···· 지금까지 그때 왜 그렇게 힘들었냐고 물어보지 못했던 게 후회가 됩니다· 우리 집은 꽤 잘 살았거든요· 도와
달라고 했으면 도와줄 수 있었는데·”
“그래서요?”
“경찰공무원 시험을 그만둔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리고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리고 삼 년쯤 흘렀나? 룸싸롱 업계에서 제일 간다는 놈을 탈세혐의로 잡아넣으려고 하다가 술집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만났다는 말인가요?”
“아니요· 장부에서 봤습니다· 업주들이 아가씨들에게 돈을 빌려주면 떼먹고 도망갈까 봐 가명이 아니라 본명을 적는데 익숙한 이름이 있더라고요·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느낌이 이상해서 알아봤습니다· 죽었더군요·”
결말이 충격적이다·
“갑자기 왜···?”
“세영그룹 회장· 그놈이 개인적으로 많이 불렀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하지만 수사하지 못했습니다· 우울증에 의한 자살이었고 불행했던 자신의 인생을 저주하는 유서에 세영 회장 이름도 나왔지만 그것만으로는 윗선에서 수사를 허락해주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수사를 허락했다고 해도
잡아넣을 죄목도 마땅치 않았어요· 시발놈··· 혹시 담배 피워도 됩니까?”
절대 안 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차마 안 된다고 할 수 없어 창문을 내려주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쭈욱 빨고는 말했다·
“만약 그 장부에 세영의 비리내역이 들어있다면 대한민국에서 나보다 더 열정적으로 수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담배를 다 필 때까지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그가 담배를 다 피자 영훈이 창문을 올리고는 말했다·
“만약 위에서 수사를 거부한다면요?”
“그래서 장부를 봐야 해요· 내가 장부를 보고 확실한 증거라고 판단되면 위에서도 수사를 허락할 겁니다·”
“그래도 막으면요?”
김상철 검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말했다·
“그래도 합니다·”
“좋네요· 장부는 조치연 씨가 가져다줄 겁니다·”
그는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그럼 지금까지 뭐 한 겁니까? 장부 가지고 온 거 아니었어요?”
“하하 아까 검사님이 직접 말하셨잖아요? 그 장부를 목숨처럼 생각하는데 그걸 남에게 맡기겠습니까?”
“그럼 당신은 여기 왜 나온 겁니까?”
“당신을 만나보려고요·”
“나를요?”
“네· 애초부터 조치연 씨는 내가 당신을 만나봐 주길 바랐습니다· 당신이 장부를 가지고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지 내가 만나서 판단한 겁니다·”
“그래서 방금 시험을 통과했다 이 말이죠?”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허··· 당신 조치연과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그건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알게 될 겁니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저와 조치연 씨는 어떤 이익을 두고 협력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송병창 사장님이라면 모를까·”
“확실한 거죠?”
“나중에 알게 될 겁니다·”
그는 차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다시 문을 닫고는 물었다·
“장부에 정말 검찰의 비리내역이 들어있는 겁니까?”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은 못 본 거군요?”
“네·”
“그럼 확실하지 않은 거네요?”
“음··· 만약 저에게 둘 중 하나를 걸라고 하면 전 조치연 씨의 말이 맞다는 쪽에 돈을 걸 것 같습니다·”
그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는 말했다·
“그럼 내가 수사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건데 당신은 그걸 알면서도 내가 수사를 할 수 있다고 믿는 겁니까?”
“맞아요· 당신은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죠?”
“그냥 느낌이 그래요·”
차마 타고난 성격이 독하고 끈질긴 데다가 속이 좁고 사소한 것에도 집착하는 그의 성격 때문이라고 할 수 없었다·
서로 좋아했다고 하지만 사실 그가 말한 이야기를 영훈은 백 프로 믿지 않았다·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혼자만 좋아했을 가능성도 컸다고 봤으니까·
그럼에도 그의 마음에는 복수심이 불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연애운도 결혼운도 없는 그는 분명 모솔일 터였고 그때의 짧은 사랑을 훼손한 세영그룹 회장에 대한 적개심은 그 무엇보다 클 것이니까·
오래된 원한을 두고두고 잊지 않는 그라서 제대로 된 증거만 손에 들어오면 수사를 포기하지 않을 터였다·
“이거 참··· 만약 당신이나 조치연 말대로 정말 검찰 내부 비리까지 들어있다면 나 옷 벗을 각오해야 하는 겁니다·”
“안 그래도 우리 회사 법무팀이 다른 회사에 비해서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것 때문에 옷 벗게 되시면 대한민국 최고 로펌 대우로 모시겠습니다·”
“그건····”
“별로시죠?”
거절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영훈이 빙그레 웃는다·
그가 미간을 찌푸릴 때 영훈이 말했다·
“세상 이처럼 정의로운 일을 하면서도 옷 벗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게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정의가 땅에 떨어지면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니잖아요?”
“그거야 맞는 말인데····”
맞는 말이되 도덕시간에나 나올 말이라서 김상철 검사로서는 썩 와닿지 않았다·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하셨는데 고작 일개 기업 법무팀에 들어와 경영진 일가의 수발이나 들어서야 쓰겠습니까·”
“그래서요?”
“훌륭한 일을 하셨으면 더 훌륭한 일을 하실 수 있도록 큰 곳으로 보내드려야죠· 다음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나갈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아 다음 대선에서 이긴 여당으로요·”
“어느 당이 됐든 말인가요?”
“네· 검사님이 원하시는 당으로·”
김상철 검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 명예의 대가(1) > 끝